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아라시야마는 내 어릴 적 고향을 떠올렸다.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제 후배와 늦도록 마신 술의 기운이 아직 몸에 남아있는 아침이었다. 편의점 캔맥주던 수제맥주던 일단은 맛있는 일본에서 아침의 숙취는 각오했지만, 어제는 좀 무리했던 것 같았다. 오늘 일정을 소화하려면 숙취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냥 씻고 우산을 빌려 밖으로 나와 가모 강을 건너 문을 연 간이식당에 들어가 미소된장국으로 아침 겸 해장을 했다.
이 날의 일정은 아라시야마로 가는 것이었다. 가는 방법은 쉬웠다. 어제의 버스경험을 토대로, 부근의 버스정류장에서 한 번에 가는 버스를 타기만 하면 되었다. 가와라마치 역 부근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약 한 시간을 시내를 관통하여 달리니 넓은 강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보이는 정류장에서 우리는 내렸다. 아라시야마 역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좁은 도로와 인도에는 여행 온 관광객들의 우산이 서로 부딪히며 또 다른 느릿한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느릿한 흐름에 우리도 몸을 맡기고 텐류지로 걸어들어갔다. 멀리 높은 산과, 산등성이로 깔린 구름과 안개는 제주에서 보지 못한 육지의 풍경이었다. 오랜만이고 반가운 풍경이었다. 그러고보니, 아라시야마를 흐르는 카츠라 강의 풍경 역시 낯설지 않았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어릴적 살던 전주시내에서 30여분을 차로 달려나가면 만날 수 있었던 전주천 상류나 소양의 풍경과 많이 닮아있었다. 물론 카츠라 강의 너비나 강둑이 훨씬 넓긴 했지만, 강변의 하얀 돌들과 강둑을 넘는 물살, 그리고 곳곳의 모래톱 등은 내 어릴적 놀던 강변을 구체적으로 생각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 기억속의 강변은 이제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지만, 이곳은 얼마간의 시간이 멈추었거나 아주 서서히 흐른 듯 한 느낌이었다. 그 느림이, 내 과거의 추억을 구체적으로 떠오르게 한 것이다. ‘그게 하필 일본에서!’ 라고 하기엔 일본과 한국은 여러가지 면에서 닮은 점이 많다.
텐류지의 감흥은 별로였다. 절 자체가 아름답지 않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우리는 어제부터 오늘까지 계속 절만 보고 다녔던 것이다. 위치와 모양만 다른 절들을 계속 보자니 사찰의 모습도 이를 둘러싼 풍경도 너무 익숙해지고 평범해져, 감흥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저, 비와 일본식 정원이 어우러진 사찰의 고즈넉함만 시선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것도 너무 많은 사람들과 저마다 펼쳐든 우산이 시야를 가려 남은 감흥마저도 수그러들었다.
텐류지를 나와 대나무 숲길로 들어섰다. 그곳 역시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나무는 빼곡하게 자라서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빼곡한 대나무만큼, 사람들과 우산들과, 일본어와 한국어와 중국어와 영어와 때때로 스페인어까지, 황인과 백인과 흑인과 히잡쓴 동남아 여인과 승려복 차림의 어느 외국스님까지.. 대나무숲 좁다란 흙길로 전 세계의 인종과 지역과 문화의 샘플들을 조금씩 모아다 쏟아서 밀어넣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숲의 어두움과 대나무 특유의 청량감은 사람들의 물결에 변질되지 않았다. 나름 만족스럽게 대나무 숲길을 걸었고, 숲길의 마지막에서 작은 저수지와 도롯코 아라시야마 역을 만나 잠시 쉰 다음 다시 숲길을 걸어 나왔다.
사람들의 물결에서 잠시 벗어나, 동네 안으로 들어섰다. 점심때여서 들어갈 만한 식당을 찾으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큰길에서 벗어날수록 점점 한산해지는 분위기가 좋아서 개천을 따라 나 있는 동네골목길로 접어들었고, 란덴열차가 다니는 철길을 건너 다시 카츠라 강가로 나왔다. 점심은 노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노천라멘집에서 간단히 해결했다. 비는 계속 내렸고, 우리는 퍼센트 커피를 찾아가 30여 분을 기다려 작은 라떼 한 잔을 각각 손에 들고 강 위의 다리를 건넜다. 강둑 위 물이 깊은 곳에서는 점퍼를 입은 사공이 목선을 길다란 나무막대로 강바닥을 밀어 강을 건너고 있었다.
강변을 산책하고 싶었으나, 비는 그칠 생각이 없었고 다리는 벌써부터 아파오기 시작했다. 도보 교토여행은 슬슬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다음부터는 렌트카를 이용하거나 버스, 지하철을 적극 활용해야겠다 싶은 다짐이 들었는데, 동시에 그러면 내가 교토를 오는 이유 중 하나인 동네 뒷골목 구경은 어떻하지? 하는 걱정부터 드는 것이었다. 몸의 한계는 여행의 딜레마를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여행은 젊을 때 미리미리 하는 것인가보다 싶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나와 같은 버스를 타고 다시 시내로 나왔다. 니시키시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하비샾을 만나서 아들은 포켓몬 카드를 구입했고, 나는 지하 프라모델샾에 가서 도색용 보안경을 구입했다. 한국에서 구입하는 것보다 3분의 1 가격이었다.
