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인 기리시탄
임진왜란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급작스레 막을 내린다. 이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수는 적게는 2-3만, 많게는 10만 명 정도로 본다. 이들을 피로인(被虜人)이라고 하는데, 전후에 약 7500 명 정도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남은 피로인들 중 일부는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고,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자들은 나름의 대우를 받으며 일본에서 도자기 문화를 열였다. 이들 피로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졌고, 조선인 기리시탄은 이렇게 생겨났다.
여행 이튿날 찾아갔던 고라이교(고려교) 부근이 나가사키 내 조선인 마을이 있던 자리였으며, 조선인 기리시탄들은 금교기에 나가사키를 비롯하여 일본 곳곳에서 순교를 당했다. 이 내용은 1874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달레(Ch. Dallet) 신부가 프랑스어로 간행한 조선천주교사(Historie de l’Eglise de Coree)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니시자카 언덕의 26성인 기념관에도 금교기 시기에 파악된 순교한 조선인 기리시탄의 목록이 기록으로 전시되어 있다.
2. 후미에
26성인 기념관 안에는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원작으로 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사일런스’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후미에가 전시되어 있다. 영화를 촬영할 때 사용했던 대본도 같이 전시되어 있다.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후미에는 상당히 비중있는 오브제로 등장한다. 그것을 통해 순교와 배교가 결정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가쿠레 기리시탄들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여정에 후미에는 그리 의미있는 사물로 다가오지 않았다. 작품의 내용과 배경을 생각하면 후미에는 곳곳에서 언급되거나 성물과 비슷한 비중으로 보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후미에를 본 장소는 26성인 기념관과 엔도 슈사쿠 문학관 두 곳 뿐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문득 느끼게 된 그 차이가 처음에는 생소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후미에는 기층민들 중 숨어있는 기리시탄들을 색출하기 위해 관료들이 소유하고 사용한 물건이었다. 성인의 발 하나가 다 올려질 크기의 동판을 숨은 기리시탄들이 소유하는 일은 위험했을 뿐더러, 시험을 위한 사물로 기리시탄들에겐 피하고 싶은 물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가쿠레 기리시탄의 흔적에 후미에는 당연 보일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작품에서의 의미와 실제에서의 의미는 이렇게 커다란 차이를 만들고 있었다.
3. 후쿠오카
이삿짐과도 같은 커다란 슈트케이스 두 개와 가방을 메고 오전의 뙤약볕 아래를 열심히 걸어 나가사키 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후쿠오카 하카타역에 도착했다. 하카타역은 오사카역 만큼이나 크고 복잡한 곳이었다. 경적소리를 한번도 들을 수 없었던 나가사키와 비교하면, 하카타역 앞에서는 경적소리가 수시로 들렸다. 짜증과 주의의 경적이었다. 세계 수영선수권 대회가 열리고 있는 시기라 운동복 차림의 어깨넓은 외국인들과 네임카드를 목에 건 관계자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높은 빌딩 사이를 다시 이삿짐같은 슈트케이스를 밀고 열심히 숙소를 향해 걸었지만, 그늘은 쉽지 않았고 대도시의 열기는 사람을 금방 지치게 만들었다.
교토여행에서의 오사카처럼, 후쿠오카는 단순히 쇼핑을 위해 잠시 머무는 곳이었다. 나가사키도 더웠지만, 후쿠오카는 도심의 열기가 더해서 더욱 더워서 어딜 돌아다닐 수 없었다. 그래도 목적했던 곳은 가야지 싶어서, 버스타고 라라포트에 가서 그 유명한 건담을 직접 보고 맨 윗층 건담베이스에 가서 이것저것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 다음 캐스팅후쿠오카라는 피싱샾에 가서 농어 미노우와 에기 몇 개를 구입하고는 숙소로 돌아왔다. 그 다음부터는 나는 아무 계획이 없었다. 2박 3일 중 절반은 원했던 쇼핑을 할 줄 알았는데, 후쿠오카에 도착한 반나절만에 계획했던 일들을 모두 마무리해 버린 것이었다.
사실 더 사고 싶은 것이 없을 리가 없었다. 낚시용품과 건프라 관련 물품은 작정하자면 무한으로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진 돈만 허락한다면 말이다. 샾을 찾지 못해서 그랬지만, 검도용품도 둘러보고 싶었다. 낚시용품, 건프라, 검도용품.. 전부 일본이 대세인 품목들 아니겠는가. 하지만, 쇼핑을 작정하고 온 아내의 쇼핑리스트를 보면 차라리 내가 포기하고 맘껏 쇼핑하도록 양보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마음을 내려놓는다. 슈트케이스는 벌써부터 가득 차기 시작했는데, 내가 거기에 무얼 어떻게 얹을까 싶어지는 것이었다.
