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할머니는 언제나 곧고 단정하셨다고 한다. 곧고 단정한 자세만큼 바느질과 살림솜씨도 아주 좋으셨다고 한다. 솜씨 좋은 손으로 빈둥거리거나 말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던 할아버지를 극진히 돌보셨다고 한다. 나름 신여성이셨던 할머니가 어째서 별다른 돈벌이도 없이 빈둥거리던 할아버지를 정성껏 돌보는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날 할머니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사람이 바보처럼 보여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던 때가 있었단다.’
흔적은 우연히 다가왔다. 우연한 흔적들은 곳곳에 있었다. 걷는 길에도 만나는 사람들에도, 마치 얼마 되지 않았던 일인 것처럼 말이다. 당장에 내가 입도해서 살던 곳도 그러했다. 4.3의 흔적들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입도해서 내가 살던 건입동 바위언덕은 당시 주정공장이 있던 자리였고, 4.3 당시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붙잡힌 사람들이 그곳에 수용당했다고 했다. 집단학살이 있었다는 증언도 있었고, 수용자들 중에는 임산부도 있어 수용당한 상태에서 아이를 낳기도 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제민일보 4.3 취재반이 펴낸 ‘4.3은 말한다’를 읽고 난 후 바다를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 달라졌다. 집 앞에서 내려다보이던 사라봉 앞바다는 예비검속자들이 이유없이 집단으로 수장당한 해역이었다. 제주에 일할 곳을 알아보려 하늘을 날아 도착했던 제주공항 역시, 당시에 집단학살 후 암매장한 시신들이 여전히 묻혀있는 땅이었다.
배가 아파 입원하여 병실에 누운 할머니의 왼쪽 발목은 부자연스럽게 옆으로 틀어져 있었다. 문제가 있구나 싶어 정형외과에 협진을 하려 했지만, 할머니는 필요없다는 듯 그 자리에서 설명을 시작했다. 4.3 당시 토벌대에 차출되어 죽창을 들고 보초를 서다가 발을 헛디뎠다고 했다. 발목이 너무 아파 치료를 요청했지만 묵살당한 채 보초에서 빠졌는데, 직후 무장대와 충돌이 발생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했다. 할머니의 연세는 70 중반이었다. 그렇게 만난 우연한 흔적들은 이제 서서히 줄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마련된 회식자리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며 나는 내 앞에 마주앉은 토박이 직원에게 넌지시 곧 다가올 4.3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직원은 잘 모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생각해보니 할머니가 가끔 혼잣말처럼 당시의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고 했다. 순간 스치는 그의 표정은, ‘입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 4.3까지 이야기하는 웬 오지랖인가’ 였다. 젊은 사람들에게 4.3은 먼 옛날의 이야기인 듯 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4.3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잘난 오지랖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에게 4.3은 이 섬에 살기 위해 먼저 알아보아야 할 역사였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영역에 속해있지만, 변방의 섬이라는 공간은 많은 것들을 생소하게 만들었고, 함께 흘러온 시간 역시 조금 생소했다. 거친 자연환경 만큼, 이 섬은 역사적 정치적으로도 거칠게 다루어졌다. 어느 역사나 마찬가지이듯, 거칠게 다루며 제일 먼저 희생된 대상은 인민들이었다. 당시 인구의 10분의 일 수준이던 3만이 별다른 이유없이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상처역시 생소해서, 나는 거친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것 만큼 이 섬의 시간과 상처에도 공감하고 적응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나는 상처의 기억을 이야기하면서도 공존하는 어떤 부조화 또는 아이러니를 느낀다. 언젠가 북촌 4.3 너븐숭이 박물관을 방문하여 돌아보고 나올 때, 공휴일임에도 정장을 하고 사무실에 있던 50대로 보이는 남자는 갑자기 현관까지 뛰어나와 우리에게 안녕히 가시라며 공손하게 90도로 인사를 했었다.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몰려오는 순간이었다. 4.3이 공적 영역으로 편입되며 박제화 되어간다는 기분이랄까? 또는 4.3은 본질이 아닌 수단이 되어간다는 기분이었을까?
한 낮의 출근길 평화로 중간즈음에 내걸린 4.3 70주년 기념 현수막에 쓰인 문구는 이런 기분에 확신을 더하게 만들었다. ‘4.3 70주년, 제주방문의 해’. 이 문구에는 어울리지 않는 두 주제의 이질감만 가득하다. ‘4.3 70주년인데 어째서 제주방문을 해야하는가?’라는 의문문으로 바꾸어놓고 고민을 시작했다. 혹시 4.3 유적들을 소개하고 돌아보는 다크 투어리즘이라도 준비해놓은 걸까라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알아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4.3은 그저, 관광객 유치에만 혈안이 된 도정의 수단이었다. 대체 도정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길래 이런 슬로건을 내세운 건가 허탈하다가도, 여기에 별다른 문제제기도 없는 이 섬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나 역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4.3은 이미 산 자들의 수단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더 강렬해졌기 때문이다. 거친 역사의 희생양은 언제나 인민이었지만, 역사의 상흔을 훼손하는 것도 역시 인민들이었다. 죽은 자에의 기억은 산 자들에 의해 다루어지듯, 산 자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망각하게 하는 어떤 의도에 의해 휘둘리고 있었다. 이 섬에서 태어난 천재라는 소리를 듣던 이가 어느날 정치에 뛰어들더니, 4.3을 부정하는 정치집단에 들어가 잠룡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존재감을 키웠다. 그리고, 섬에 내려와 압도적인 지지로 도지사가 되었고, 그는 이제 4.3을 평화와 상생이라는 말로 포장을 한다. 그에 대한 지지는 이 섬의 인민들에게서 비롯되었다.
나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입도한 지 10년이 채 안되는 육짓것이 선주민 또는 도민들의 삶과 사회에 대해 무어라 이야기하는 것이 잘난 오지랖일 수 있기 때문이다. 4.3을 이야기하는 것이, 뒤늦게 이 섬에 들어와 사는 이의 쓸데없이 진지하기만 한 관심병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섬의 여기저기에서 보여지고 느껴지는 흔적들이 너무 많다. 정방이나 천지연 폭포같은 유명한 관광지들은 당시의 총살터였고, 곳곳에 산재한 굴이라는 명칭이 붙은 지형들에는 당시의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을지 예민해진다. 해마다 4월 초면 몰려있는 집집마다의 제사에는 어떤 이야기와 사연이 담겨있는지 궁금하다. 진료실에서 장터에서 한적한 중산간의 마을에서 만나는 주름 가득한 할망들의 삶에는 당시의 어떤 모습이 각인되어 있을까 물어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점점 사라지고 희미해지는 흔적들에 살짝 조급함을 가져본다. 70주년의 4.3에 꼭 제주방문을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 섬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던 도지사와 도정에 물어보고 싶다. 4.3은 그렇게 수단이 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하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어째서 우리는 수단이 되어버린 4.3에 어떠한 문제제기도 하지 않는 것이냐고.. 수많은 고민과 질문 안에 부조화가 공존한다. 그래서일 것이다. 내 고민은 여전히 잘난 오지랖이고 쓸데없이 진지하기만 한 관심병인 것이다.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