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응급실에서 마주한 날은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다음날이었다. 그는 참사가 벌어진 세월호에 타고 있었다고 했다. 기울어지는 배 안에서 미끄러지며 떨어지는 학생 하나를 몸으로 받아내다가 난간에 등을 부딪혔다고 했다. 다행히 구조된 후 연고지가 제주여서 하루가 지나 제주에 도착했고, 등의 통증을 포함해서 안정과 치료를 위해 다른 세 명의 구조자들과 함께 우리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했다. 검사결과, 그는 단일 갈비뼈의 골절이었다. 보통의 경우 복대 등의 보조적 요법으로 집에서 쉬도록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는 그를 우선적으로 입원부터 시켰다. 전국의 모든 방송 카메라들이 기울어진 채 가라앉은 세월호를 향하고 있었고, 나 역시 에어포켓이라는 실오라기같은 희망으로 생존자들이 어서 구조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회진때마다 그는 텔레비전의 세월호 관련 특보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통증은 어떠냐.’는 아침저녁의 똑같은 질문에 그는 소박하면서도 알 수 없는 표정이 섞인 웃음으로 대답했다. 사실 그의 갈비뼈 골절은 그리 신경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기다리면 나아지기 때문이었다. 걱정되는 것은 그의 방에 항상 울리고 있는 세월호 특보 방송소리와, 그의 알 수 없는 표정이 섞인 웃음이었다. 분명 그는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입고 있었다. 때때로 ‘잠이 잘 안 온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가끔 놀라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이야기했다. 정부에서도 그것을 고려했는지 생존자들이 입원한 병원들에 공문을 보냈다. 정신적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 정신과 진료를 받도록 하라는 공문이었다. 그도 협진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정신과를 방문해서 면담을 하고 약을 처방받아왔다. 그렇게 그의 상태가 나아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알량한 약 몇 개로 그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입원한 생존자들에 대한 정부의 공문은 더 이상 없었다. 마치 그것이면 할 일은 했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 달이 되도록 그는 퇴원하지 않았다. 골절증상은 호전되고 있었다. 병원 입장에서도 단순한 갈비뼈 골절만으로 그렇게 오랜 입원은 부담이었다. 너무 병실에만 누워있는 것도 걱정이 되어 나는 회진때 조심스레 권유하기도 했다. ‘퇴원하여 바깥환경에 적응해서 움직여보는 것도 치료의 한 방법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좀 더 있겠다고 했다. 그의 표정과 방 안을 울리는 세월호 방송소리는 여전했고, 조금 변한 것이 있다면 증상의 호전과 개인적인 일처리를 위한 가끔씩의 외출이었다.
어느날 출근하자마자 병동 수간호사가 나를 찾아왔다. 수간호사는 심각한 얼굴로 어제밤에 있었던 일을 세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외출을 나갔던 그가 밤늦게 술에 취한 채 돌아와 병동의 야간근무 간호사에게 자신의 수면제가 들어있는 약병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그냥 이거 다 먹고 죽어버릴까 싶어요. 난 딸린 가족도 없이 혼자니까 고민할 것도 없구요. 홀가분해요. 내가 죽으면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어제밤 야간근무 간호사들은 초긴장 상태였다고 했다. 나 역시 상황이 조금 심각해졌음을 감지했다. 자살을 암시하는 우울증이 분명했고, 정신과에 연락해서 추가협진을 요청했으며, 주치의인 나도 환자를 진료실로 불러 면담을 했다. 외래 간호사를 내보내고 좁은 진료실 공간에서 단 둘이 마주하자 그는 어제의 일에 죄송해하며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화물차 소유의 자가운전자였다. 1억 4천만원의 화물트럭을 5년 만기로 구입해서 이제 겨우 석 달의 할부금을 납부했다고 했다. 그는 지입형태의 1인 사장이었다. 그렇지만 어딘가에 소속되어야 하니 회사에 ‘넘버값’을 지불하며 아무런 안전장치나 보호장치 없이 운송사업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는 화물차를 세월호에 승선시킨 채 제주에 오다가 새 것이나 다름없는 화물차를 바다에 수장시켰다. ‘넘버값’을 지불하지만 그는 회사의 직원이 아니어서 회사는 화물차에 대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배에 실은 화물차는 차가 아닌 ‘선적된 화물’로 취급되기 때문에 세월호를 운영하는 청해진 해운에서 책임과 보상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어처구니 없게도, 청해진 해운은 화물관련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고, 사고직후 파산 신청 중에 있기에 보상여부가 매우 불투명한 상태에 있었다. 그는 생계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화물차 하나에 쏟아부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유일한 생계수단을 바다에 수장시킨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대책없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의 이야기로는 지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사는 시에서 중소기업 자금지원 형태의 저금리 대출을 제공해 주겠다는 제안이 있었다고 했다. 정부의 대책도 있었다. 생활 안정자금이라고 해서 당사자에게 80만원과 직계가족 1인당 40만원의 지원금을 3개월간 지급하겠다고 했단다. 그러나 이 금액은 희생자들 가족에 해당되는 금액이었고, 생존자들은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감안’하여 50%만 지급하겠다고 했단다. 듣는 입장에서도 당황스럽기만 한 이야기였다. 생계수단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사람에게 다시 빚을 지라는 제안이나, 최저생계수단이나 될까 싶은 액수마저도 ‘일할 능력’ 운운하며 반만 지급하겠다는 정부의 지원정책은 상식적으로 자괴감만 들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병원에 조금이라도 더 입원해서 자신이 가입한 사보험에서 입원일수에 비례하는 지급금이라도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던 그가 제게 한숨을 더해 말했다.
