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고팠던 이야기를 아무런 거리낌없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자체로 귀하다. 사회적 마스크를 벗고, 나와 업계의 이익이나 암묵적 규율때문에 다른 어디서 쉽게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시선의 공감아래 허물없이 나누는 자리. 그런 자리를 근 몇 년만에 가졌다. 그것도 오랜 시간 자주 만난 사람이 아닌, SNS에서 주로 만나며 성향을 공감하며 가끔 얼굴 정도나 마주친 그런 사람들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나누는 이야기엔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과 생각을 오가며 마주치거나 마주쳤던 순간들에 환호하고 반가워하는 때마다 잔은 쨍하고 부딪혔다. 오래도록 혼자 고민하고 담아두었던 나의 생각과 사상이 그들에게 지지와 위안을 받는다. 그렇게 나의 생각은 그리 틀리지 않았음을 존중받는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뒤돌아 본 나의 시간들이, 나름 괜찮은 경로를 밟아왔음에 안도한다. 그날 그 자리에서도 나온 이야기였다. 제주에서 산다는 건, 생각이라는 기둥 곳곳에 존재하는 자잘한 가지들을 잘 보지 못하는 결함이 있다. 생각은 공유하지만,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사소하고 우연한 대화를 나누며 가지고 있는 생각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 기회를 거의 가지지 못한다. 지적 의지가 되는 인물의 강연이나 그와 주변사람들과의 대화의 기회도 거의 없다. 이 섬도 삶의 최전선이고 반경도 나름 넓어서, 설령 그런 기회가 온다 하더라도 쉽게 자리하지 못한다. 이파리와 가지가 마른 채 기둥만 우두커니 남은 생각은 애써 돌보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고사해버릴 것 같다. 일상의 틈 안에서 책만으로 생각을 가다듬는 일이 이렇다. 다독과 다설이 아닌, 정독과 심고만이 나를 풍성하게 한다는 말도 일리있다. 그러나, 생각을 정리할 만한 대화의 기회없이는 자칫 이상한 길로 홀로 빠져들 수 있다. 요즘 나의 고민이 이랬다. 그런 와중에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는, 대화의 기쁨, 생각의 정리, 쓸데없는 생각의 잔가지들을 쳐낼 수 있는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다.
최근 폐업을 한, 그 자리의 한 친구가 그랬다. 자신은 제주 내려와 2년 반 동안 새벽에 나와 오후까지 열심히 장사를 했는데, 폐업을 하고 이것저것 정리했더니 약간의 빚을 남긴 채 원점으로 와 있더라고 말이다. 얼마전 추석 연휴에 잠시 낚시하러 간 자리에서, 갑자기 뒤로 BMW X5 한 대가 주차를 하더니 20대의 젊은 남자들 셋이 내려서는 어디론가 걸어갔다. 같이 낚시하러 갔던 친구는 그들을 보면서, ‘한참 어려보이는데 어떻게 저렇게 좋은 차를 타고 다닐까?’ 라며 작은 한탄을 날렸다. 사실 나도 최근들어서는 작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노동은 더 이상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갈수록 노동은 적지 않은 불로소득으로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에 제공하는 봉사처럼 느껴진다. 당신이 가진 적지 않은 부와 여유를 내가 당신에게 제공하는 노동의 댓가로 나누어주길 바라는, 다소 굴욕적인 의미가 커지는 느낌이다. 보통의 사람들이 삶의 대부분의 시간동안 열심히 노동을 해도 쉽게 가지지 못할 물질을, 어떤 이는 너무 이른 나이에 비싸거나 좋은 물질을 누리며 사는 모습을 점점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웬만한 노동으로는 이제 보편의 삶을 누리기 힘들다. 또는 보편의 삶을 누릴 시간을 할애받지 못한다. 진료실에서도 어렴풋 느낀다. 하루종일의 노동으로 지친 사람들은 더 많이 아프고, 아픈 만큼 비용을 더 많이 지출한다. 부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남들이 일하는 시간에 진료실로 찾아와 여유로이 진료를 받고 좀 더 건강해지는 무엇을 처방받기를 원한다.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늦은 시간에 잠시 병원에 들를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진료마감에 살짝 짜증을 낸다. 그래서, 야간진료를 시작하고 그것을 담당하는 나에게 고마워하는 환자들을 어렵지 않게 마주한다. 2층 창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허름한 승합차에서 내린 작업복 차림의 중년 무리가 건너편 호텔 공사장으로 걸어가고, 그 옆에 주차한 비싼 외제차에선 중년의 깔끔한 여자 둘이 내려 각각의 애완견을 데리고 1층 동물병원으로 들어간다.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는, 최근 부동산 급상승으로 거품이 두텁게 낀 이 섬 안에서 더욱 도드라지고 어렵지 않게 관찰된다. 동시에, 이는 자본주의의 흐름에 따른 자연적 속성이다. 통제되지 않는 자본은 이 현상을 좀 더 빠르게 앞당겨, 우리의 일반적인 풍경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노동은 점점 가치를 잃어버린다. 숭고따위는 이제, 나에게 편안하게 누워있으면 알아서 커다란 부를 안겨 줄 부동산 한 조각을 거머쥔 몸부림에나 부여되는 단어가 되어간다. 동시에 사람들은 염치를 잃어간다. 여전히 거칠고 힘들게 노동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 고단함에 염치따위 차릴 생각을 못하고, 가만히 앉아 불로소득을 누리는 이들은 생각마저도 여유가 넘쳐 스스로 염치를 저버린다. 세상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전문직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노동으로 그나마의 부를 가질 수 있는 나는 조용히 말을 아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