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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현 Mar 26. 2019

무너지는 '日 평화헌법'

아베의 일본, 동행은 불가능하다 (3)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헌법을 개정한다는 것은 완성된 국민적 합의를 필요로 하는 중차대한 사안이다. 특히 2차 대전의 패전국으로 과거 반성과 평화 추구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일본 '평화헌법'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손주, 할애비가 똑 닮은 '막가파식' 헌법 파괴


아베 신조 In 2015

2015년 8월 31일 일본 도쿄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하는 日 시민들(사진출처: 한겨레신문)

 2015년 8월 31일 일본 도쿄. 늦여름 비가 유난히도 추적거리며 내리던 날, 일본 국회의사당 앞은 12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로 채워졌다. 일본 정치사에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혁명에 의한 정권교체의 역사가 거의 없는, 게다가 정치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많지 않았던 일본 민중들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전쟁 반대! 아베 퇴진!


집회에 모인 사람들의 목소리는 뚜렷했다. 그들은 교묘한 안보법 개정으로 '전쟁 가능한 일본'을 만들겠다는 아베 정부의 선언에 분명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있었다.


 한창 집회가 정점으로 치달을 무렵, 검은색 우비를 갖춰 입은, 점잖은 백발의 장년 신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일본이 자랑하는 천재 아티스트 '사카모토 류이치'였다. 조용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그는 일본이 지향해야 할 평화를 이야기했다. '(지금 아베 정권 아래) 민주주의와 헌법은 망가지고 있다' 면서 운을 뗀 그는 일본 국민에 뿌리내리고 있는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켜야 할 것을 역설했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이 외침은 당시 광장에 모인 12만 일본 국민, 전국 300여 곳에서 벌어진 시위군중의 우려와 한숨을 정확히 담고 있었다.


시위에서 연설하는 사카모토 류이치


 그러나 그해(2015년) 9월, 이 같은 전 국민적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자위대가 다른 나라를 공격할 수 있는 단서가 되는 '집단적 자위권'을 규정한 11개 안보법안은 진격의(?) 아베 총리에 의해 유유히 강행된다. 국회 앞 대규모 집회가 있은지 불과 2주여 지난 17일에는 문제의 11개 '안보법'이 참의원 안보특별위원회 통과했다. 이에 반대한 일본 야당 의원들은 육탄저지까지 각오하며 통과를 막으려 했지만 자민당의 기습 표결과 그에 이은 강행처리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당했다.


 이어진 18일 본회의, 법안 발효 최종 관문인 참의원 본회의에서 야당 의원들은 '필리버스터'로 맞섰다. 아베 정권에 대한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장시간 토론 연설을 벌이는가 하면 일부러 걸음을 소(牛)처럼 느릿느릿 걸으며 시간을 끄는 '우보(牛步) 전술', 일부러 상복을 입고 회의에 참석해 참배하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등 진풍경이 펼쳐졌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필리버스터는 예정된 한계에 직면했고 시간은 아베 총리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로써 일본은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 즉 주변국을 향해 군사력을 출동시킬 수 있는 국가로 부활했다.

안보법 강행에 반대라는 일본 정치인들(사진출처: 뉴스 1)





 묘한 기시감, 데자뷔가 느껴진다. 그렇다. 독점적 권력을 가진 일본의 정치인이 평화헌법을 두고 이런 식의 '파국'을 연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너무나도 유사한 사건이 과거 한 차례, 연출자는 역시 '기시 노부스케'다. 손자와 할애비의 놀라운 '컬래버레이션'이 여기서 또 한 번 펼쳐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1960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기시 노부스케(중간)와 아베 신조(중간, 안겨있는 아이) (사진출처: 뉴시스)



기시 노부스케 In 1960

 57년 2월, 일본 총리대신에 취임한 '기시 노부스케'(이하 기시)는 자기가 추진하고자 하는 헌법 개정에 이러한 장애물이 산적해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에 기시는 사실상 평화헌법 개정을 위한 첫 번째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에 돌입한다. 그가 원했던 것은 일본에 대한 미군의 개입을 떨쳐내고 서로 대등한 관계로 일본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새로운 개념의 조약. 특히 무력공격에 대해 미일 양국이 공동대처한다는 제5조는 군사동맹적 성격을 명확하게 해주는 조항으로 일본의 재군비를 사실상 뒷받침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내용이었다. 거기에 더해 미군이 극동의 평화를 위해 일본의 시설 및 구역을 사용하도록 허용한다는 내용(제6조)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일본을 아시아 전진기지화시킨다는 군사적 목적과 의지가 반영된 개정안이었다.


