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를 살아남게 한 것은 힘이 아니라 연결이었다
1.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성선설과 성악설의 논쟁은 인류 사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질문 중 하나다. 동양에서는 맹자와 순자가, 서양에서는 토마스 홉스와 장자크 루소가 서로 다른 전제를 세웠다. 홉스는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규정하며 강력한 제도와 권위가 인간을 제어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루소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가 인간을 타락시켰다고 주장했다.
[Humankind]에서 저자 브레흐만은 이 오래된 논쟁에 루소 쪽으로 무게를 둔다.
그의 주장은 감상적 낙관주의가 아니다. 방대한 사료와 연구를 토대로 인간이 생각보다 훨씬 협력적이고 친사회적인 존재라는 점을 논리적으로 재구성한다. 눈에 보이는 근거 위에 쌓아 올린 낙관이라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2. 함께 어울리며 배우는 존재
“우리는 배우고 유대하며 놀기 위해 태어났다.”
이 문장은 저자의 인간관을 압축한다. 그가 제시하는 ‘호모 퍼피’ 가설은 인간이 공격성을 줄이고 유년기의 특성인 호기심, 놀이, 학습 능력을 성인기까지 유지한 채 스스로를 길들여온 종이라는 설명이다.
선사시대 네안데르탈인과 사피엔스의 비교는 이 논지를 구체화한다. 체격과 두뇌 용적에서 네안데르탈인이 열세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도구의 사용, 불의 활용, 장례 문화 등 여러 측면에서 두 종은 상당히 유사했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것은 사피엔스였다. 일부 가설은 그 차이를 집단 규모와 네트워크 확장 능력에서 찾는다. 사피엔스는 더 먼 거리의 교역, 상징 체계의 공유, 광범위한 연합을 통해 보다 큰 신뢰망을 형성했다. 협력의 범위가 더 넓었고, 연결의 밀도가 더 높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리처드 도킨스가 설명한 진화 논리와도 맞닿는다. 유전자는 이기적일 수 있지만, 그 전략은 협력을 통해 구현될 때 오히려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 또한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가 말했듯, 인간은 상상의 질서를 공유하며 대규모 협력 체계를 만들어왔다.
폭력과 갈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현대의 미디어 환경 속에서 우리는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을 알게 모르게 학습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의 생존을 가능하게 한 힘이 공격성이 아니라 협동과 신뢰였다면, 인간을 불신하는 전제보다 신뢰를 기반으로 한 사회 설계가 더 현실적인 선택일 수 있다.
3. 만들어진 악 & 가두어져 버린 선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 충격 실험과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은 인간의 복종성과 잔혹성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오랫동안 인용되어 왔다. 특히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은 영화로까지 제작되며 대중적 상징이 되었다. 우리는 이 실험들을 통해 “평범한 사람도 상황만 주어지면 쉽게 악해질 수 있다"라는 교훈을 배워왔다.
그러나 저자는 이 유명한 실험들의 이면을 파고든다. 참가자에게 반복적으로 압박을 가했던 실험자의 개입, 각본에 가까웠던 지시, 선택적으로 해석된 데이터, 재현되지 않는 결과들. 실험은 중립적 관찰이 아니라, 이미 가설을 전제로 설계된 무대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우리가 ‘악의 증거’로 받아들였던 장면들이 사실은 훨씬 복합적인 조건과 일부 의도된 설정 위에서 생산된 결과였다는 점은 인간 본성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흔든다.
이쯤에서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어쩌면 정말로 인간의 악함이 증명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인간이 본래 위험한 존재라는 전제는 강한 통제와 규율, 감시와 처벌을 정당화한다. 뉴스는 폭력을 확대 재생산하고, 미디어는 예외적 사건을 일상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 속에서 “인간은 믿을 수 없다”는 문장은 상식처럼 굳어진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를 경계해야 안심이 되는 존재로 설정함으로써, 복잡한 세계를 보다 단순한 이야기로 이해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질문은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이토록 협력적이고 친사회적인 본성을 지녔다면, 우리는 왜? 어떻게 하다가 서로를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는 그 전환점을 농업 혁명에서 찾는다. 수렵, 채집 사회는 비교적 소규모 집단 중심의 평등한 구조를 유지했지만, 농업의 시작과 함께 정주생활이 확대되면서 잉여 생산물이 발생했고, 그것은 곧 소유와 축적, 계층화로 이어졌다.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질병은 확산되었으며, 노동 시간은 오히려 늘어났다. 문명은 번영했지만, 개인의 삶은 반드시 더 행복해졌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 하라리의 도발적 주장이다.
브레흐만 역시 농업과 정주생활에서 인간이 서로를 경계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농업이 모든 것을 “망쳐놓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농업은 도시와 문자, 과학과 예술의 토대를 마련했다. 문제는 농업 이후 등장한 거대한 사회 구조가 인간의 친사회적 본성을 소규모 집단 내부에 묶어두고, 타 집단에 대해서는 경쟁과 불신을 제도화했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협력은 여전히 작동하지만, 그 범위는 구획되었고, 경계는 강화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선한 본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 본성이 작동하는 범위를 좁혀버린 것은 아닐까.
인류는 여전히 협력한다. 다만 누구와 협력할 것인가를 두고 끊임없이 선을 긋는다.
그렇다. 오늘날의 과제는 인간의 본성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신뢰의 범위를 확장하는 일이다.
4. 인간성의 회복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은 복잡하지 않다.
노르웨이 교도소의 자율성과 존중 중심 운영 사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진실과 화해 과정은 강력한 통제보다 신뢰와 접촉이 더 효과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을 잠재적 범죄자로 다루는 대신,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로 대하는 방식이다. 서로에 대한 경계를 풀고 접촉과 대면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면 인류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어쩌면 교과서적인 이상이자 한낱 공자님 말씀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친사회적이라면, 해결책 역시 과도하게 복잡할 필요 없지 않을까? 제도의 설계는 인간관의 반영일 뿐이다.
이 책은 단순한 낙관론이 아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통념을 하나씩 해체하며 다시 조립하는 지적 작업이다.
인류의 발전과 인간성을 탐구해나가는 과정이 무척이나 몰입도가 있었고, 기존에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상식이나 지식이 하나씩 깨 부서져나가는 경험은 늘 그렇듯 짜릿함을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정말 흥미로운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총, 균, 쇠], [사피엔스]를 처음 읽었을 때와 유사한 충격을 받았다.
이제 겨우 2월이지만 아마 올해 읽은 책 중 만족도 TOP이 되지 않을까 싶은 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