‘그렇다고 제가 언제까지 병원에서 버티겠습니까.. 나가야죠.. 나가서 일해야죠. 그런데 생계가 너무 막막해서 나가서 뭘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화물트럭을 다시 몰게 된다 하더라도 트라우마가 생겨서 제가 배를 탈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 타보고 타지면 괜찮겠지만.. 만일 도저히 탈 수가 없다면.. 그 땐.. 그 땐 다른 일을 알아봐야겠죠. 그래서 더 막연해요. 상황이 이러니, 아직까지는 불투명하지만 나라에서나 청해진 해운에서나 나올지 모르는 보상에 더욱 신경이 곤두서고 있습니다.’
그는 한동안 더 병원에 머물렀다. 골절은 증상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안정되었다. 그가 자살하고 싶다는 표현을 동반한 우울증상을 보였지만, 나는 그게 꼭 입원한 상태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상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퇴원을 종용하지 않았다. 병원에 조금이라도 더 입원하는 것이 그에게는 유일한 생존의 수단이자 위안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그는 조용히 퇴원의사를 밝히고 퇴원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원과가 바뀐 채로 병동 복도에서 가끔씩 마주쳤다. 눈인사를 나누었을 뿐, 그의 거취나 증상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았다. 그가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어서였다.
300명이 넘는 안타까운 목숨이 충분한 구조의 시간을 두고도 그대로 수장당하는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보아야만 했던, 처참한 심경의 시간이었다. 구조의 골든타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지나갔고, 사람들은 ‘이게 나라냐?’ 한탄하며 애끊는 고통의 트라우마를 마음 깊은 곳에 새겼다. 구조에 전력을 다해야만 하는 공권력은 민간업체와 얽힌 채 알 수 없는 이유로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의 정부는 서로의 책임을 회피하며 청해진해운과 세모그룹 일가를 붙잡고 닥달하는 데에만 혈안이었다.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은 그대로 국민의 허탈과 우울이 되었다. 최고통수권자가 연기한 닭똥인지 눈물인지 모를 상판을 흐르는 그 무엇에 우리는 분노를 더했다. 4월의 바닷물에 차갑게 굳어버린 시신으로 건져지는 희생자들을 보면서, 우리는 살아있음에의 비루함을 느껴야만 했다. 생존자들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위로도 생계의 대책도 없이 방치되어야만 했다.
그로부터 4년의 시간이 흘렀다. 인간은 어떻게 인간일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할 정도로 세상의 민낯을 직시해야 했던 시간이었다. 정치와 사회시스템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인간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세월호 침몰의 근본적인 환경을 만든 이와 구조하지 않고 외면하던 이는 현재 구치소 안에서 단죄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세월호는 아직 진행 중이다. 나의 삶은 세월호로 인해 방향을 수정한 채 흐르고 있다. 4년 전에 만났던 그의 삶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세상이 변했다는 지금이지만, 그의 삶 역시 바뀌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뀐 세상에서도 세월호로 수정한 내 삶에 다시 변화가 없듯, 그 역시 변곡점을 만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라고 조심스레 가늠해 본다. 세월호는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설령 어떤 형태로 정리되고 수습된다 한들, 마음 속의 트라우마와 비루함까지 수습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월호 이후로 우리가 운명처럼 안아야 할, 현실의 암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