 1960년 5월, 개정 조약안은 전형적인 '날치기'로 일본 국회(중의원)를 통과한다. 기시를 위시한 일본 자민당 세력은 힘이 좋은(소위 '조폭' 같은) 젊은이들을 비서로 동원하여 조약을 반대하는 일본 사회당 의원들을 회의장에서 내쫓았다.

안보조약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키는 일본 국회(1960)(사진출처: 일본 위키백과)


 (민주주의와 헌법 파괴행위에) 분노한 일본 민중들은 국회 앞 거리로 뛰쳐나왔다이후 한 달 동안 시위는 사회·진보진영을 중심으로 기시 수상의 안보조약 개정 추진을 비판하는 대규모 민중운동으로 발전한다. 이것이 바로 1960년 일본 최대의 평화운동이라 평가받는 '안보투쟁'이다. 시위는 전국적으로 이루어졌고 행태는 격화되어갔다. 6월 4일에는 전국적으로 560만 명의 국민들이 집회에 참석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놀란 기시는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야쿠자와 우익단체, 도박꾼 폭력단까지 동원하는 추태를 보인다.


안보 반대!


 6월 15일, 2차 전국에서 580만 명이 참여한 시위에서 기시가 사주한 폭력단체들이 시위대를 습격하여 많은 부상자를 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칸바 미치코'라는 23살의 젊은 여자 대학생이 국회 의사당 정문 앞에서 폭력시위에 휘말려 사망하고 수백만 명이 부상당하는 극악의 사태까지 벌어진다. 이때마저도 기시는 끝내 '자위대 출동'까지 지시하며 반대를 외치는 국민 여론 앞에 그야말로 '맞불'을 놓았다. (다행히 방위청 장관의 거부로 자위대 출동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지만 이런 저항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기시 노부스케 최후의 작품 '新 미일안전보장조약'은 6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국회 비준을 통과, 자동 성립하게 된다. 기시로서는 온갖 추한 꼴을 물론 보였지만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것이다.



1960 - 2019, 59년의 간극과 무너지는 평화헌법


 닮아도 너무나 닮은 2가지 역사적 사건. 전후 일본의 총리대신이자 '조손(祖孫)' 관계였던 두 정치인들의 모습이 55년의 시간차를 두고 이렇게 '오마주' 된다. 1960년의 기시 노부스케와 2015년의 아베 총리는 평화헌법 무력화라는 종국적 목표를 향해 돌진했고 국민적 반대를 온몸에 받으면서도 이를 관철시켰다. 이 두 사람의 활약(?)은 일본의 재군비, 전쟁 가능한 국가로 복귀하는 결정적 기점을 제공한다.


 과연 우연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바로 여기에 우리가 생각해볼거리가 있다. 물론 역사에 '우연'이라는 요소가 있을 수도 있지만 '결과'를 두고 '우연'을 운운할 순 없다. 기시 노부스케가 만든 균열에 아베 총리가 정을 치고 있다. 그리고 2019년 오늘, '기시 노부스케'는 죽었지만 '아베 신조'는 살아있고 여전히 위협적으로 돌진 중이다.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곧 그 두 사람이 벌인 사태의 결과를 본격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시기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사진출처: 연합뉴스)


 아직도 아베 총리가 마음을 돌리길 바라는, 즉 어떠한 정치적 역경으로 좌절한다거나 국제관계를 의식해서 마음을 돌리다거나 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아베의 일본, 동행은 절대 불가능하다. 조부 기시 노부스케가 그러했기에 아베 총리도 그럴 것이다 라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다. 그 일, '평화헌법 개'정은 그들의 정체성이자 이름이다. 정치·사상적 논리 기반이자 후대를 편안히 보내기 위한 보험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바로 이 것을 보험으로 90 평생을 안전히 살아갔다. 아베 총리도 아마, 그리 하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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