직장이 나를 노예화시키는 진짜 이유
“왜 나는 예민할까?”
“왜 저 사람은 저런 반응을 보였을까?”
“왜 사람들은 이 구조를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걸까?”
나는 어릴 적부터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일들에 홀로 질문을 던지곤 했다.
남들이 그냥 그런 거라며 넘기는 일에도 나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너무 유별난가 싶어 말을 아낀 적도 많았지만, 속으로는 늘 ‘왜 그런가’를 곱씹었다.
그 ‘왜’는 단순한 반항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내가 속한 세계의 작동 원리를 알고 싶었고, 그 원리에 맞게 살아가고 싶었다.
의심은 회피가 아닌 이해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하지만 사회는 이런 질문을 반기지 않는다.
조직은 속도와 효율을, 사람들은 공감을, 상사는 복종을 원한다.
‘왜’라는 질문은 위계가 분명한 구조 속에서 종종 불편하고 위험한 것으로 취급된다.
일하면서 나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상사에게 “왜 그걸 해야 하나요?”라고 묻는 건 눈치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설령 묻는다 해도 돌아오는 답은 형식적이거나 애매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질문한 나 자신이 오히려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 같았다.
더 답답한 건,
간신히 알아낸 답이 내 기준에서 납득되지 않더라도
그 지시를 거스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 순간부터 그 일은 ‘회사 문제’가 아니라 ‘내 스트레스’가 된다.
그래서 나는 후배들에게 자조 섞인 조언을 한 적도 있다.
“회사에서는 ‘왜’라는 질문은 하지 마. 너가 바꿀 수 있는 일에만 ‘왜’를 던져.
그렇지 않으면 너만 지치게 돼. 대부분의 경우엔 ‘어떻게’가 더 중요하니까.”
하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다.
정말 중요한 건 ‘어떻게’가 아니라 ‘왜’다.
‘왜’를 제대로 이해하면 ‘어떻게’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반대로, ‘왜’를 모르거나 납득하지 못한 채 만들어진 ‘어떻게’는 늘 어설프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는 ‘왜’를 묻는 방법을 잊는다.
어느 순간부터는 마치 기계처럼
외부 자극에 단순히 ‘어떻게’ 반응할지만 고민하게 된다.
본질은 보지 못한 채,
현상에 대응만 반복하는 일상.
그래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같은 일이 계속 되풀이된다.
더 무서운 건,
그 반복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잘못됐는지도 모른 채,
그저 반사적으로 움직이며 하루하루를 지나친다.
조직 안에서는 그나마 괜찮다.
문제는 결국 ‘회사 문제’로 남기 때문이다.
속도와 형식만 맞추면 월급은 나오고,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함’만 유지하면 된다.
물론, 회사의 잘못된 결정으로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때
마음이 괴로운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그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무력감과 자괴감을 피하기 위해 애써 외면하게 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
회사 밖의 삶에서도 ‘왜’보다 ‘어떻게’에 몰입한 채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질문을 멈춘 채 반응만 반복하는 삶.
그 모습이 문득, 너무 기계처럼 느껴졌다.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왜’를 잊지 않으려 애쓴다.
그 질문은 나를 나답게 만든다.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게 하고,
타인을 다르게 이해하게 만들며,
거짓된 정보에 휩쓸리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는 도구가 된다.
나는 두렵기 때문에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익숙함에 속아, 불합리한 구조에 무감각해질까 봐.
타인의 논리에 휩쓸려, 내 생각과 감각을 잃을까 봐.
질문을 멈추는 순간,
거짓에 둘러싸여 나 자신도 사라질 것 같아서.
그래서 오늘도 묻는다.
“왜 나는 이렇게 사는가?”
“왜 이 사회는 이토록 매끄럽게 보이는데도 불편한가?”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하고 행동할까?”
질문은 때로 답보다 오래 남는다.
답은 잊히지만, 질문은 방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