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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May 21. 2019

201905 교토여행 #1.

  걷고 걸었다.  일본 여행의 어쩔 수 없는 방식이라고는 하지만, 힘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걷기에 보고, 가까이 다가가고, 만지거나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접할 수 있다.  차를 타고 빠르게 움직인다면 대부분 할 수 없는 일들이다.  속도에 반비례해서, 우리는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농밀하게 만들 수 있다.  한큐 라인의 마쓰오 신사 역에서 내려 마쓰오 신사를 구경하고, 마쓰오 신사의 특산 사케를 두어 잔 마셨다.  덥지만 가벼운 머리와 마음으로 아라시야마 역까지 걸었다.  2차선이라지만, 우리나라의 2차선보다 훨씬 더 좁아 보이는 도로, 길의 한쪽으로만 나 있는 인도를 따라 걸었다.  골목골목을 들여다보며 일본 특유의 폭이 좁은 직사각형 모양의 2층 주택들을 구경했다.  그 뒤로 웅장하고 급격하게 솟은 산세가 마을의 풍경을 느긋하고 차분하게 만들고 있었다.  반대편인 가쓰라 강변 쪽은 비슷한 주택들이 나직하고 오밀조밀하게 모여있었고, 골목마다 한쪽으로 수로가 있어 맑고 풍부한 수량의 강물이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골목 안쪽에 조금 낡고 조용하게 자리한 동네 의원들과 치과의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몇몇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정도로 얼마 보이지 않았다.  중간에 두어 번 지나친 버스 정류장에만 네댓 명씩 모여 있었다.  간판들이 없거나 요란하지 않으니 다른 건물들과 달리 조금 고급스럽게 보이는 건물이 호텔과 그에 딸린 이탈리아 레스토랑인 줄을 조금 둘러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길이 좌측으로 꺾이고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을 만큼의 폭이 좁은 도로가 시작되는 지점에는, 제복을 입고 경광봉을 든 할아버지가 지루하고 나른한 표정으로 작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간간히 중국말이 들리고 백인 관광객들도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보니, 란덴선 아라시야마 역에 가까워진 듯했다.  다시 도로가 넓어지고, 옆으로 강변과 공원이 보였다.  도월교를 지나 란덴 아라시야마 역을 거쳐 우리는 천룡사로 들어갔다.  

  교토 여행을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여행하기 좋은 5월에 휴가를 얻었고, 나는 당장 교토 여행을 계획했다.  전날 우메다 오사카에 늦은 시간 도착했고, 필요한 낚시용품과 음반을 쇼핑했다.  다음날 일찍 한큐선을 타고 교토로 넘어와 가와라마치 역 부근 숙소에 짐을 놓고 바로 아라시야마로 이동했다.  첫날은 서북쪽의 신사들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정원을 감상하는 일정으로 잡았다.  손에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교토 편’이 들려 있었다.  교토를 무척 좋아했지만, 이번 여행을 더욱 강하게 이끌었던 건 이 책이었다.  물론 내가 교토의 신사나 역사 때문에 이 도시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토를 이해하는 데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교토 지도를 출력해서 신사와 들를만한 곳들을 표시하고 동선을 기획할 때, 유홍준의 이 책과, 임경선의 에세이 ‘교토에 다녀왔습니다’를 참고하였다.  

  유홍준의 책은 좋은 참고자료이자 따라 하기 좋은 내용이었다.  술의 신을 모시는 마쓰오 신사에서는 전국 각지의 유명한 양조장에서 온 술통들을 모아놓은 신사 모습을 보았고, 맛있다는 마쓰오 신사 특산 사케를 구입해서 마셨다.  신사 내로 들어가지 않았다.  정원의 모습이 매우 인위적이라 해서였다.  초록이 상당히 짙어진 경내 한쪽의 그늘에서 사케를 두어 잔 마셨는데 아주 깔끔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예쁜 병에 잔이 들어 있어 어디서든 마셔도 불편하지 않았다.  도월교를 건너면서는 이 곳이 신라 도래인 하타 씨가 제방을 쌓아 교토 정착의 기틀을 다졌다는 내용을 상기했고, 천룡사 정원에서는 무로마치 시대 이후의 정원 구성의 기본 틀이 되었다는 내용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일정은 최대한 단순화했다.  동선 내에서 생략할 곳은 과감히 생략하고 지난 여행에서 들른 곳들 역시 과감하게 지나쳤다.  지난 여행에서 우리가 놓쳤던 것들과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을 먼저 고민하고 챙겼다.  천룡사 경내 정원은, 아마도 유홍준의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또다시 그냥 지나쳐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는 란덴 열차를 타고 용안사(료안지) 역에서 내렸다.

