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느 검사의 이야기-치열하게 버티는 삶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조금이라도 공감을 해주었으면

by 히어로N

세상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생각을 요즘처럼 자주 해본 적이 있었나 싶다. 언론 기사 몇 개와 정치적 사건 몇 건이 검사의 모든 모습을 대변하는 것처럼 소비되지만, 내가 하루를 살아내는 방식은 그 이미지와 너무나 다르다. 우리는 아침부터 기록을 들여다보고 밤이 깊어 불 꺼진 사무실에 마지막으로 남게 될 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피의자와 사건관계인의 진술을 수차례 반복해 읽으며 거짓말과 진실이 섞인 진술을 분리해 내고, 피해자의 고통을 다시 되짚고, 어떤 결론이 가장 정의로운가를 고민하며 하루를 끝낸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면, 몸은 퇴근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사무실에 남아 있다. 집에 와서 가족과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어도 머리 한구석은 사건을 정리하고 있고, 누워 눈을 감았는데도 머릿속은 조서를 고치고 있다. 주말에도, 휴가 중에도, 여행 중에도, 기록이나 증거가 문득 떠오르고 쟁점을 메모장에 적어두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조사가 끝나면 하루가 끝나는 게 아니고 그 이후에도 고민이 계속 이어진다. 그러다 보면 일과 사생활의 경계는 점점 흐려져 결국 사라져 버린다. 아마 이 직업을 경험해보지 않으면 생각하기 쉽지 않은 삶이다.

야근은 당연한 것이고, 주말 출근은 선택이 아니라 일상이고, 그렇다고 수당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가 한 번 놀라서 “근무 시간 외 수당은 안 나와?”라고 묻는 순간, 내가 얼마나 오래 이 비정상적인 구조를 정상처럼 받아들이며 살아왔는지 깨닫는다.
수당보다 더 큰 문제는 일이 끝나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야근을 해도, 주말을 반납해도, 새벽에 불을 켜둔 채 기록을 읽어도, 사건의 양은 밑 빠진 독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심지어 누군가 쉬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의 사건이 남은 사람에게 재배당되고, 특검과 파견이 생기면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 공백을 떠안는다. 그렇게 늘어난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려면 야근과 주말 근무를 추가로 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사람의 삶이 달린 사건을 대충 넘겨야 하는데, 검사들은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결국 매번 우리 자신을 갈아 넣어 해결한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아가다 보면 개인의 삶은 점점 희미해진다. 취미생활? 여가? 자기 계발? 관심 분야 연구? 그런 단어를 잊은 지 오래다. 좋아하던 책 한 권 제대로 읽는 데 몇 달이 걸리고, 운동을 시작하려다가 사건 하나만 끝나면 해야지 미루다 포기하고, 여행을 계획했다가 영장과 구속 사건이 밀려 들어와 취소하는 일이 반복된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함께하는 시간은 분명 존재하지만, 가족들에게 온전히 마음이 머무는 시간은 얼마 없다. 배우자가 지친 기색을 숨길 때마다(심지어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놓칠 때마다), 부모님이 “바쁘지?”라고 하며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때마다, 미안함이 쌓인다. 그런데 이 감정조차 마음속에 오래 두면 무너질 것 같아 애써 외면한다.

경제적인 보상이라도 되는 삶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평검사들은 그렇게 넉넉하지 않고 경제적인 여유와 보상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검사가 돈을 많이 번다는 이미지는 20년 뒤의 전관을 상상한 허상일 뿐, 지금의 평검사들은 집 대출이 걱정이고, 아이 학원비 걱정을 하고, 가족 병원 치료비가 부담되고, 물가가 오르면 삶이 팍팍해진다고 느끼는 평범한 국민 중 한 명이다. 야근과 주말 근무 등 강도 높은 업무를 해도 추가로 급여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시간이 있어야 정신이 숨을 쉴 텐데, 시간도 없다. 일이 많아서 시간은 없는 데 경제적으로도 달라지지 않는 삶을 몇 년씩 살다 보면, 결국 무언가가 조금씩 닳아 없어지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 2년에 한 번씩 전국을 옮겨 다니며 살아야 한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검사로 근무하는 한평생 옮겨 다녀야 한다. 심지어 부장이 되고 검사장이 되고 그 이상이 되면 1년마다 돌아다녀야 한다(그 이동 시기마저 고정되어 있지 않다).

