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90점 미녀가 될 뻔했다

by 달 산

​내 인생을 숫자로 매긴다면 늘 '86점' 근처였다. 학창 시절 가장 많이 받은 점수도 평균 86점 정도였을 것이다.


아주 눈에 띄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무시당하지도 않는 경계선. 100점이라는 완벽주의는 애초에 포기했더라도, 늘 '앞자리가 9로 바뀌었으면' 하는 4점의 갈증이 나를 괴롭혔다.

86점의 인생은 늘 금메달을 놓친 아쉬운 은메달리스트의 표정을 닮아 있었다.


​뜻밖의 자유


​대학 시절을 떠올려 보면 그 86점의 정체가 더 선명해진다. 소위 '과 여신'이라 불리던 만점에 가까운 외모의 친구들은 늘 태풍의 눈이었다. 그들은 화려한 주목을 받았지만, 그만큼 구설에 올랐고 대개는 복잡한 '과 커플'의 서사 속에 휘말려 피곤한 청춘을 보냈다.


​반면, 그 정도의 외모를 가진 나는 그 폭풍에서 비껴 나 있었다. 적당히 호감을 사고 적당히 평범했던 덕분에, 나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과방에서 편하게 잠시 낮잠을 자거나 동기들과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90점이 넘는 '여신'이 되지 못해 내심 안타까워했던 그 4점의 여백이, 사실은 나에게 자유를 선물하고 있었던 셈이다.

만약 만점에 가까운 미모를 가졌더라면, 내 20대는 지금처럼 담백하고 평온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동메달리스트의 환희: 노메달이 될 뻔한 위기


​은메달리스트는 '조금만 더 했으면 1등인데'라며 위를 보고 아쉬워하지만, 동메달리스트는 아래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조금만 잘못했으면 빈손으로 돌아갈 뻔했다"는 안도감이 그들을 금메달리스트보다 더 환하게 웃게 만든다.


​나의 86점도 이제 다시 보니 동메달의 시선과 더 닮아 있다. 어쩌면 90점이라는 문턱을 넘지 못해 아쉬워하던 그 간극보다, 70점대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나를 가꾸고 버텨온 시간들이 훨씬 더 값진 것일지도 모른다. 조금만 마음을 놓았더라면, 조금만 나를 방치했더라면 나는 아예 메달권 밖으로 밀려나 아무 빛도 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86점, 내가 기어이 지켜낸 뜨거운 방어선


​86점은 내가 삶이라는 경기장에서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지켜낸, 가장 뜨거운 '방어선'이다. 하마터면 90점이 되어 타인의 시선에 갇혀 살 뻔했고, 하마터면 점수를 잃어 나만의 색깔을 잃어버릴 뻔했다.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나는 86점이라는 가장 인간미 넘치고 여유로운 자리를 찾아낸 것이다.


​이제 나는 90점을 향해 손을 뻗으며 애태우던 마음을 나려놓는다. 대신, 빈손이 될 뻔했던 위기를 기적처럼 넘기고 86점이라는 값진 메달을 목에 건 내 자신에게 박수를 보낸다. 꽉 찬 100점보다, 숨 쉴 구멍이 있고 적당히 예쁜 86점의 내가 훨씬 더 근사하니까.


​당신이 지켜낸 오늘의 점수에게


​오늘도 나는 86점만큼의 정성을 다해 살았다. 혹시 스스로에게 인색한 채점표를 들이밀며 모자란 몇 점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기억해 주길 바란다.


​우리가 지켜낸 그 '평범해 보이는 점수'가 사실은 0점이 될 뻔한 위기를 넘어 기어이 지켜낸 가장 뜨거운 승리의 기록이라는 것을. 오늘 당신이 지켜낸 당신만의 점수가 몇 점이든,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니, 충분히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