후쿠오카에 있는 내내, 더우니 밖을 돌아다닐 엄두는 내지 못하고 캐널시티와 하카타역 주변의 쇼핑몰만 계속해서 돌아다녔다. 물건이 넘치도록 쌓여있는 광경은 신기하기도 했지만, 사람을 쉬이 지치게도 만들었다. 너무 많아서 질리고, 질려서 뭘 사야할 지 판단이 서지 않는 딜레마가 생긴다. 종일 물건을 구경하고, 아내의 쇼핑을 거들다 포켓몬 앱을 열고 게임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아침 일찍 찾아간 덴진중앙공원 앞의 어크로스 후쿠오카라는 건물은 특이했다. 공원을 바라보는 건물의 경사면이 전부 숲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르헨티나 출신 건축가 에밀리오 암바즈가 설계했고 2005년 3월 준공했다고 한다. 숲으로 구성된 경사면에는 건물 꼭대기까지 산책로가 형성되어 있는데, 아들녀석과 같이 올라갔다가 너무 더워서 더위만 먹고 내려왔다. 더위먹은 채로 건물 내로 들어가 쉬다가 1층에서 발견한 ‘줄리엣의 레터’라는 문구점에서는 모던한 디자인의 돋보기와 필기구, 공책 등을 구입했다. 문득, 다음 일본 여행은 문구 쇼핑을 목적으로 다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하다는 모쯔나베집은 예약없이는 들어갈 수 없었다. 돈부리나 라멘, 텐동 정도가 후쿠오카를 다니며 먹은 음식들이다. 그것도 그냥 쇼핑몰 식당가에서 해결했다. 이상하게 짜고, 왠지 느끼하고, 뭔가 핀트가 맞지 않아 맛을 즐길 수가 없었다. 가장 비싸게 먹은 모쯔나베는 너무 느끼하고 심심해서 그냥 입 안에 우겨넣고 나왔다고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속이 좋지 않았다. 교토나 오사카에서 먹던 음식들은 대부분 입에 맞아서 일본음식을 좋아하게 된 계기였는데, 나가사키와 후쿠오카에서의 음식들은 내가 정말 일본음식을 좋아했었나 다시 생각할 정도로 입에 맞지 않았다. 속 마저 좋지 않았는데 편의점 간식과 라멘들이 되려 속을 다스려 줄 정도였다. 후쿠오카를 떠나는 마지막날 아침에는 편의점 오니기리가 너무 먹고 싶어 세 개를 사서 입에 물었다가 귀국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 속이 좋지 않아 고생을 좀 했다. 여행에 먹거리는 이래서 정말 중요한가보다 싶은 경험이었다.
4. 도 로 사마 면.
소토메에서 구입한 도 로 사마 소면으로 고추장 양념에 야채를 버무려넣고 비빔국수를 해 먹었다. 면이 가늘지만 부드러움이 충분히 느껴졌고, 땅콩기름이 들어가서인지 살짝 고소했다. 일본에서 음식으로 조금 고생했는데 한국와서 일본 면에 만족을 느끼고 있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싶었다. 요도바시 카메라 빌딩 안 마트에서 사 온 일본카레를 밥에 비벼 먹으며 다시 일본이 생각났고, 일본 편의점에서 사 온 메밀소바 면이 유독 맛있었다. 참 나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한국에서도 100여년의 천주교 박해 시기가 있었고, 그에 관련한 유적들을 찾아다니는 여행도 나름 재밌을 것인데, 나는 왜 나가사키에 가서 그것도 나가사키 주변의 벽촌을 돌아다니며 박해시기의 흔적들을 찾아다니고 있었을까? 핑계를 대자면 대항해시대 이후 동서양의 문화가 뒤섞이는 해안가에 흥미가 있었다 말하겠고, 인간은 좀 더 진한 드라마를 원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 말 할 것이다. 그 드라마에 대한 호기심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히라도의 아쉬움, 나가사키 시내 유적의 기억, 데지마의 매력, 그리고 아직 가 보지 못한 운젠, 시마바라, 고토열도.. 내 호기심이 만족할 드라마의 완성을 위해 다시 일본으로 갈 것이다. 발이 자유롭지 않은 자영업자라는 현실이 더욱 슬퍼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