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기행(21)-기린봉/에필로그

by 전영웅

기린봉 등산로 입구에 차를 세웠다. 그 곳은 이미 내가 알던 그 곳이 아니었다. 비포장에 온통 산등성이던 곳은 아스팔트가 깔리고 연립주택이 빼곡한 동네가 되어 있었다. 산쪽으로 축대를 쌓은 담벼락을 따라 걷다가 돌계단 몇 개 위로 산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멈추었다. 이 자리가, 어릴적 기억하는 산길이 시작되던 자리인가 싶었다. 짐작일 뿐이었다. 전주는 이제 네비게이션 없이는 다닐 수 없는 도시가 되어 있었다. 알 것 같은 길마저 다른 풍경이었고, 안다고 생각한 동네는 길이 생겨 기억을 혼동시켰다. 등산로 입구에 다시 선 지 대략 35년이 흘러 있었다. 강산은 세 번 반이 바뀌었고, 바뀐 풍경은 그만큼 발달한 문명의 이기 없이는 추억과 기억도 불가능한 일이 되어 있었다.


2월의 산은 쓸쓸했다. 이파리가 다 떨어진 가지들이 하늘을 차마 가리지 못했다. 찬바람마저 흐르니, 산은 싸늘했다. 천천히 산을 올랐다. 찬바람과 낯선 오르막에 숨이 금방 차올랐다. 길은 여러 갈래였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다녀서 그런지, 같은 방향의 길도 여러갈래 흩어졌다 모였다 하며 어수선하게 뻗어 있었다. 갈라진 길들마다 나무뿌리가 드러나 발디딜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이런 길은 아니었다. 내 기억의 길은 단 하나의 길이었다. 조금 가파르게 오르다 돌계단을 만났다. 돌계단을 오르다보면 정상에서 내려오는 어른들을 만났고, 어쩔 줄 모르고 계단위를 구르다시피 기어내려오는 길 잃은 두더지를 만났었다. 지금은, 능선과 등성이마다 길이 나 있었다. 오르막을 오르다 잠시 평탄한 길이 나오면 전에는 없던 나무정자와 가로등이 놓여 있었다. 산중턱에 운동기구까지 있는 걸 보면, 기린봉은 이제 동네 산책로나 다름없는 산이 되어 있었다.


중간에 오르다 좌측으로 보이는 선린사에는 앞까지 아스팔트 도로가 올라와 있었다. 경내 건물도 더 커지고 많아졌다. 예전엔 좁다란 산길을 걷다가 목이 마르면 잠시 우측 산길로 빠져 걸어들어가야 나오는 외진 작은 암자였다. 약수가 시원하고 맛있었지만, 지금은 목전까지 차오른 주택가 때문인지 식수로 쓸 수 없는 지하수가 되어버렸다. 기억 속 작은 암자를 추억하기엔 풍경도 절도 너무 변해 있었다. 절 방향으로 난 산길마저도 예전만큼 길고 가파르지 않아 추억의 맛이 나지 않았다. 다시 정상으로 향하는 산길로 돌아갔다. 많이 달라진 모습에 기분은 여느 평범한 산책길을 별 생각없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나무들도 많이 높아 있었다. 이전엔 꼬마였음에도 편평한 능선에서는 전주시내가 잘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파리를 다 떨군 나무가지들이 가시덤불처럼 나란히 서서 시내풍경을 가리고 있었다. 등산로에 세운 정자 바깥쪽에 서야 겨우 시내가 내려다 보였다. 평일 오후인데도 동네 주민들로 보이는 아주머니들 아저씨들이 겨울 등산복 차림으로 오가다가 정자에 앉아 서로 수다를 떨거나 어딘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기린봉을 찾았던 그 꼬마는 어쩌다 사람들을 만나는 이 산길을 좋아했었다. 공기는 차고 싸늘했다. 겨울 제주의 몸을 파고드는 한기가 아니라, 얼음같은 육지의 냉기가 폐부를 한껏 찌르는 공기였다. 이제 3분의 2 정도 올랐다. 물론 나는 정상까지 오를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길을 남기고 몸을 되돌릴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오를수록 마음이 허전했다. 내가 전주에 온 이유, 그리고 첫 여정으로 기린봉을 선택한 이유가 점점 희석되고 있었다. 풍경이 너무 많이 변해버리니 내 마음도 같이 변하는 것일까? 어쩌면 나의 욕심일지 모른다. 내가 기억하는 것들이 여전하기를 바라는 이기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묵직한 추억과 기억이 담긴 여기 기린봉에서, 그것들을 떠올리려 하는 것마저 욕심이자 이기심이라 말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마지막 오름능선이 가파른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었다. 이제 이 능선만 오르면 꼭대기의 바윗돌 위에 설 수 있겠지. 숨이 다시 차오르고 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운동을 하고는 있지만 등산은 오랜만이라 다리가 힘들어했다. 그래도, 정상에 오르면 내가 바라는 느낌, 바라는 기분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가 있겠지. 위를 보지 않고 서너 발걸음 앞의 길을 보며 꾸준히 올랐다. 그리고, 정상이 가까워지며 볕이 좀 더 환하게 느껴질 즈음,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 저기 저만치 정상이 보였다. 그리고, 정상을 채우고 있는 여전한 바윗돌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빛바랜 듯 후줄근한 옷에 깡마른 꼬마가 왼쪽 풍경을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꼬마를 바라보았다. 표정없는 얼굴에 바람이 불어 실눈을 뜨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대체 무얼 골똘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러더니, 꼬마는 다시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시내를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한 숨을 쉬고 주변을 서성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꼬마는 반대편 너머로 걷기 시작했다. 정상의 바위에 꼬마의 다리가 가리더니 어깨와 뒤통수가 이내 사라졌다. 그 반대편은 조금 가파를텐데, 하며 나는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정상에 도착하니, 반대편 가파른 바위길로 내려갔던 꼬마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꼬마가 사라진 방향의 산풍경도 많이 변해 있었다. 수많은 산길과, 세멘트 포장도로와, 데크계단이 옛 풍경을 가리고 있었다. 꼬마는 어느 길을 선택해서 산을 내려갔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꼬마가 서 있던 자리에, 내가 서 있었다. 발이 커져서 바위틈에 발을 제대로 디딜 수 없어 엉거주춤한 자세로 말이다. 이제야 좀 환하게 보이는 전주시내가 뿌연 연무로 흐리게 보였다. 오른쪽 뺨을 스치는 겨울바람이 더욱 싸늘했다. 2월의 평일, 해가 살짝 기우는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