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편의점에서 산 오니기리와 라멘으로 아침을 먹었다. 일본 편의점 먹거리들은 내 기준으로는 꽤 괜찮다고 생각한다. 특히 오니기리는 무얼 집어들어도 맛이 있다. 쌀이 맛있어서 그런듯 싶다. 이전에 고베에서 쇠고기를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숯불에 구운 쇠고기보다 그릇에 담겨 나온 밥이 더 맛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먹고 여정을 서둘렀다. 이날은 히라도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호텔 주차장에 세워 둔 차를 끌고 이른 오전에 여정을 시작했다.
제주에 살다 보니 거리감각이 떨어진다. 한정된 생활권에 있다보니 그런 듯 한데, 결론적으로 히라도까지 소요되는 시간을 너무 얕잡아 보았다. 게다가 여정을 무료도로로 설정한 결과, 두 시간 조금 안되게 예상한 여정은 세 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시골 한적한 길을 따라 천천히 달리는 일은 참 좋았지만, 목적했던 여정을 소화하는 데에는 상당한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사세보 시내 한복판을 통과하는데 시간과 일정이 신경쓰여서, 그 유명하다는 햄버거를 먹어보지도 못하고 지나쳐야 하는 기분이란..
히라도는 16세기 일본 최초로 유럽 상선들이 드나들던 국제항이었다. 시작은 1550년의 포르투갈 상선이었다. 포르투갈 출신의 자비에르 신부가 이보다 일 년 먼저 가고시마로 입항하였다가 히라도로 이동한다. 그러나 선교활동은 토착종교의 반발로 인하여 제동이 걸리고, 이로 인해 포르투갈 상인세력과 자비에르 신부는 요코세우라로 거점을 이동한다. 이후로 히라도에는 네덜란드 상인세력들이 들어와 활동을 하게 되는데, 금교령 시기에 축조한 창고 전면에 서력기원 연호를 표기했다는 빌미로 창고를 파괴당한다. 이후로 유럽의 상인세력들은 나가사키의 데지마에 모이게 된다.
히라도에도 잠복 기리시탄들이 자신만의 신앙들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섬이면서 나가사키와 거리가 있는 이유로, 소토메의 잠복기리시탄들이 박해를 피해 히라도로 이동하기도 했다. 동시에 이런 특성으로, 신도발견 사건 이후 천주교로 돌아가지 않은 히라도의 가쿠레기리시탄들의 모습은 소토메 지역과도 다른 모습을 보인다. 소토메 지역의 기리시탄들은 ‘7대가 지나면 신부가 흑선을 타고 돌아온다’는 바스창 전도사의 예언을 굳게 믿고 있었던 반면, 히라도의 기리시탄들은 금교기에 토착화가 강하게 진행되면서 조상숭배의 성격을 띄게 된다.
히라도 지역의 가쿠레 기리시탄들은 거의 소멸되었다. 그들의 예식형태는 금교기에 불교와의 관계 속에서 뒤섞이며 불교예식과 별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가쿠레 기리시탄 집안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집안이 불교집안인 줄로 알고 있으며, 사실은 가쿠레 기리시탄 집안이었음을 한참 뒤에야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히라도의 가쿠레 기리시탄들의 특징 중 하나는 ‘오후쿠로사마’라는 것이 있다. 16개의 납작한 나무조각에 예수와 마리아의 생애 주요장면들이 새겨져 있는 것인데, 이들은 이것으로 운세를 점친다고 한다.
히라도와 이키쓰키섬 사이에는 나카에노시마라는 무인도가 있다. 금교기 초기 기리시탄들은 이 섬으로 끌려와 처형을 당한 곳이라서 기리시탄들에게는 성도로 불린다. 이 섬에는 석간수가 나오는데, 기리시탄들은 이 석간수를 성수로 사용한다. 배를 타고 들어오면서도 오라쇼를 낭송하고 석간수를 병에 채우면서도 오라쇼를 암송한다. 그런데, 이 성수를 활용하는 방식이 소토메 지역과 다르다. 소토메 지역에서는 성수를 세례를 줄 때에만 사용한다. 히라도에서는 세레는 물론 집안에 악령의 침입을 방지할 때, 그리고 새로 건조한 배에 혼을 불어넣을 때에도 성수를 사용한다.
