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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May 22. 2019

201905, 교토 여행 #2

  다리가 아팠다.  전날 우리가 걸은 거리는 2만 보를 훌쩍 넘었다.  어두워진 후에 가모 강변을 걷고 폰토초 거리를 걷다가 술 한잔 하겠다고 니시키 시장 주변의 거리까지 걸어 다녔다.  하루 종일 먹은 것들이 걷는 운동만으로도 충분히 사라진 기분이었다.  일본 여행은 보려거나 먹으려거나 아니면 다른 이유로나 걷지 않으면 안 되는 여행이다.  


  이튿날의 시작은 블루보틀이었다.  가와라마치 역에서 버스를 타고 난젠지 입구까지 이동했다.  블루보틀에서 철학자의 길을 따라 걷고 교토대학 북문 앞의 신신도에 들러보는 것이 이튿날의 계획이었다.  천천히 걸으며 덥지만 봄날의 분위기를 느끼자는 것, 오늘은 가능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간을 즐기자..  화창한 오전, 블루보틀에 도착해서 싱글 오리진 드립과 라떼를 주문한 후에 나는 자리를 잡았다.  이른 아침인데도 자리는 거의 차 있었고, 우리는 이제 막 누군가 떠난 자리를 간신히 잡아 앉을 수 있었다.  나는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이번 여행에는 노트북을 가지고 갔다.  천천히 다니면서 평소에 쓰던 글들을 이어나가자는 생각이었다.  아이가 없으니 조바심이나 구경에의 강박을 가질 필요도 없고, 본래의 목적이 천천히 다니다가 쉬기도 하고 여유도 가지자는 것이었기도 해서이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주변에서 들리는 한국말, 일본말들을 배경 삼아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블루보틀은 브랜드 커피라고 하기엔 맛이 너무 좋았다.  싱글 오리진 커피의 특성을 나름 잘 살려내었고, 깔끔했다.  매장의 특성과 점원의 모습도 어째서 이 카페가 유명해진 것인지를 알게 했다.  그러나, 너무 유명해져서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서는 내가 원하는 카페의 분위기를 기대할 수 없었다.  게다가 관광지에 위치해 있었다.  맛있는 커피나 베이커리를 여유롭게 즐기거나, 또는 몇 시간을 앉아 노트북 작업을 하는 나에게 블루보틀은 아쉬움이 많은 공간이었다. 


  철학자의 길을 따라 걸었다.  난젠지의 오랜 건물이나 수로각은 전에 보았으니 과감하게 지나쳤다.  철학자의 길을 가기 전에 난젠지 앞의 준세이라는 두부집에서 점심으로 유바를 먹었다.  유홍준 따라 하기의 하나였는데, 과거에는 의과대 건물이었다는 점과 정원이 아름답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유바는 먹는 방법이 좀 독특했는데, 전형적인 일본식 요리였다.


  벚꽃이 만발하던 시기엔 참 아름다웠을 이 길은, 지금은 초록으로 무성해져 있었다.  평일 정오를 지나는 시간의 이 길엔 관광객들이 주로 다녔지만 복잡하지는 않았다.  수로를 따라 누치와 잉어들이 보였고, 동네 고양이들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피하지 않았다.  지나며 보이는 공방과 카페들이 도드라지지 않았고, 주택가와는 달리 규모가 조금 크고 고급스러운 집들이 수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그냥 동네 수로 골목길인데, 유명한 길이 되었을까..  그건 단지 철학자가 산책했다는 이유는 아닐 것 같다.  시간이 배이는 모습 그대로 놓아두고, 약간의 손길로 수정만 한 채 관리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시간이 배인 그대로 놓아둔다는 것, 그것은 분명 이 시대 사람들이 선호하는 풍경이자 관광자원이다.  모든 것을 때려 부수고 보기 좋고 편리하게 만들어 놓은 것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편협이고, 그 자리엔 자본의 유통만 자리한다.  사람들은 이제 그런 것에 질려한다.  다시 예전의 오랜 것들을 보고 싶어 한다.  교토가 매력적인 이유이자, 우리나라의 관광이 매우 취약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철학자의 길 중간에 있는 요지야 카페는 유명하다.  특히 한국인 관광객들에게는 거의 성지나 다름없지 않을까 싶은데, 들어가 보니 역시 한국인이 거의 다수였다.  다다미에 가만히 앉아 창 밖의 정원을 감상하는 것이 포인트이다.  이번 교토 여행의 이유 중 하나는 정원 감상이었다.  정원이라는 개념은 일본에서는 독특하다.  나름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꾸며놓고 거리를 두고 감상하는 것이 그들의 정원이다.  용안사, 천룡사, 은각사 등의 정원이 그렇다.  반면에 준세이의 정원과 요지야의 정원은 사람들이 그 안으로 가만히 들어가 정원의 풍경과 어우러지며 감상한다.  주로 상업공간의 정원들이다.  우리나라의 정원은 마당의 개념과 겹쳐지며 자유로이 뛰어놀 수 있다.  아이들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아이들을 아예 풀어놓지 못하거나, 풀어놓아도 뛰어놀 수 없다.  조심하고 가만스레 구경해야 한다.  반면, 우리나라의 정원에서는 마음대로 뛰어놀고 뒹굴 수 있다.  공간의 해석과 활용이 용도와 문화에 따라 많이 다른 모습이다.  


