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 속 빈곤의 원인을 묻다
세계는 이미 120억 명이 충분히 배불리 먹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식량을 생산하고 있다.
그런데도 7초마다 한 명의 아이가 굶어 죽는다. 7분도, 70분도 아닌 7초다.
제목부터 시선을 잡아끌었던 이 책은, 동네 도서관에서도 늘 대출 중이라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겨우 빌려볼 수 있었다.
청소년 권장 도서라고도 들었다.
언젠가 내 딸이 책 제목처럼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려?”라고 묻는다면,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그때 막연한 감상이 아니라, 단단한 언어로 설명해 보고 싶어 이 책을 읽게 됐다.
겉으로 보기에 선진국은 음식이 남아돌아 매일 엄청난 양을 버리고, 우리나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흔히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그 남는 음식들, 그냥 아프리카 같은 빈민국에 무상으로 보내주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질문은 순진하다.
저자이자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이었던 사회학자 장 지글러는, 세계적인 기아 문제의 원인을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불공정한 분배 구조에서 찾는다.
지구는 인류 전체를 먹이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을 이미 오래전부터 생산해 왔지만, 그 식량은 부유한 국가와 다국적 기업에 집중되고, 가난한 나라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거의 도달하지 않는다.
부익부 빈익빈의 구조는 수십 년간 가속화되어 왔다.
굶주리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제3세계 농촌과 도시 빈민층이다.
선진국들은 IMF, 세계은행, WTO와 같은 기구들을 설계하고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주도해왔다. 그 구조에서 각 정부는 물론이고 곡물 메이저를 비롯한 거대한 금융자본은 식량을 인간의 기본권이 아닌 투기와 이윤의 수단으로 취급한다. 그들의 손익 계산에 따라 식량 가격은 요동치고, 그 변동의 비용은 가장 가난한 이들의 생존 위협으로 돌아온다.
설상가상, 여기에 가난한 국가 안에서조차 그들끼리의 권력투쟁으로 상황은 도무지 나아질 수가 없다.
기아. 그것은 자연의 재앙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정치·경제 질서의 결과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오래된 야만
혁명은 곧 다가올지니..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세련된 경제 이념이 아니라, 태초의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천민자본주의의 재등장과 같다.
신자유주의를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자유로운 무한경쟁, 규제의 최소화, 이익의 극대화를 최우선시하는 경제 이념"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는 자본주의가 태동한 이후,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거쳐 국가가 일정 부분 개입하는 수정자본주의를 경험했다.
이후 복지국가의 실험이 잠시 이어졌지만, 다시 신자유주의로 회귀하며 “시장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규제를 풀고, 공공의 영역마저 시장에 맡기는 길을 택했다.
‘신(新)’이라는 세련된 접두사가 붙었지만, 그 본질은 강한 자가 더 강해지고 약한 자는 도태되는 구시대적 자본주의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오늘날의 기아 문제는 “불행하게도 아직 충분한 풍요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풍요에 이른 세계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고 있는가에서 출발한다.
이 책은 기아의 원인을 ‘불쌍한 개인’이나 ‘운 나쁜 국가’에서 찾지 않고,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설계 결함으로 파고들어간다.
그렇다면 이 망국적인 신자유쥬의 세계질서는 어떻게 타파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책에서 소개한 부르키나파소의 젊은 혁명가, 토마스 상카라(Thomas Sankara)에게서 그 힌트를 찾아본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방향의 제시, 새로운 질서의 확립은 종종 특출난 한 인물에게서 시작되곤 했다. 우리나라의 사례로 가깝게는 박정희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거대한 세계 경제 질서의 변화를 단 한 인물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리지만, 그럼에도 한 국가의 변화, 한 사회의 질서에 균열을 내는 힘은 결국 어쩔 수 없이 한 인간의 결단과 실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나겠는가.
나의 후원은.. 최선입니까
가끔 TV나 유튜브 광고에서 유니세프나 국제구호기구의 영상을 본다.
팔다리가 깡마른 아이들이 화면 속에 등장할 때면, 저 일이 과연 나와 같은 시대, 같은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가 싶어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도 소액이지만 유니세프를 통해 아프리카의 한 아이를 후원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그 아이와 그 사회를 돕는 좀 더 능동적인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해 보게 된다.
내가 보내는 돈은
과연 얼마나 제대로 전달되고 있을까?
그 돈이 정말 구조를 바꾸는 데 도움이 될까?
나 자신의 안도감에 그치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현실을 제대로 알고
이 문제를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이
미래에는 그들에게 더 큰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국제구호기구와 개발도상국 원조가 아주 의미 없다고 치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을 덮고 나니, 그런 노력들이 여전히 언 발에 오줌 누기에 가까운 것은 아닌지, 불편한 질문이 떠오른다.
기아 문제의 해법은 결국 사회 구조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수정하는 일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고 나서, 다시 새로운 경제 체제에 대한 관심이 고개를 든다.
미래의 우리에게 정말로 희망적인 경제 체제는 무엇일까.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다시 펼쳐보고 싶어졌다.
독서의 좋은 점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한 권의 책이 하나의 지식을 전해주는 데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책으로, 또 다른 질문으로 나를 이끌어준다는 것.
언젠가 딸과 이 책을 함께 읽으며,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천천히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청소년 권장 도서이지만, 지금을 사는 어른들에게도 역시나 권하고 싶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