2년마다 전국 각지를 돌며 살아가는 삶은 겉으로 보면 다채롭고 경험을 쌓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현실은 다르다. 실제로는 삶의 기반이 계속 흔들린다. 이삿짐을 싸고 새집을 알아봐야 한다. 배우자는 직장을 포기하거나 이직을 반복하고 경력이 끊기며, 아이는 학교를 바꾸고 친구를 잃거나 부모님과 멀어진다.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떠도는 삶을 살게 된다. 발령을 1년 유예해 달라고 신청할 수는 있지만, 그것도 허가를 받기 전까지 불안하다. 가족의 계획도 미리 결정하지 못하며, 늘 다음 발령이 어디로 날지, 언제 올지 모르는 상태로 살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쌓이면 마음속에 한 가지 생각이 고인다. ‘가족이 나 때문에 희생되고 있구나.’ 이 생각을 견디는 것이 이 직업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일지도 모른다.

더 고통스러운 순간은 동료가 휴직하거나 출산하거나 몸이 아파 쉬게 되었을 때다. 그 사람을 축하하고 격려하고 위로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속마음 한구석에서는 불안한 목소리가 올라온다. “그럼 그 사람 사건은 누구에게 오지?” 악의가 아니라 공포다. 견디기 힘든 업무량 속에서 누군가 빠지면 남은 사람이 그 업무를 넘겨받아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심으로 축하하고 싶어도 말을 아끼고 어색하게 웃으며 “그래, 잘 됐다”라고 말하는 순간, 마음이 조용히 부서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해지는 조직. 누구도 잘못한 게 없는데 모두가 죄책감을 느끼는 조직. 이 현실 속에서 괜찮은 표정을 유지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현실에서도 대부분의 검사는 고통을 감내한다. 일에 대한 사명감으로, 고통을 겪은 피해자를 위해, 피의자나 피해자의 억울함을 덜어주기 위해, 범죄자가 정당한 대가를 받도록 하기 위해, 법이 보호해야 할 사람을 위해 버틴다. 나로 인해 누군가의 인생이 바로잡히고, 누군가의 눈물이 멈추고, 누군가의 고통이 멈추는 순간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들의 기억이 이 가혹한 시스템을 견딜 힘을 만들어 준다. 이렇게 우리가 공익을 대변하는 ‘검찰’이라는 기관에 속해 있다는 자부심, ‘대한민국 검사’라는 신념, 이것이 무너지지 않는 한 버틸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 자부심마저 흔들리고 있다. 정치적 사건 몇 개가 언론을 타면 그 순간 우리는 조직 전체가 하나의 괴물인 것처럼 취급당하고, 언론의 프레임과 댓글 속에서 검사는 국민을 등친 세력, 권력을 위해 악행을 저지르는 존재, 어떤 비밀스럽고 사악한 회의실에서 음모를 꾸미는 인간처럼 묘사된다.
그 순간 얼마나 많은 검사들이 모니터 앞에서 숨이 멎는지 모를 것이다. 아침까지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야근하고 아이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일을 하다 왔는데, 뉴스 제목 한 줄이 하루 분량의 모든 수고를 “악마의 일”로 뒤바꿔버릴 때의 심리적 충격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내 일의 의미가 사회적 공격으로 바뀌는 느낌, 누군가를 위해 밤을 지새운 날조차 죄의 증거로 둔갑하는 느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일했는데 세상은 내가 무너뜨리려 했다고 믿는 느낌. 이 감정은 내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는다.