니시키시장은 지난 여행때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었다. 여전히 관광객들로 북적거렸고, 여전히 많은 먹거리와 구경거리가 즐비했다. 시장이라 하지만 생필품보다는 관광객을 상대로 한 먹거리 가게가 많은 모습은 과거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시장과는 거리가 있는 풍경이었다. 생필품이나 먹거리를 편의점이나 AEON 슈퍼같은 대형 마트와 경쟁해야 하는 입장에서 전통시장은 스스로의 장점을 내세운 변화를 모색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니시키시장이 아닐까.. 니시키시장이나 오사카의 구로몬 시장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내가 사는 제주의 동문시장을 생각하게 된다. 요리가 필요한 원재료 상태의 먹거리 가게가 점점 사라지고 간편히 한자리에서 먹을 수 있는 소소한 먹거리 가게가 많아지고 있는 동문시장의 변화는 어쩔 수 없는 방향성을 안고 겪는 변화이다. 변화의 종착은 아마도 니시키시장이나 구로몬시장과 비슷한 모습일 것이다. 고민은 적당히 하는 것이 좋다. 나는 니시키시장에 가면 꼭 계란말이를 사서 그 자리에서 한 팩을 다 먹는다. 이번에도 그랬다. 계란말이 집이 두 집 정도 있는데 그 중 한 집에서 아무것도 넣지 않은 가장 기본적인 계란말이 한 팩을 산 뒤, 가게 옆 구석에서 아들과 함께 나누어먹었다. 부드럽고 깊고 폭신한 계란말이는 니시키시장에서의 추억이다.
저녁까지의 시간은 어중간했다. 비는 여전해서 어두운 하늘이 조금 더 어두워질 때 즈음에, 아내는 쇼핑을 원했다. 옳거니 하는 마음으로 나는 미처 들르지 못한 헤이안신궁 옆 무덕전을 가 보기로 했다. 아들에게 누구를 따라갈 것인지 선택하게 했더니 나를 따라오겠단다. 나와 아들은 바로 옆 버스정류장에서 헤이안신궁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ROHM theater 앞에서 내렸다. 무덕전의 높은 나무대문은 닫혀 있었고, 담을 돌아서 걸으니 입구가 나왔다. 검은 갈색의 오랜 나무 신전같은 건물에 지붕의 곡선과 무늬는 일본무사의 갑옷을 연상시켰다. 무덕전은 일본검도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고, 그러기에 무덕전을 주변으로 여러 전통스포츠 활동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검도를 하는 입장에서, 교토에 오면 들르지 않을 수 없는 공간이기도 했다. 마치 내가 속한 분야의 역사에 대한 예의랄까 아니면 마음의 숙제같다고 할까.. 무게있게 자리한 공간의 기운은 원류 또는 기원의 위압이 있어 검을 수련하는 마음을 차분하고 지긋하게 누르고 있었다. 비오는 바깥에서만 건물을 들러보다가 열려있는 문 안에서 기합소리가 들리기에 조용히 들어가보니, 다다미 바닥 중간으로 나무마루가 깔려 있고, 거기서 한 사범으로 보이는 분이 외국인에게 검도를 지도하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다다미 위로 올라가 무례함을 무릅쓰고 사진을 찍은 뒤에, 좀 더 구경을 했다. 한쪽에서는 젊은 남자가 마루 위의 호구들을 조용히 정리하고 있었다. 다다미 위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수련모습을 구경하고 싶었으나, 아들은 언제 가냐며 나를 보챘다. 별 수 없이 나와서 버스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때마침 퇴근시간인지 버스는 만원이었고, 우리는 구겨지듯 버스 안에서 버텨냈다.
숙소로 들어가 잠시 다리를 쉬자니 아내가 돌아왔고, 우리는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비는 계속 내렸고 어둠은 완연해졌다. 산조역에서 기온시조역으로 천천히 걸어가 니신소바로 저녁을 해결했다. 그리고 기온거리로 들어서 비오는 개천가를 걷다가 최근 한국 방송에 나왔다는 오꼬노미야끼 집에 들어갔다. 대기인들이 있었는데 70퍼센트가 한국인이었다. 청어를 넣은 소바인 니신소바는 독특했으나 맛과 깊이가 있었지만, 오꼬노미야끼는 분위기는 있었지만 기다리면서까지 맛을 볼 정도는 아니었다. 꺼리를 만들어야 하는 방송의 영악함과 점찍으면 본능처럼 몰려드는 맛집탐닉의 허점을 제대로 느낀 집이었다.
아쉬움이 짙어졌다. 다음날이면 오사카로 이동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쉬우나마 폰토초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비오는 폰토초 골목의 비좁음과 하루종일 내린 비로 불어난 가모강의 엄청난 물소리를 즐기다가, 편의점에 들러 맛보고 싶은 맥주와 먹거리를 종류별로 하나씩 사들고 숙소로 들어와 교토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