  은각사에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은각사 역시 지난번에 보았으니 과감하게 패스했다.  지도를 보니, 은각사 입구에서 교토대 북문까지는 1.2킬로미터 남짓이었다.  애매한 거리에 우리는 그냥 걷기로 했다.  은각사에서 멀어질수록 사람이 줄고 풍경이 단조로워졌다.  교토대 건물이 보이면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젊은 사람들이 점점 늘었고, 교토대 건물의 어둡고 칙칙한 색의 벽을 따라 걷자 거리는 매우 건조해졌다.  농대 정문에 도시락을 파는 사람이 있어서 도시락을 싸들고 교내로 들어가 볼까 하다가 그냥 포기했다.  오래되고 건조한 건물들 사이에서도 유독 오래되어 보이고 어둑한 건물이 신신도 카페라 알아보는 데엔 어렵지 않았다.  이 곳은 임경선의 에세이를 참조했다. 


  조명 자체가 없었다.  실내는 인테리어라고 할 수 없는 어두운 색의 니스칠을 한 두터운 나무 뼈대가 전부라 해도 무방했다.  탁자는 오랜 수도원 도서관에서나 쓸 것 같은 두껍고 넓은 나무 탁자와 등받이 없이 긴 나무의자가 전부였다.  탁자 하나에 학생이나 회사원들이 한 사람씩 차지하고 앉아 책을 읽거나 서류 작업을 하거나 잠을 자고 있었다.  그 풍경을 정 중앙의 주문대 앞에 선 웨이터가 바라보고 있었다.  음악도 없었다.  뭘 해도 뭐라 하지 않을 것 같지만, 조금만 소리를 내도 시선으로 타박을 당할 것 같은 애매한 공기가 흐르는 공간이었다.  소리라고는 주방에서 들리는 주인아저씨의 말소리와 웨이터가 주문받으라는 소리, 그리고 오래된 정산기가 계산할 때마다 찌릉거리는 소리뿐이었다.  거기서 나는 다시 노트북을 꺼내 한 주의 일기를 써 내려갔다.  노트북 타닥거리는 소리도 신경 쓰일까 싶었는데, 그 정도는 아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저녁에는 교토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검도관 후배를 만났다.  후배가 교토에서 공부를 한 시간이 5년 남짓이다.  오꼬노미야끼를 먹고 싶다는 아내의 말에 후배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가와라마치 역의 프랜차이즈 집이었다.  후배는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에는 번잡한 시내에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후배는 여행자의 입장에서 교토를 여행 중인 우리의 일정을 특이화하기도 했고 일반화시키기도 했다.  교토에 사는 사람과 여행자가 다니는 식당은 많이 분리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신신도 카페는 거의 가지 않고 스타벅스에서 가끔 공부한다고 했다.  이노다 커피나 스마트 커피는 그냥 지나치다 보는 카페이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카페의 특징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철학의 길 중간에 만난 독립서점 호호호좌는 늦은 밤마다 자주 산책 나가는 철학자의 길에서 어쩌다 지나치면서 독특한 서점이라는 느낌만 받았다고 했다.  이치조지의 게이분샤 서점은 잠깐의 연예시절, 데이트하면서 걷다 지나친 예쁜 서점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우리가 임경선의 에세이와 인터넷 사이트에서 미리 보고 알아 온 모든 정보들이 후배 앞에서 독특하지만 별 의미 없는 이야기들로 전락해버렸다.  학생 신분이기도 했지만, 가격이 저렴한 교토대 부근에서 대부분을 해결하지, 자신들은 이리 비싼 시내로 나오지도 않고, 나오더라도 프랜차이즈 식당만 한 곳이 없다고 했다.  여행자와 사는 사람의 차이가 그러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제주에 살면서 제주로 놀러 오는 지인들을 마주하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내가 교토를 여행하면서 느끼고 싶었던 것들은 살면서 느끼는 것들이라는 점을 더욱 절실히 깨달았다.  그것은, 내가 여행 포인트를 잘못짚고 있다는 의미였고, 어쩌면 단 며칠의 여행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것이겠다는 확신마저도 들었다.  내가 느끼고 싶은 교토는, 이렇게 다녀서는 절대 접할 수 없었다.  어제 아라시야마 부근의 동네와, 오늘 철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교토 한 달 살기는 어떨까 했던 고민이 점점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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