가장 괴로운 건, 그 비난이 근거 없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 비난 속에서 우리의 존재가 지워진다는 사실이다. 피해자를 위해 싸웠던 수천 개의 사건, 살기 위해 발버둥 치던 사람들의 손을 잡아줬던 수많은 밤, 스스로 벼랑 끝에 몰려 있던 피의자의 마지막 호소까지 귀 기울였던 순간들, 죄 없는 사람에게 누명이 씌워지지 않도록 끝까지 사실을 뒤집으며 발로 뛰던 시간들, 이런 모든 기록과 시간들이 단 한 번의 정치적 소란으로 사라진다. 마치 우리가 태어나 단 한 번도 정의를 위해 일한 적이 없는 사람인 양 취급된다. 노력도, 헌신도, 삶도, 가족의 희생도, 단지 ‘검찰’이라는 이름 하나 아래에서 죄의 일부로 묶여버린다. 사회가 우리를 미워하고 혐오할 자유는 물론 있다. 그러나 그 혐오가 우리가 무엇을 해왔는지 애초에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성립되는 것이기에 더 아프다.

비난을 들을 때 우리는 억울하다고 외치지 못한다. 외치는 순간, 변명으로 치부되며 더 큰 비난을 부를 뿐이니까. 그래서 말 대신 침묵으로 또 버틴다. 그런데 침묵하며 버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속에서 무너져내리는 무언가를 느낀다. ‘나의 일은 정말 의미가 있는가, 내가 지켜온 사명감은 착각일 뿐인가, 나는 정말 모두가 말하는 악한 부류의 사람인가’ 같은 질문들이 머리를 파고든다. 이런 질문이 반복되다 보면 일 자체가 버거운 것을 넘어서, 존재가 부정되는 데서 오는 고통이 버티기 힘들게 만든다. 사건이 많아서 힘든 것이 아니라, 사건을 처리해도 “악을 키우는 사람”으로 취급되는 분위기 속에서 일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힘든 것이다. 열심히 일한 하루가 성취가 아니라 죄목이 되는 삶. 그것이 검사들을 가장 지치게 만든다.

세상을 향해 “우리도 국민이다”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우리도 뉴스에 실망하고, 부조리에 분노하고, 정의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우리도 일상 속에서 월급을 받아 생계를 꾸리고, 가족을 챙기고, 부모님을 걱정하고, 아이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직업이 검사가 되었다고 해서 인간의 마음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고통을 견디는 능력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뛰어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모두가 우리를 향해 “왜 너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라고 묻고, “왜 책임지지 않느냐”라고 몰아붙인다. 누군가의 잘못이 조직 전체의 죄가 되고, 나의 선의는 한 번도 기억되지 않으며, 나의 악의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악의가 있다고 단정된다. 바로 이런 모순이 자부심을 잠식한다.

그래도 출근한다. 그래도 기록을 읽는다. 그래도 피해자의 편에 서서 싸우고 억울한 피의자가 없도록 면밀히 사건을 살핀다. 그래도 범죄자가 적절한 형을 선고받고 처벌받게 하려고 영장을 쓰고 공소장을 쓰고 증거를 정리한다. 그 이유를 누가 묻는다면, 사실 거창한 대답은 없다. 단지 내가 하는 일로 인해 억울한 사람이 줄어들고, 피해자가 다시 살아갈 수 있고, 법을 어기고 타인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되는 순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공익을 위한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바로 그 자부심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자부심마저 벼랑 끝에 서 있다.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라는 믿음이 흔들리면, 사람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몸이 무너지면 휴식하면 되지만, 신념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마음속에 작고 조용한 바람을 품는다. 우리를 영웅으로 보지 않아도 좋다. 그저 악마로 보지만 말아 줬으면 좋겠다. 우리가 누군가의 편이 아니라 법의 편에 서려했던 사람들이었다는 걸,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일한 사람들이었다는 걸, 그 단순한 사실 하나만이라도 언젠가 세상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날이 오지 않아도, 내일도 또 기록은 쌓이고 나는 또 이를 들여다볼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해도, 이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내가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또 하루가 이어지고, 또 한 사람이 버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