  용안사 경내의 연못을 지나 그 유명한 정원을 보는 일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은 열이면 열 모두 15개의 돌들이 어떤 방향에서든 14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애써 확인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흑벽으로 둘러싸여 사뭇 좁은 마당에 여백을 만들어 두고, 거기에 15개의 돌을 배치한 것은 여백을 중시하는 선불교의 영향 때문이었다.  유홍준은 이 정원이 더 인상적인 것은 정면을 둘러싼 흑벽때문이라 말했는데, 시간이 흐르며 생기는 흑벽의 기다란 얼룩 같은 무늬는 쌓을 때 흙에 유채기름을 섞어서 그렇다고 했다.  읽고 보니 이해가 가면서도, 아담한 공간을 흙벽으로 가두어서 더욱 안정적으로 보이는 느낌을 받았다.  언뜻 보면 조금은 나이브한 설치미술 같은 정원의 풍경은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바라보기 좋았다.  그러나, 밀려드는 관람객들로 그러기엔 너무 시끄러운 공간이 되어버렸다.  뒤의 방장 내에는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었고, 미술품 뒤로 살짝 보이는 미닫이 문의 희미한 그림은 14세기 일본 화가인 사쓰키 가쿠오가 그린 금강산이라고 한다.  그는 금강산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키타야마 거리까지는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비싼 일본 교통비의 정수인 택시비가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동선이 애매하고 그리 멀지 않을 때엔 한두 번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시간도 돈이니 말이다.  키타야마 거리는 80년대 조성된 상업지구인데, 이 거리를 방문하는 의미는 독특한 현대 건축물들이 많이 모여 있다는 점에 있다.  교토 부립식물원에서 교토 콘서트홀까지의 단 한 블록 정도의 거리에 눈에 띄는 건축물들이 꽤 많이 보였다.  여기에 참여한 건축가들은 다카마쓰 신, 안도 다다오 등이 있는데, 재미있는 건 다카마쓰 신의 건물들은 너무 파격적이거나 구조의 불안 때문인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헐렸다는 점이다.  나름 유명한 건물은 Tree’s와 안도 다다오의 B-Lock Kitayama, 도판 명화의 정원, 그리고 이소자키 아라타의 교토 콘서트홀 등이다.  사실 나는 건축에 문외한이라 건물을 직접 봐도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Tree’s의 공간 구성, B-Lock Kitayama의 둥근 아치형 외관과 그 뒤로 숨은 본 건물, 그리고 교토 콘서트홀의 단순하면서도 수학적인 웅장함은 굳이 사전 지식이 없어도 독특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도판 명화의 정원이 휴관일이라 입장할 수 없었음이 많이 아쉬웠다.  이 거리는 그리 길지 않은 거리에 건축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양정같은 유명한 함박스테이크 집과 몽블랑으로 유명한 베이커리 카페도 있어서 우리는 배고프지 않게 걸어 다닐 수 있었다. 

  사실 이번 교토 여행은 간단한 동선만 정해놓고 지나다 보이는 곳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천천히 걷거나 머무르는 여행을 계획했었다.  그렇지만, 내가 짠 동선이 생각보다 길고 넓어서, 그러기엔 매우 힘든 일정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책 한 권을 가지고 찾아다니며 여행을 하다 보니, 별생각 없는 여행을 생각했던 것과 달리, 나는 다시 사전 정보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미리 알고 간다는 것은 좀 더 자세히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것밖에 보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지나다 우연히’라는 반가움은 정보가 점점 많아질수록 어려워진다.  또는 이미 쌓인 정보에 포함되며 반가움을 잃어버린 대상이 되어버린다.  나는 다시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들로 걷고 걷는 강행군의 여행을 반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교토가 원래 그런 곳인지, 아니면 내가 문제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직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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