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30. 20190320

by 전영웅

너의 영문 숙제를 보았다. 시의 한 단락이었지. 단락 안에서의 느낌을 서술하라는 문제였던가? 아빠가 전체적으로 느낀 것은, 네게는 충분히 공포스러울 만했다는 점이다. 이전 편지에 말했듯, 중학교 국어시간에 갑자기 쏟아지는 법칙들 앞에서 얼어버린 아빠처럼, 너도 그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영어를 기본으로 하는 학교에서 중학교 과정의 영문 숙제이니, 중학교 1학년 때의 아빠와 그 숙제를 마주한 너의 과정이 거의 같고, 심정도 매우 비슷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일단 그 시는 매우 긴 시의 중간의 어느 단락 하나를 서술해 놓은 것이었다. 그 단락만을 읽고 너의 느낌을 서술하라는 문제였다. 난이도가 무척 높아 보였다. 무슨 시인가 해서 엄마와 아빠는 시의 전체와 시인을 찾아봤는데, 무척 길고 한국에는 번역도 되어 있지 않은 시였다. 게다가 곳곳에 녹아있는 생각이나 의도가 좀 깊어서, 네가 이해하기에는 무척 힘들어 보였다. 영어를 기본 언어로 사용하는 학교에서 제시한 영문 숙제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출제할 만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기본 언어라는 것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생각과 판단을 최대한 깊은 곳에서 끌어내는 데 가장 유용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마치, 한국말을 쓰는 우리가 한국말로 마음 깊은 곳의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는데 가장 유용하게 쓰이듯 말이다. 일단, 그 시에 녹아있는 생각과 의도를 고려한다면, 너에게 있어서 이 시의 전부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단락 안에서의 네 생각만 풀어내면 되는 것이었다.


너를 가장 많이 생각하는 엄마는 시의 전체를 해설해 놓은 글 하나를 너에게 보냈다. 참고하라는 배려였지. 그리고, 너는 그 글을 네 나름대로 영작해서 그것을 너의 생각이라며 숙제로 작성해 놓았다. 아빠는 좀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어릴 적 아빠와 똑같이 그러고 있을까 해서 말이지. 단락이라도 시 자체에 부담을 느끼고 힘들어하는 너를 생각하면, 네가 그렇게 써 내려간 숙제를 아빠는 충분히 이해한다. 무슨 내용인지도 좀처럼 알 수 없고, 그 안에서 뭘 느끼라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숙제는 해 가야 하니 주어진 참고문은 가장 가깝게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였던 셈이지. 그렇지만, 너의 숙제를 보는 선생님은 아마 이마를 짚고 한 숨을 쉬지 않았을까?


모든 문제엔 의도라는 것이 있다. 쉽게 말해서 숙제를 내 준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바라는 기대 같은 것이다. 어떻게 답을 써 줬으면 좋겠다는 기대 말이다. 엄청나게 긴 시 안에서 한 단락만을 너에게 준 것은, 그런 기대 때문이다. 생각은 그 단락 안에서만 해야 한다. 그런데, 넌 어디선가 주어진 참고자료를 가지고 시 전체를 네 생각인양 설명하듯 써 내려갔으니, 선생님은 네 글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빠는 조금 생각을 이어 보았다. 그리고 너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 두 가지를 생각했다. 첫 번째는, 의도는 조금 확장하면 눈치라는 점이다. 모든 문제엔 의도라는 것이 있다고 했다. 그것을 알아채는 것이 눈치이다. 물론 이번 숙제같이 너무 어렵고, 처음 겪어 당황스럽기만 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앞으로는 숙제나 문제를 내주는 출제자의 의도를 잘 생각해 보고, 그리고 네가 살아가며 상대가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채는 눈치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학교에서나, 학교를 마치고 난 후 세상을 살아가면서나 필요한 중요한 것들 중 하나이다. 그리고, 너는 방금 그 훈련을 시작한 것이다.


두 번째로,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정보들을 너무 믿지 말라는 것이다. 엄마는 너를 생각해서 참고자료를 너에게 건넸지만, 너는 그것이 문제의 의도에 맞는지 아닌지 생각하지도 않고 그것을 답으로 써 내려갔다. 네가 어렵고 당황스럽기에 급한 마음으로 그러했음을 알고 있다. 인터넷 상에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정보들 중, 의도에 맞는 답을 골라 찾아내는 일도 중요하다. 제대로 된 정보를 찾아내는 것도 능력인 세상이다. 문제는, 인터넷 상의 정보들이 모두 맞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진실이나 사실에 맞지 않는 가짜 정보도 너무 많다. 그리고, 네가 답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정보만 찾아다니다 보면, 너는 스스로 답을 생각해내기 힘든 수동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정보에 의존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답을 생각해보는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답에 가깝든 멀든, 그런 훈련은 너를 크게 자라게 할 것이다.


엄마가 그곳에 도착한 후, 네 표정이 무척 밝아졌음을 느낀다. 밝은 표정이 사실 너의 당연한 모습인데, 아빠는 당연한 너의 모습에 훼방을 놓았던 것은 아닌지 항상 생각하고 고민한다. 게으를 수 없는 일상인 줄 안다만, 해야 할 일들과 주변에 도울 일이 있다면 주저 없이 챙겨가며 지내길 바란다. 몇 주가 지나면, 너는 엄마와 함께 제주에 돌아온다. 네가 오는 그때에, 제주는 봄이 한창일 것이다. 아빠 나름대로, 너를 맞이할 몇 가지 준비를 해 둘 것이다. 그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다 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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