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청 조사 4국
<과거의 기억이라 지금 현재 조사 4국과는 약간 왜곡되게 기억할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염하러 간다
선배들이 염하러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염이 무슨 말인가 했습니다. 염이라는 단어는 기분이 썩 좋은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죠. 염의 사전적 의미는 죽은 사람의 시신을 깨끗이 닦고 수의를 입히는 일을 말합니다. 다른 기관의 조사가 끝난 뒤 마지막으로 나가서 세금까지 거둬오는 모습을 시신을 수습하러 간다에 비유한 말이었나 봅니다. 어쩌면 마지막 남은 것까지 모두 쓸어간다는 의미기에 그런 은어를 썼겠지요.
행사
아침 6시 영문도 모른 채 버스에 오릅니다. 조사 대상 기업은 대외 기밀이기 때문에 사업장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해당 조사 팀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다른 팀 일에 동원된 직원들은 회사 정문에 도착해서야 여기를 왔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오늘은 옆팀 행사 동원이라고 합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일컫는 '행사'가 아니라 비정기 세무조사를 실시하는 일을 직원들끼리 은어로 '행사'라고 부릅니다. 조사 4국에서 나가는 업체들은 대부분 우리가 한 번쯤을 들어봤을 만한 큰 기업들입니다. 즉 대기업이거나 대기업의 계열사들을 주로 조사하지요. 물론 가끔씩 사회에 이슈가 되는 회사들을 나가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예외적이고 대부분은 연간 매출이 조 단위 규모인 회사들을 나가게 됩니다.
잃어버린 한 끼
그렇게 버스에 오르면 김밥 한 줄을 나눠줍니다. 점심을 몇 시에 먹을지 모르기에 언제가 될지 모르는 한 끼를 위해 꾸역꾸역 입에 넣습니다. 그렇게 조촐한 한 끼를 먹고 잠시 졸다보면 어느새 버스에서 내려야 할 시간입니다. 수십 명의 조사관들이 검은 양복을 입은 채로 사업장에 들어섭니다.
오늘 착수 시각은 10시라고 합니다. 10시 전에 들어가도 안되고 10시 후에 들어가도 안된다고 합니다. 정확하게 10시에 들어가야 한다네요. 다른 팀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정확히 10시에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사업장에 도착하여 주요 임원을 만나 나온 이유와 절차를 설명하고 시작하려면 일이 시작되는 시간은 12시를 훌쩍 넘깁니다. 모든 내용의 설명이 끝나고 서류를 분류하여 목록을 적고 확인시켜 박스에 넣고, 컴퓨터에서 필요한 파일들을 복사하다 보면 빨라야 4시, 늦을 때는 다음날까지도 이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점심은 제시간에 먹지 못할 확률이 99%입니다. 그렇게 빠르면 오후 5시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식사를 하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옵니다.
택배사 직원일까?
서류를 모으다 보면 서류가 산처럼 쌓입니다. 최소 5년간의 사업 활동에 해당하는 각 부서의 자료를 가져가야 하기에 회의실은 서류의 산으로 바뀝니다. 그 서류들을 목록으로 적으며 박스에 담습니다. 박스 테이프 붙이는 솜씨에 회사 직원이 놀란 눈빛입니다. 택배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셨냐고 묻습니다. 일주일에 최소 주 3회 몇 년을 계속하다 보면 테이프 붙이는 솜씨가 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수십 개의 박스를 포장하고 나면 이제 화물차까지 날라야 하죠. 정장을 입은 채 박스를 나르는 일은 그리 수월치 않습니다. 비집고 나온 살들로 인해 박스를 나르다가 정장을 찢어 먹는 직원들을 가끔 보게 됩니다. 상차, 하차라는 말은 택배 회사에서만 쓰는 줄 알았는데 우리는 택배사 직원일까? 아니면 조사국 직원일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품앗이
일반적으로 큰 기업을 나가면 100여 명 정도 되는 조사요원이 회사에 가게 됩니다. 조사를 받는 회사에서는 회사에 나온 100여 명의 직원이 모두 자기 회사를 조사하는 것으로 생각하죠.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조사팀이라고 해봐야 거의 6,7명이 한 팀입니다. 여러 팀의 인원을 모아서 첫날에만 그렇게 나가는 것뿐이죠. 100여 명의 직원 중 실제 그 회사를 담당하는 직원은 10명 이내입니다.
다른 팀 조사를 잘해줘야 우리 팀 행사에 와서도 잘해주기에 서로서로 잘 도와주려고 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자기 팀 조사가 아니면 약간의 열의(?)가 부족하게 마련이죠. 그래서 열심히 해주는 직원이 있으면 그 팀에 동원되었을 때는 우리 팀 일처럼 더 열심히 해주게 됩니다.
실랑이
대부분의 회사 직원들과는 조사 과정에서 상호 협조 아래 일이 잘 이뤄지지만 가끔은 서로 간의 언성이 높아지며 실랑이를 벌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범위가 어긋난 부분까지 무조건 협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사 통지서에 나온 범위와 대상은 조사요원도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가져가야 합니다.
간혹 개인적인 자료가 있으면 어떻게 하냐고 묻는데, 저희가 산처럼 쌓인 서류 중에 개인적인 자료를 굳이 어디 쓸 일도 없고 조사가 끝나면 바로 폐기합니다.
그렇게 행사가 끝나고 가져온 서류와 박스로 창고가 가득 찹니다. 저 서류를 또 언제 보나 싶은 막막함과 회사와의 신경전으로 인한 고단함에 눈물이 맺힙니다. 그래도 또 몇 달이 지나면 이 조사는 끝나 있겠고 새로운 곳으로 또 나가야 하겠죠. 그렇게 행사의 쳇바퀴는 끊임없이 돌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