히라도에 도착한 시간이 정확히 정오였다. 날은 무더웠고, 점심부터 해결해야 했다. 히라도항 주변의 식당들은 거의 다 문을 닫은 상태였다.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뙤약볕 아래를 걸어 문 연 작은 식당을 하나 발견하여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우동은 우리나라 고속도로 우동맛이었고, 짬뽕은 여기에도 있었는데 역시 자작하고 짠 국물이었다. 이후로 시간을 보니, 렌터카 반납시간을 생각하면 세 시간 안에 계획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불가능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루 숙박을 히라도에서 하는 건데, 역시 내 불찰이었다. 결국 네덜란드 상관, 자비에르 기념교회, 히라도성, 호키교회와 히모사시교회, 그리고 히라도 밖 다비라 지역의 다비라교회를 잠깐씩 찍고 오듯 감상할 수 밖에 없었다. 목적은 히라도 내의 기리시탄 유적과 흔적들을 둘러보고 오는 일이었지만, 시간상 그럴 수 없었다.
네덜란드 상관은 복원된 건물이었고, 파괴의 원인이 된 서력기원 연호를 상관 내 전시관에서 볼 수 있었다. 금교령 해제 이후 고토 출신의 목수 데쓰카와 요스케는 히모사시 교회와 다비라 교회를 축조한다. 이 목수의 건축은 웅장함이 특징인데, 히모사시는 철근콘크리트, 다비라는 벽돌로 지었다고 한다. 호키교회는 좁은 언덕으로 올라가면 나오는 아담한 교회였는데, 붉은 벽돌조의 교회로 목조에서 벽돌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교회라고 한다.
히라도 일정은 실패라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정말 보고 싶었던 기리시탄 자료들은 하나도 보지 못하고, 금교령 해제 이후의 교회만 발자국 찍듯 잠깐씩 보고 왔으니 말이다. 어쩔 수 없이, 히라도는 다시 한 번 오는 것으로 마음먹었다. 운젠, 시마바라,고토 등등.. 큐슈지역의 기리시탄 흔적들을 찾아다닌다는 여행 목록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돌아오는 길은 유료도로를 이용했다. 일본의 유료도로는 그야말로 도로에 돈을 뿌리고 다니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두 시간 남짓 걸려 나가사키 시내에 들어오니 퇴근 시간인지 차로 북적였고, 기름을 채워서 돌려줘야 하니 일본에서 처음으로 주유하는 경험도 겪었다. 주유구 여는 레버가 어디 있는지 몰라 직원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말이다.
차를 반납하고 숙소에 들어가 씻고 시내로 다시 나와 저녁을 먹었다. 시내 중심가 아케이드 내의 백 년 이상 되었다는 스시집이었다. 피곤해서 기대는 없었지만, 너무 무난한 맛이라 조금 놀라웠다. 고등어스시는 너무 크고 살짝 비려서, 제주에서 먹던 고등어스시가 그리워졌다. 나가사키의 마지막 밤이었다. 옆골목인 신치 차이나타운에서는 작은 마쯔리같은 행렬이 지나갔고, 밤이 되어도 더운 이 도시의 공기는 아쉬운 여운을 남겼다. 숙소에 가서 남겨둔 아사히 생맥주캔을 마시고 싶었다. 쇼쿠사이라는 일본쌀이 첨가된 생맥주캔 버전도 한 캔이 남아있었다. 나가사키의 여정은 무더위라는 복병에 힘들었지만, 목적을 둔 여정은 나를 호기심 안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게 하였다. 동시에, 일본 음식을 좋아하던 나는 이번 여정에서 만난 음식들에 약간의 실망을 안게 되었다. 이상하게 짜고 어딘가 어긋나는 맛들.. 교토에서 먹던 음식들과는 스타일이 달라서 그랬던 걸까? 편의점의 오니기리가 조금 간절해지고 있었다.
첨언 하나, 히라도에 가면 반드시 카스도즈라는 카스테라 비슷한 빵을 먹어보길 권한다. 신부들에게 배운 색다른 형식으로 만든 빵인데, 그 부드러움과 풍부함이 남다르다. 나가사키 카스테라가 단순히 설탕이 들어오면서 만들어진 빵이라고 한다면, 카스도즈는 그 단순함을 깊이있게 응용한 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히라도에서만 판매한다. 나가사키나 후쿠오카에 가면 있겠지 하고 한 세트만 사 왔다가 크게 후회했다.
-참조자료 : 숨은 그리스도인의 침묵, 강귀일 지음, 동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