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진 시간이 되어 외래 진료실에서 나가던 참이었다. 로비 엘리베이터로 향하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러 세웠다.
“선생님, 이거 받아가셔요. 이거 드리려고 진료 끝나기를 기다렸는데 그냥 가시면 서운해요.”
노란 조끼를 입은 할머니 한 분이 웃음을 띤 얼굴로 나에게 휴대용 화장지 하나를 건넸다. 엉겁결에 “아, 네. 감사합니다.” 하고 받았는데, 화장지 포장 겉 면에는 성경구절 하나와 함께 어느 교회 사진을 배경으로 한 교회 이름이 크고 두텁게 인쇄되어 있었다. 뒤돌아서는 할머니를 다시 바라보니, 노란 조끼 뒷면에 같은 이름의 교회명이 어깨선을 따라 적혀 있었다. 로비에서 병동에서 종종 보이는 분들이었다. 그분들은 노란 조끼를 입고 휴대용 화장지가 가득 든 커다란 비닐 꾸러미를 들고 로비를 병동을 다니곤 했었다. 지나는 사람들이나 환자들에게 꾸러미 안의 화장지를 건네며 전도활동을 했는데, 외래의 나한테 그것을 주는 일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삶의 질이라는 걸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의국과 병동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전공의 시절, 주말에는 유난히 병문안이 많았다. 입원한 환자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삼삼오오 방문하기도 했지만, 눈에 띄는 것은 일요일 오후에 예배를 마친 교인들의 방문이었다. 무리 지어 병실로 들어선 그들은 침대의 환자와 잠깐 눈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목사님을 중심으로 간략한 예배를 드렸다. 그것이 때로는 같은 병실의 다른 환자들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고, 평일의 회진과 겹치는 때엔 조금은 삐딱했던 의국 동료의 비아냥이 날아가기도 했었다.
종교는 위안이다. 병실의 침대 하나를 어쩔 수 없이 차지하고, 주치의의 퇴원 결정만 기다리며 집에 가고 싶어 하는 아픈 이들에게 종교는 커다란 기댈 곳이었다. 아프고 소외된 자들을 위로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쉬게 하는 것이 종교다. 할머니가 건넨 화장지 포장의 교회 사진과 이름을 유독 오래 들여다 보았던 것 같다. 생각이 좀 많아졌다. 로비에서 병동에서, 이것을 받아 든 환자들이나 보호자들은 위로를 받고 있을까. 그들은 이 작은 성경구절로, 혹시 필요했을 위안을 찾아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까. 아, 그런데, 나는 자꾸만 마음이 불편해졌다. 종교의 위안과 교회가 쉽게 포개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전도하는 할머니를 뒤로 한 채 포장지를 들여다보는 내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엘리베이터 승강장 앞에 선 나는 점점 무표정해지고 있었다.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 장인어른이 장로로 재직 중이시던 교회로 인사차 예배에 참석했었다. 교우 동정 시간에 목사님은 나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신도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좌중 한가운데에서 혼자 일어 서 있으려니 마음이 들들 거리며 불편했다. 그 자세에서 우연히 옆 시선으로 마주친 어느 신도는 창백하고 허름한 옷차림에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부러움도 비웃음도 아니었다. 그의 시선엔 ‘너는 그저 나와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담겨 있었다. 그 옆의 휠체어에 앉은 핏기 없는 중년의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불편함은 내가 한 공간에 같이 존재함으로 그들이 받아야 할 위안에 상처를 내고 있다는 불안으로 바뀌고 있었다. 목사님의 질문도 들리지 않았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어서 빨리 앉아 수많은 무리들의 하나로 예배 끝까지 조용히 있고 싶었다.
2009년 용산참사 이후로 진상규명을 위해 일 년여를 애쓰시던 한 목사님은 집회 한자리에서 ‘지금 우리 세상의 교회에 구원이 있는가?’라며 질문을 던졌었다. 4대 강의 파괴를 문화교류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축복하던 어느 대형교회 목사님이 떠올랐다. 세월호 유가족들을 이끌고 제주에 내려오셨던 어느 목사님은 식사자리에서 나에게 ‘굳이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고 말씀하셨다. 판자촌으로 뒤덮였던 봉천동 고개의 한가운데와 난곡 초입의,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높다란 교회 건물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 고향의 작은 교회에서 각각 장로와 권사로 재직하시며 신앙의 깊이를 만들어나가시는 내 부모님이 떠올랐다. 3대가 교회에 봉사하며, 이제 막 장로 임직을 내려놓으신 장인어른의 모습도 떠올랐다. 지방의 작은 교회와 사회사업을 병행하며 고군분투하는 목사님이신 외삼촌도 생각났다. 그리고, 멀리 동남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어렵고 힘들게 교회를 이끌며 선교사로 활동 중인 처남도 생각났다. 그 사이에서 나는 말없이, 받아 든 화장지를 가운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병동으로 오르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있었다.
교회활동에 열심인 때가 있었다. 학생 시절을 거쳐 사회로 나오던 그 시절에, 종교 안에서 나의 버거움과 혼란의 원인을 찾고자 했었다. 그리고 위로받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갈구가 부족했던 탓이었는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이후로 나는 교회라는 공간 안의 화기애애함과 사람들의 미소가 불편해졌다. 나의 생각을 지지해 줄 교회를 만나지 못해서라는 조언을 듣기도 했지만, 그것은 쉽게 극복되지 않았다. 고등부를 졸업하면 대학에 진학한 대학부와 바로 사회에 진출한 청년부로 나뉘어 서로 서먹해지듯, 교회는 어떤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꾸리는 그런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나의 서먹함은 그 공간과 거리를 두고자 하는 의지에서 기인했다. 뒤이어, 나는 묻고 있었다. 내가 서먹해하는 그 공간은 교회인가 종교인가.
병동에 들어서 회진을 돌면서 보니 환자 침대마다 내 가운 주머니 안의 것과 같은 휴대용 화장지들이 놓여 있었다. 화장지 포장 위에 적힌 교회가 나의 환자들에게 위로와 위안을 주는지 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다만, 교회 이름이 적힌 화장지는 적어도 소소한 편리와 다행감 정도는 환자들에게 줄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무심하게 버려질 수는 있어도 불편을 해소해주는 소소한 도움이 될 정도의 의미라면, 사실 노란 조끼를 입고 전도활동을 하던 사람들의 성에는 차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소품을 건네주시던 할머니의 마음은 ‘예수믿고 구원받고 천국가자’는 순수한 믿음의 발로였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마음과 의지에 어떤 말을 덧붙이고 싶지는 않다. 그저, 여전히 서먹하며 작은 혼란 안에 머무는 나의 종교적 신심이 쉽지 않은 것이다. 종교와 교회는 넘쳐나도, 여전히 위로와 위안이 필요한 사람 역시 넘쳐나는 세상이 의아한 것이다. 휴지가 필요한 순간, 주머니 안의 화장지를 뽑으며 종교와 교회, 그리고 믿음과 위안에 대해 소소한 고민을 이어볼 수 있을까 하는 작은 생각이 들었던, 간략한 회진의 마무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