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라는 라면

라면 같은 믿음, 밥 같은 깨달음

by 일상예술가 정해인

요즘 들어 자꾸 이런 생각이 든다. 진짜 깨달음이라는 건, 어쩌면 고행 속에서만 겨우 한 조각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산속에서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채, 새벽 공기가 뺨을 때리는 걸 그대로 버티며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또 깎아내는 사람들.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낸 끝에 어느 날 번쩍 하고 빛이 들어오듯 “아, 이게 있었구나” 하고 깨닫는 그 순간은, 피와 땀과 눈물처럼 돈으로 계산되지 않는 것들로 지불한 값진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니 우리는 그 값을 치르기가 못내 싫다. 고통은 피하고 싶고, 기다림은 지루하며, 희생은 괜히 손해 보는 것만 같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손쉽고 빠른 길을 찾아 헤맨다. 그렇게 우리는 종교라는 이름의 인스턴트 라면을 끓인다.


봉지를 뜯고 뜨거운 물만 부으면 3분 만에 ‘깨달음 맛’이 난다. “나는 사랑받는다”는 따뜻한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고, “구원받았다”는 후끈한 착각이 배 속에서 피어오른다. 진짜 수행은 건더기도 없는 죽도 밥도 안 되는 치열한 현실인데, 이 인스턴트 위로는… 묘하게 맛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배당으로, 절로, 기도원으로 향한다. 고난은 싫지만 위로는 받고 싶고, 죄는 지었지만 심판은 무섭고, 죽음은 두렵지만 영생은 탐나니까. 그 모든 복잡한 욕망을 3분 만에 해결해 줄 마법의 분말, 그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종교의 스프'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장면을 마주한다. “나는 구원받았다”는 이가 월요일 아침부터 남의 험담을 하고,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외우던 이가 주차장에서 사고를 내고 도망가며, “자비”를 입에 달고 사는 이가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날 선 독설을 퍼붓는다.


종교를 말하는 입은 경건한데 삶은 하나도 경건하지 않은 풍경들을 너무 많이 보았다. 어쩌면 나 또한 그 풍경의 일부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목이 멘다.


왜 그럴까? 라면을 먹고 국물을 다 마신 뒤, “아, 이제 나는 성자다”라고 착각하며 살아온 건 아닐까? 3분짜리 위로가 30년짜리 수행을 대체했다고 믿고 싶어서 말이다. 봉지 라면을 먹었다고 요리사가 되는 게 아니듯, 종교를 소비했다고 수행자가 되는 것이 아님을 나는 잊고 살았다.


내 삶의 냄비에는 늘 ‘간편하게 끓일 수 있는 것들’만 넣어놓고, 그것을 믿음이라 부르며 스스로를 속여왔던 것 같다. 진짜 깨달음은 라면이 될 수 없다. 마트에서 봉지째 살 수도 없고, 뜨거운 물만 부어서는 절대 나오지 않는다. 삶이라는 냄비 아래에 '일상'이라는 불을 켜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시간을 끓여내야만 한다.


그 냄비를 중간에 엎지 않고, 던져버리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는 사람만이 결국 진국 같은 삶의 비의(秘意)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냄비 앞에서 몇 번이나 불을 끄고, 몇 번이나 뒤집어엎고, 몇 번이나 도망치고 싶어 했던 비겁한 요리사였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라면 맛에 길들여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기대를 품어본다. 언젠가는 나도 인스턴트 국물이 아닌, 진짜 국물을 우려낼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희망 하나로 나는 오늘도 내 삶의 냄비 앞에 서 본다. 뜨겁고 느리고, 때로는 지독히 힘들겠지만, 그래도 내 손으로 직접 삶을 끓여내 보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렇게 오랜 기다림 끝에, 작은 깨달음 한 조각 얻을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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