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꿈은 정말 힘들었어. 아니 지쳤다는게 맞는 표현일지 몰라. 화가 잔뜩 나서 상대에게 힘껏 주먹을 날렸지만, 네 주먹은 투명한 막 같은 것에 닿으면서 힘을 잃었지. 상대방의 얼굴엔 닿지도 않았어. 닿아도 살짝 스치듯 닿고는 막의 탄성때문에 튕겨지듯 돌아왔지. 화가 난 너는 양막 주머니같은 탄성있는 공간에 갇혀있었어. 보이지는 않았지. 화를 어쩌지 못해 주먹을 날리고 발길질을 하고 머리를 날리면, 그 부드러운 막은 너의 공격력을 온전히 상쇄시켰어. 그러다 힘이 빠지고 지쳐서 숨을 헐떡이는데,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이 숨과 함께 차오르는 거야. 어찌할 줄 모른 채 쳐져있는 모습을, 상대방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어. 모퉁이를 돌면 모르는 길이 나왔듯, 너의 꿈은 너를 답답하고 불안하게 만들었어. 해소된 적은 없었어. 내가 지금 그런 꿈을 꾸지는 않지만, 해소되거나 극복한 모습으로 기억되는 너의 꿈이 없거든. 그것은 아마 지금도 가끔 겪는 불안과 디테일을 살려 마무리하지 못하는 일처리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누군가 그러더군. 섬세하지 못한 일의 마무리나 감정, 그리고 때없이 종종 이는 불안은, 어릴적 깊이 경험한 불안에서 기인한다고..
누군가의 화가 치밀어 오르는 곳에서 너는 몸이 굳고 불안에 휩싸였지.. 어머니의 화, 집안 어른들 사이의 다툼, 그리고 머리채를 서로 휘어잡은 동네 어른들의 싸움 앞에서 너는 항상 불안으로 몸이 굳어버렸어. 다툼과 화가 어떤 형태로 마무리되고 평범한 공기로 다시 돌아갈 때면, 너는 항상 골목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땅을 쳐다보았어. 때로는 돌멩이를 하나 들고 널찍한 골목바닥 세멘트 블럭에 낙서를 했지. 그러다 너보다 먼저 평정심을 찾은 동네 친구들이 놀자고 부르면 바로 일어나 뛰어갔어. 한참을 낙서를 해도 누구하나 뛰어노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면, 조용히 집으로 들어가 어른들 눈치를 보며 마루 한쪽에 놓인 책상의자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지. 아이는 언제나 무기력했어. 어른들의 영역에서 탈출할 수도 없었고 그럴 용기도 없었지. 어른들의 영역에서 그들의 행동과 감정에 지배를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거야. 그것은 그 자체로 무기력이었어. 너는 무기력을 너무 일찍 배웠던 것은 아닐까? 골목역시 어른들의 영역이었고 무기력의 공간이었지만, 그나마 쉽게 기분전환을 할 수 있었던 공간이기도 했었지. 동네 친구들 덕에 말이야.
겨울날 새벽 5시면 어김없이 골목을 깨우는 종소리가 들렸지. 새벽까지 일하다 들어와 주무시는 아버지와 허리가 아파서 움직이기 힘든 어머니를 대신해서, 너는 종소리에 일어나 비료포대에 미리 모아둔 연탄재를 들고 골목 삼거리까지 낑낑대며 걸었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집집마다 한 명씩 연탄재를 가득 담은 비료포대를 들고 삼거리의 쓰레기 리어카까지 걸어나왔어. 네가 제일 어렸을 거야, 새벽의 비좁은 골목을 채운 행렬 중에서는.. 리어카까지 겨우 포대를 끌고 가면 털모자를 쓴 청소부 아저씨가 포대를 받아다가 리어카 안으로 연탄재를 쏟아주셨어. 빈 포대는 다시 너에게 주고 말이지. 춥고 잠에서 덜 깨 귀찮은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그 겨울의 추억은 하나 만들 수 있었지. 주황 가로등 아래 리어카 위로 청소부 아저씨가 서 있었어. 받아서 쏟아내는 연탄재에 먼지가 가로등 불빛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데, 하늘에서는 진눈깨비가 내리면서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는 거야. 추운 새벽공기 속 피어오르는 먼지와 반짝이는 눈의 만남이라니.. 골목은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단함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연출할 수 있는 훌륭한 공간이었어.
가을이면 갈치나 고등어를 다라이에 담아 머리에 이고 골목 안까지 들어온 노점 아주머니가, 가까운 시내에서 ‘전두환 독재타도’라는 함성과 함께 날아온 최루가스에 잠시 우리집에 앉아 다리를 쉬었어. 빨래를 같이 개다가 갈치 두 마리를 팔고는 다시 다라이를 이고 골목을 빠져나가셨지. 어른들의 삶은 좁고 긴 골목을 따라 들어와 서로 가릴 것 없는 모습을 뒤섞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어. 우리는 골목에서 별 것 없는 꼬마들의 삶을 뒤섞다가 부모라는 각자의 영역으로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고.. 그 중의 하나였던 너를, 경원동 골목을 휘젓던 너를 잊지 못할 거야. 그건 단순한 추억의 의미가 아니야. 섬세함 대신 지치고 불안함으로 감정을 일찍 소진해버린 나의 어린 시절, 골목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지금보다도 걍팍하고 건조한 어른이 되었을 거야. 골목은 나름의 위안이자 감정의 완충지였어. 어렸음에도, 서로 뒤섞인 채 타인의 삶의 모습을 목격하고 이해할 수 있었던 공간이었고.. 나의 정체성은 그래서, 골목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몰라. 경원동 그 때묻고 비좁은 가난한 동네의 골목, 그 곳에 타임캡슐처럼 내 마음과 정체성이 묻혀 있어. 그런데, 지금 서 있는 이 골목의 파편에서, 그 타임캡슐을 어디에 묻었는지 알 수가 없네.. 아니, 알아도 그걸 다시 꺼내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어. 경원동을 떠나 이제껏 만들어 온 내 평온함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생기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