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하지만 현실적인 미국의 다음 설계도
농업혁명과 산업혁명, 정보혁명을 지나 우리는 이제 전 지구적 질서를 넘어 전(全) 우주적 질서까지 재편될지 모를 디지털 혁명의 문턱에 서 있다. [아메리카 탐문]은 바로 이 거대한 전환기 속에서,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고민하고 있는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책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명확하다.
기존의 관료주의, 자유주의, 다문화주의, 그리고 심지어 민주주의마저도 이 새로운 기술 경쟁의 시대에는 너무 느리고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대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기술적 우위 위에 강력한 민족주의, 반자유주의적 질서, 기독교적 가치관까지 결합한 새로운 국가 모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러한 주장들을 추상적인 담론이 아니라, 단 네 명의 인물을 통해 구체화한다는 점이다.
피터 틸, 일론 머스크, 알렉스 카프, 그리고 J.D. 밴스.
불과 네 명이지만, 이들이 자본과 기술, 정치와 제도를 하나의 선으로 꿰어 그려내는 청사진을 따라가다 보면 묘하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미국의 현재와 미래는 결국 소수 엘리트가 움직인다’는 전제는 불편하지만, 동시에 설득력이 느껴지는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인상 깊었던 지점은, 이런 변화의 시도가 오히려 중국과 같은 일당 독재 체제에서 훨씬 효율적으로 구현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다. 기술, 산업, 안보를 하나의 목표 아래 일사불란하게 밀어붙일 수 있는 체제의 장점.
그렇다면 미국이 택하려는 길은 결국 전제국가나 전체 국가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일까?
또 한 번 흥미로웠던 순간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한국에 대입해 보는 상상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는 점이다.
만약 이 실험을 한국에 적용한다면, 우리는 누구를 ‘네 자리’에 앉힐 수 있을까.
챗 gpt에 실제로 이 질문을 던져보니, 이와 비슷한 책 한 권쯤은 충분히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칭, ‘코리아 탐문’.
책은 재미있다.
하지만 솔직히 대단히 인상적이었다거나 어떤 인사이트를 남겼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결론은 오래된 명제로 수렴한다. 역사는 여전히 소수의 엘리트가 이끌어간다는 것.
그 과정을 디지털 혁명이라는 언어로 재포장했을 뿐이다.
책의 말미에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Great Korea’라는 언급 역시, 저자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라기보다는 급히 덧붙인 인상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 역시 나만의 느낌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가볍지만은 않다.
우리가 믿어왔던 제도와 가치, 특히 민주주의는 이 기술적 전환 앞에서 어디까지 유효한가. 그리고 그 대안이 과연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세계인지.
당연히 답은 없지만, 적어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이미 그 방향으로 고민을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하는 책에서 다룬 4인에 대한 짤막한 요약 내용
1. 피터 틸 (Peter Thiel)
페이팔 공동창업자이자 팔란티어의 공동창업자로, 기술을 단순한 서비스 혁신이 아니라 국가 운영 방식을 다시 설계하는 도구로 바라보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민주주의와 진보 담론이 혁신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제도와 문화의 관성 속에 굳어버렸다고 비판하며, 결단력 있는 창업가와 기술 엘리트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분명하면서도 살짝(?) 위험한 신념을 드러낸다.
그의 정치적 입장에 공감하긴 어렵지만, 개인의 성공을 넘어 국가의 미래 구조까지 사유하려는 태도만큼은 인상 깊다.
2. 일론 머스크 (Elon Musk)
스케일 면에서 압도적이다. 화성 이주가 일론 머스크 개인의 몽상이 아니라, 스페이스X를 중심으로 미국의 우주·국방 전략과 맞물려 실제로 진행 중인 프로젝트로 읽힌다. 여기에 테슬라의 에너지 제조 기술, 로봇 옵티머스, 미디어 플랫폼 X, 도지코인까지 더해지며 지상, 가상, 천상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된다.
솔직히 말하면 다소 음모론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자국우선주의나 먼로주의적 태도를 ‘과거 회귀’가 아니라 미래 질서를 선점하기 위한 준비로 읽는 작가의 시선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세계가 이미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사실 아닌가.
3. 알렉스 카프 (Alex Karp)
팔란티어의 공동창업자이자 CEO로, 철학을 공부한 이력을 바탕으로 빅데이터와 AI를 ‘통치의 핵심 자산’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9·11이 보여준 것은 테러보다 ‘정보의 실패’였고, 그 해법은 흩어진 데이터를 한데 모아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플랫폼이라는 문제의식이 이 챕터의 중심이다.
카프는 팔란티어를 통해 국가를 하나의 프로그램처럼 업그레이드하려는 인물로 그려지며, 그만큼 권력과 감시를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읽고 나니 팔란티어 주식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남았다는..
4. J.D. 밴스 (James David Vance)
이 모든 기술적 재편을 사회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맡는다.
러스트벨트 출신의 서사로 대중적 인지도를 쌓은 그는, 기술로 재설계된 국가가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가치, 정체성·공동체의 재구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쉽게 말해, 카프가 국가의 ‘운영체제’를 만든다면, 밴스는 그 운영체제가 받아들여지도록 만드는 사회적 이야기와 감정을 공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