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의 구분은 철저히 인간 중심적이다.
우리는 선과 악을 명확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본능적으로 어떤 것이 선하고 어떤 것이 악한지 감지한다.
대체로 인간과 다른 생명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선’,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악’이라 부른다.
예컨대 사랑은 선이다. 타인을 돌보고 배려하며 생존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기 때문이다.
반대로 살인이나 살상은 악이다. 타인이나 다른 생명체의 목숨을 빼앗아 부정적 영향을 남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을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이 단순한 구분은 흔들린다.
사자가 기린을 죽여 먹는 것은 악일까? 아니다. 사자가 먹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풀만 먹고 살 수 없는 탓에 돼지, 소, 생선 등을 잡아먹는다.
초식동물 역시 식물의 생명을 빼앗는다.
특히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을 빼앗는 과정은 더욱 잔혹하다.
사자는 종종 무리 중 가장 어린 개체를 노린다. 힘이 약하고 방어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약자의 희생을 전제로 굴러가는 잔혹한 시스템처럼 보인다.
뻐꾸기의 번식 방식은 인간의 시선에서 ‘악’처럼 보인다.
뻐꾸기는 자기 둥지를 짓지 않고,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
그 과정에서 원래 있던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 죽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다른 새들이 자신도 모르게 뻐꾸기 새끼를 키우게 된다.
그러나 사자나 뻐꾸기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살아가도록 ‘설계’되어 있을 뿐이다.
그저 생존 전략을 따를 뿐인데, 인간이 보기에는 잔혹해 보이니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흥미로운 상상력이 더해진 만화가 있다. 이와아키 히토시의 작품 '기생수'다.
그 만화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략히 소개하면,
'기생수'라는 특이한 생명체는 숙주인 '인간'의 머리를 잡아먹고,
본인 스스로가 '인간'의 머리를 한 후에 마치 인간처럼 행동한다.
기생수는 인간의 신체로부터 영양을 공급받기 때문에 본체인 '인간'의 신체가 망가지지 않도록 관리한다.
그리고 기생수는 '인간'만을 잡아먹는다.
이 만화의 주인공인 신이치는 기생수들을 '악마'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기생수의 반론이 재미있다.
"내가 생각했을 때 '악마'와 가장 가까운 생명체는 '인간'이다.
우리는 단지 인간을 잡아먹으라고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을 잡아먹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인의 생존을 넘어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생물들을 죽이고, 심지어 사육까지 한다."
아마 다른 생명체들이 봤을 때 인간이야말로 악마이며,
사육당하는 가축들은 자신들이 지내는 곳이 지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심지어 재미를 위해 '동물원'까지 만들어 강제로 다른 생명체들을 가둔다.
다른 생명체들은 본래의 삶의 터전에서 벗어나서 조그마한 철창안에 갇혀
마치 '무기징역'에 해당하는 감옥에 있는 셈이다.
어줍짢게 나만 고상한 척 인간을 비판하려는 건 아니다.
다른 생물들 보호를 위해 채식주의자로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가축을 사육하고 동물원을 만들어 유흥거리로 삼는 걸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어쩌면 '조물주'가 셋팅한 잔인한 시스템 아래에서 조물주가 부여한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플레이어에 불과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선과 악을 가르는 진짜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기 생존에 유리한 것들을 만나면 유쾌함을 느낀다.
사랑, 돌봄, 협력, 안전 같은 것들이 그렇다.
이런 것들은 집단을 강화하고,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선’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생존을 위협하거나 불리하게 만드는 것들을 경험하면 불쾌함을 느낀다.
폭력, 배신, 살인, 기아 같은 것들이 그렇다.
이런 것들은 집단을 약화시키고, 생존을 위협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악’이라고 부른다.
즉, 유쾌함은 곧 생존에 유리함의 감정적 표현이고, 불쾌함은 생존에 불리함의 감정적 표현이다.
선과 악은 실체적 개념이라기보다 감정의 언어에 가깝다.
이 지점을 곱씹다 보면, 선과 악은 절대적 실체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감정의 구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을 유쾌하게 하고 생존에 유리한 것을 ‘선’이라 부른다.
반대로 자신을 불쾌하게 하고 생존에 불리한 것을 ‘악’이라 부른다.
거기에 다른 생명체들의 생존권에 대한 생각은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다.
결국 선과 악은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생존을 둘러싼 인간의 관점이 만들어낸 구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