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기행(19)-경원동(1)

by 전영웅

오거리 한 쪽에 여전히 서 있는 버드나무에 손을 댔다. 까칠했다. 그리고, 껍질에 켜켜히 쌓인 도시먼지에 검댕같은 때가 묻었다. 2월의 싸늘한 공기에 버드나무 가지는 스산하게 흔들렸다. 내가 전주를 찾은 계절이 여름이 아니라는 사실이, 유일하게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 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그림자를 만들었고, 그 아래 이발소 아저씨가 종종 의자를 꺼내어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이발소에서 몇 번 머리를 깎았었다. 키가 작아 의자 팔걸이에 나무판자를 올리고, 그 위에 앉아서 보자기같은 천을 목에 둘렀다. 바리깡이 내 머리 주변을 훑고 지나갔다. 제복같은 옷을 입은 여직원은 나한테는 손도 대지 않았다. 면도해줄 수염이 없었으니 당연했다.


그 옆으로는 중국집이 있었다. 짜장면 냄새가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식당을 몇 번 가 보지 못했다. 아주 오랜만의 행사처럼, 종업식이나 졸업식 때나 되어야 그 식당에서 짜장면을 먹어 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하얀 페인트벽에 거뭇한 때가 낀, 황량하다 해도 무방했을 허름한 중국집이 왜 그리 동경의 대상이 되었는지 알 길은 없다.


그 맞은편에는 전북은행이 있었고, 어머니는 밤새 아버지가 벌어오신 현금을 저축하러 나를 데리고 은행에 자주 다니셨었다. 은행원한테 돈을 건네는 데스크는 내 이마가 겨우 닿는 높이였다. 나는 그 데스크 위를 보고 싶어서 손을 올리고 까치발을 들어 간신히 눈을 올렸는데, 은행원 이모가 내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은행 옆에는 호떡노점이 있었다. 중학교 야간자습을 마치고 버스에서 내려 걸으면 바로 노점이었다. ‘호떡은 콩기름보다 미강유로 부치는 게 더 맛있어.’라고 자신만의 노하우를 자랑스레 이야기하던 할머니가 생각났다. 그리고, 노점과 은행 사이에는 공중전화가 있었다. 20원의 동전이 절실한 때였다. 집에 들어가기 전, 나는 먼저 통화하는 사람 뒤에서 몇십분을 기다리다 내가 간절해 했던 그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잠깐이라도 목소리를 들으려 했다.


모든 풍경은 남김없이 변해버렸다. 아니, 버드나무와 도로구조와 몇몇 건물은 아직 그대로였다. 하지만, 내가 그 시절을 기억할 수 있게 하는 건 겨울바람에 앙상한 버드나무 뿐이었다. 나는 서성였다. 버드나무 주변을 서성이며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는다고 기억이 현실로 다가와 줄 리 없다. 당장에 나부터 그 기억으로부터 30년 가까이 변해버린 모습으로 오지 않았나. 기억은 의미도 없었고 허무함만 남겼다. 변한 풍경 안에서는 기억하는 사람들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아버지는 차를 장만하셨다. 비디오 플레이어로 홍콩 무협영화를 보는 일과 함께 로망이셨던 자가용을 조금 무리해서 사셨다. 차는 골목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인도구분도 없는 왕복 2차선 도로 한 쪽에 겨우 붙여 세우는 것이 주차였다. 차를 세우고 골목으로 10여 분 걸어들어와야 집이었다. 당시엔 차를 세운 자리가 전북대병원 담벼락이었고, 내가 전주를 찾아가 같은 자리에 차를 세웠을 때, 담벼락은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의 경계가 되어 있었다. 나는 누구나 주차를 집에서 먼 골목 바깥 길가에 하는 줄 알았다. 그게 보편적인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집 맞은편 아버지가 영어교사인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우리동네에서 몇 년을 살다가 문화촌이라는 동네로 이사갔다. 학교는 같아서 그 친구네 집으로 놀러간 적이 있었다. 그 동네 집들은 차가 대문 안에 있거나, 집 앞에 차들을 주차해두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주로 집에서 모여 놀았다. 학교가 가까워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나처럼 집에 오면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골목으로 나와 옆집 친구들을 불러내 골목을 뛰어다니거나 하질 않았다.


차가 있는 신작로는 골목이 좁을 때면 작당해서 몰려나가 뛰어다니는 놀이터이기도 했다. 물론 주차된 차들과 달리는 차들을 조심해야 했다. 차도와 인도의 구분도 없었듯이, 찻길에서 조심해야 하는 일은 정해진 규정이 없어 각자의 몫이던 시절이었다. 앞집의 친구가 이사가기 전, 신작로에서 오가는 차에 신경쓰지 않고 뛰어다니다가 친구 아버지에게 호되게 혼났던 기억이 있다. 옆집 세 살짜리 아이가 엄마랑 도로에 나왔는데, 엄마가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 아이가 도로 가운데로 나가다 다가오는 택시의 범퍼에 이마를 부딫혀 그대로 뒤로 넘어지며 바닥에 다시 뒤통수를 찧은 일도 있었다. 택시가 아이를 보고 급정거를 하면서 속도가 충분히 줄은 채로 사고가 나서 심각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엄마는 놀라서 우는 아이를 안고 민망해하고, 택시 기사도 괜찮냐고 미안하다고 하고는 바로 사라졌다. 요즘 같아서는 사고처리에 잘잘못을 민감하게 따질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엔 그렇게 흐지부지되고 마는 사소한 사건이었을 뿐인 시절이었다.


골목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 봤자 넘어지면서 무릎과 손목이 까지는 정도였다. 지금의 내 어깨가 옆으로 거의 닿을 듯한 그 좁은 골목이, 어린 시절 우리에겐 충분히 놀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 안에서 숨바꼭질도 하고 얼음땡도 하고 막가맞추기도 하며 신나게 뛰어다닐 수 있었다. 좁지만 좁지 않은, 아이들의 해방구였고, 어른들은 안심하고 아이들 노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골목은 길었다. 그래서, 노는 아이들끼리 어디까지의 구간을 정해놓지 않으면 골목은 무한정에 가까운 공간이 되어 서로를 힘들고 맥빠지게 했다.


이제는 그렇게 긴 골목은 사라졌다. 새로 뚫린 2차선 도로는 골목을 완벽하게 세 등분해 놓았다. 그리고 사람들도 사라졌다. 부서진 파편과, 출입금지라는 팻말과 겨울햇살을 탐하는 길고양이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한쪽이 무너지고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집들이 남았고, 주저앉혀 편평하게 만든 주차장이 생겼다. 주차장에 사람이 남았을 리 만무하고, 무너져가는 집에 사람이 살기엔 무리였다. 조각난 골목엔 아이들이 없었고, 남아있는 동네파편엔 사람이 사라졌다. 아쉽지는 않았다. 30년을 넘긴 시간은 나부터 이렇게 변해 있지 않은가.. 그 시간은 사람들이 사라지는 변화가 있어도 아무렇지 않을 시간이다. 다만, 뭔가 두고 온 자리가 순식간에 변해서, 뭔가를 찾을 수도 없고 찾으려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는 그런 기분에 빠져버렸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여기에 왜 서 있는 것일까. 왜 이러고 있는지 단서라도 만들어 줄까 싶은 작은 인기척마저도 완벽하게 사라진 이 골목 안에서 말이다. 조금만 걸어나가면 다시 만날 버드나무는 방황하는 나를 설명해 줄 수 있을까? 하지만, 버드나무도 왠지 힘들어보였다. 다시 손을 대고 물어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