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토 테루의 글을 읽고 있다. 나직하면서도 간결하다. 잔잔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의 글이 오사카와 교토에서 시작했다는 점도 나의 입장에서 마음이 끌리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별다른 생각없이 보았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초기작품 ‘환상의 빛’이 그의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문장의 간결함과 문장들이 모여 발산하는 분위기를 닮고 싶다는 생각이, 글을 쓰면서 아마도 세 번째로 강렬하게 들고 있었다.
첫 번째는 김규항의 문장이었다. 간결하고 명확하며, 핵심을 자연스럽게 짚어내는 힘이 대단해 보였다. 글이란, 간결한 호흡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문장들이었다. 두 번째는 한창훈의 글이었다. 낮게 깔린 시선과 독백이 발산하는 외로움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그러면서도 유머가 잔잔하게 뒤섞인다. 그래서, 마냥 그늘지지 않는다. 글에 어쩔 수 없이 녹아있는 시선의 높이와, 묘사와 유머에서 보여주는 어법 또는 기교를 닮고 싶었다. 김규항의 호흡과 핵심, 한창훈의 시선과 기교, 그리고 미야모토 테루의 감성.. 다독은 습관으로서는 좋지만, 정독만큼의 깊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다독을 하며 우연히 또는 종종 만나는 마음의 흔들림은, 나를 설레게 한다.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수용한다. 문제는 지속해서 연습하지 못하고 반짝 글에 배이다가 점점 흐려진다는 점이다.
사사키 아타루의 글을 읽고 있다. 그의 첫 저작 ‘야전과 영원’은 철학 논문이나 다름없는 두꺼운 책이라 몇 장 넘기다가 바로 포기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을 때에는 새로움과 열정이 느껴져서 집중해서 두 번을 읽었다. 글에 대한 치열한 애착, 세상의 영속성에 대한 굳은 신념, 읽는다는 것에 대한 광적인 집중력.. ‘..고 말았다’는 식의 단정과 강조의 어법은 일본 특유의 어법인 것 같다. 읽는데 거슬리는 이 표현만 아니라면, 사사키 아타루의 글은 치열함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보편 철학이 보여주는 고지식이나 우월감 없이, 동시대의 사회적 현상과 문화 안에서 편안하게 철학과 신념을 보여준다. 그가 글을 접하는 방식, 즉 지독할 만큼 치열한 정독은 다독병에 걸려 자주 지적을 받아온 나에게 결정적인 전환의 기회가 될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것을 끊고 니체를 16번을 읽었다는 그의 말은, ‘읽어버리면 미쳐버린다’ 라는, 다소 과격한 표현이지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힘이 있다.
정독하여 반복하는 독서는 사실, 책을 읽는 가장 정확한 방법일 것이다. 다독병에 빠져 이런저런 책을 마구 집어드는 나도, ‘이 책은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책을 종종 만나기 때문이다. 다독병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다시 한 번 읽지 못하게 하는 치명적 증상을 유발한다. 최근 ‘자본주의 세미나’를 펴낸 김규항 선생님은 전작 ‘혁명노트’에 이으면서, 자본론 원서를 여러번 읽었다고 했다. 관련 논문들도 많이 찾아 읽어야만 했다고 한다. 글의 깊이는 이렇게 형성된다. 그러고 보면, 내가 최근에 낸 ‘진료실 자본론’은 얼마나 얄팍한 깊이의 책인가 싶어지는 것이다. 자본론을 한국의 의료현실에 대입한 글인데, 한창훈의 기교나 미야모토 테루의 감성이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고 잘 쓰일 일도 없는 내용이다. 분석과 핵심과 깊이가 필요한 글이었는데, 매번 교정을 보고 다시 읽을 때마다 이게 제대로 형성이 된 글인가 싶었다. 사실, 이 글을 쓰려고 ‘자본주의 세미나’를 7번 이상 읽었다. 개원과정은 되도록 내 스스로 발로 뛰고 손을 써서 경험했다. 하지만, 핵심요약본을 읽고, 단 한번의 경험으로 책을 쓴다는 게 가당한 일인가 싶어지는 것이다. 책을 쓰고 나면 남는 건 아쉬움이라지만, 나는 뭔가 중요한 과정 또는 핵심을 놓치고 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김규항 선생님의 내 다독병에 대한 지적과, 사사키 아타루의 독서법을 좀 더 일찍 수용하고 만났더라면, 나는 ‘진료실 자본론’을 책으로 낼 오만함을 버릴 수 있었을까?
황선길 역의 자본론을 읽었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 세세한 기억이 없다. 자본주의 세미나를 그렇게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아직도 새로운 부분들이 보인다. 사사키 아타루의 글도 두 번 읽었지만, 디테일 없이 큰 흐름만 기억날 뿐이다. 이젠 머리가 많이 늙어버렸다. 오랜 시간 보고 경험하여 익숙해진 것들만 어렵지 않게 접하고 행동할 뿐, 새로운 것들은 쉽게 잊어버리고 익숙해지기가 어렵다. 독서습관에 변화는 주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들에 관한 책들을 중심으로 천천히 정독을 하는 습관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책 읽는 시간은 가끔이며 시간도 넉넉치 않다. 간간히 읽으니 그 전의 내용이 쉽게 이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의료인문학과 서사의학에 관한 책을 읽었으며, 돌봄에 관한 우에노 지즈코의 책을 읽는 중이다. 아마도, 세 번째 책은 이들의 내용을 바탕으로 경험과 접목한 책이 될 것이다. 하지만, 늙어버린 머리는 쉽게 내용을 기억하지도 정리하지도 못한다.
독서 습관을 하나 더 바꾸었다. 이전에는 책을 깨끗하게 보는 것을 선호해서 책에 펜을 대거나 라벨을 붙이지 않았다. 지금은 일단 연필로 핵심이라 생각하는 내용에 밑줄을 긋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 포스트잇 라벨을 붙인다. 그래야 나중에 필요한 내용을 찾기가 그나마 쉬울 것이다. 독서노트를 써서 따로 정리할까도 싶지만, 악필에 독서의 일이 너무 거창해질 것 같은 부담으로 시작은 하지 않고 있다.
책이 많아지고 있다. 동네책방 둘러보는 일을 좋아해서 갈 때마다 구입하는 책들과, 강유원의 팟캐스트를 듣고 소개하는 책들을 모은다. 내 서재에는 새 책 냄새가 가득하다. 독서습관에 변화를 주고 있는데, 이 많은 책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커진다. 그럼에도, ‘노후를 위한 대비’라는 핑계로, 책을 계속 모을 것이다. 당장에 눈에 들어오는 책은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강의’ 다. 읽어야 할 책이다. 소설도 많다. 한 가지 의문은, 한국작가의 소설들에 어떤 의견을 남겨야 할 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반드시 의견을 남길 필요는 없지만, 그러지 못하는 나 자신의 아둔하고 세밀하지 못한 감성이 상대적으로 드러나는 느낌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