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와 동이

나를 위한 동화

by 달 산

사계절 내내 부드러운 안개가 진주빛으로 내려앉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담장마다 싱그러운 초록 잎을 머금은 연분홍색 장미와 하얀 꽃송이가 가득히 피어난 곳.

길가에 깔린 보드라운 모래조차 햇살을 품어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부신 마을이었지요.


​사람들은 이 풍경을 꼭 닮은 연이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불렀습니다.
​연이는 이 마을이 소중히 간직해 온 한 조각 햇살 같았습니다.


그녀가 지나가면 시든 꽃들이 기적처럼 고개를 들고, 거친 바람도 숨을 죽이며 낮은 인사를 건넸으니까요. 연이는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늘 단정한 미소가 고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연이의 그림자 끝에는 언제나 동이가 무겁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동이는 연이의 소매 끝을 붙잡고 잠시도 쉬지 않고 놀아달라며 칭얼댔습니다.

해 질 녘 긴 그림자가 온 땅을 덮칠 때면, 겁에 질린 상태로 막막한 울음을 토해 내곤 했지요.


​그런 동이를 연이는 투명한 벽을 사이에 둔 것마냥 모른 체하고 싶었습니다.

그저 차가운 시선으로 외면하고만 싶었습니다.


​동이는 연이의 마음에 들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은 보드라운 털을 가진 작고 귀여운 길고양이로 변신해 발치에 몸을 비벼보기도 했습니다.

또 어느 날은 연이의 어깨 위에 소리 없이 내려앉는 하얗고 가벼운 깃털이 되어보기도 했지요.


​연이가 창가에 앉아 책을 읽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무늬를 가진 노란 나비가 되어 유리창 앞을 팔랑이며 머물렀습니다.


​연이는 그때마다 잠시 쓰다듬어 주거나 "참 예쁘네"라고 말하며 지나칠 뿐이었습니다. 그것이 동이라는 사실은 알아볼 리가 없었지요.


​결국 동이는 연이의 뒷모습을 보며 가만히 숨을 참았습니다.

​“내가 동이라서 연이가 싫어하나 봐. 그럼 난 아무것도 되지 않을래.”


​그 순간, 동이의 몸이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흐릿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햇살에 비친 먼지처럼 반짝이는가 싶더니, 이내 저녁노을에 녹아드는 연기처럼 투명하게 흩어져 버렸습니다.


​동이는 그렇게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연이는 어지러운 공기 속에서 눈을 떴습니다. 연이의 몸은 마치 바람 든 풍선처럼 자꾸만 허공으로 떠밀려 올라갔지요. 오랫동안 자신을 대지에 단단히 붙들어주던 머리 위의 묵직한 물동이가 어느 날 갑자기 증발해 버린 듯한, 텅 빈 가벼움이 두려움으로 몰려왔습니다


​늘 등 뒤를 지키던 그 익숙하고 얕은 숨소리. 연이의 발꿈치를 끈질기게 따라붙던 그 투명한 눈빛도 연이의 그림자와 함께 보이지 않았습니다.​연이는 사라진 그림자와 동이처럼, 자신도 하늘로 떠올라 산산이 흩어질 것만 같은 공포감에 휩싸였습니다.


​그제야 연이는 깨달았습니다. 지금껏 발치에서 손목을 잡아끌던 동이가 자신을 온전히 땅에 내려 살게 해 준 소중한 존재였음을…….


​"동이야!"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지 않는 이름이 허공에 메이리 칠 뿐이었습니다. 연이는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몸으로 발버둥 치며 동이를 찾았습니다.


​정성껏 빗어 넘겼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어지고, 정갈한 소슬 한복에 흙먼지가 잔뜩 묻어나는 것도 모른 채 마을 곳곳을 헤매었습니다.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멈출 수 없었습니다. 연이는 제발 동이를 다시 한번만 보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연이는 홀린 듯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낡은 고향 집을 향했습니다. 거친 풀들로 길은 가로막혔지만 연이는 멈추지 않고 나아갔습니다.


​마침내 도착한 그곳엔 하얀 꽃잎을 다 떨구고 앙상해진 배나무 한 그루와 낡은 툇마루가 연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배나무 아래, 볕이 잘 들지 않는 황토 흙마당 구석에 동이가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동이는 딱딱하게 굳은 흙바닥을 자신의 온기로 말랑하게 녹이며, 부드러워진 흙을 검지로 파내어 입에 넣고 오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당의 흙을 더 파내어 동그란 공도 만들었다가 몸에 칠하기도 하면서, 지독한 외로움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지요.


​연이는 흙투성이 동이를 와락 끌어안았습니다.


​그 순간 연이의 눈앞에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홀로 울다 지쳐 잠든 한 살배기 연이가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저녁노을이 온 마을을 붉게 물들일 때, 텅 빈 학교 운동장에 혼자 남겨졌던 어린 연이의 뒷모습도 보았습니다.


​새처럼 작고 가벼운 동이의 몸에선 예상치 못했던 따뜻함이 건너왔습니다. 한참을 울었는지 감출 수 없는 깊은 떨림이 불규칙하게 전해져 왔지요.


​연이가 동이를 더 세게 안아주자 그 떨림은 서서히 연이에게로 와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아지랑이처럼 연이의 가슴속으로 스며든 동이의 온기.

​그녀의 얼굴이 파도치듯 잘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눈 밑으로 앙증맞은 홈이 패었습니다.

​서러움을 참을 때마다 씰룩거리던 동이의 고집스러운 볼이 연이의 미소와 섞여들며, 연이의 ‘심술보조개’로 피어난 것이지요.


​이제 마을 사람들은 연이를 천사라 부르지 않습니다.
​툇마루에 앉아 눈 밑의 심술보조개를 툭 내밀며 짓궂게 웃는 연이에게서 낯선 생기를 발견할 뿐입니다.


​동이가 된 연이는 이제 배나무 아래 누워 가만히 숨을 고릅니다. 그녀의 손톱 밑에는 지워지지 않는 붉은 황토 흙이 훈장처럼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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