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비움'의 미덕을 읊조린다.
나 역시 그 유행에 편승해 옷장을 열었으나, 결국 내 손에 남은 건 팽팽하게 묶인 두 개의 100리터짜리 검은 봉투였다.
이 봉투들의 행선지는 수거함이 아닌 창고.
나는 오늘 비움을 실천한 것이 아니라, 차마 버리지 못한 자아의 파편들을 잠시 유예시키기로 했다.
나는 불편함을 잘 견디지 못하는 맥시멀리스트다.
이 먼 곳까지 이사 올 때 한국 집의 쓰레기 같은 물건들까지 바득바득 싸 들고 온 것은 단순한 욕심이 아니었다.
낯선 타국에서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길이 없을 때, 그 손때 묻은 물건들은 나 대신 나의 역사를 말해주는 유일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남편은 한술 더 뜬다. 대학 졸업 앨범을 학년별로 두 권을 소장했었다. 그 무거운 '벽돌'들을 얼마 전까지 들고 다녔다.
우리 부부에게 물건은 짐이 아니라, 자꾸만 흔들리는 유목의 삶 속에서 우리를 지탱해 주는 가장 무거운 닻이었다는 것을.
그래서일까. 내게 물건을 버리는 행위는 언제나 작은 통증을 동반한다. 지난 이사 때, 배터리 효율이 20% 정도 남은 무선 청소기를 Mistplatz(쓰레기장)로 보냈던 기억이 선명하다.
거대한 컨테이너 속으로 청소기를 떨어뜨리는 순간, 그것은 짧고 낮은 목소리로 '웅-' 하고 울었다.
내게는 마치 전우가 내뱉는 마지막 비명이자 작별의 탄식처럼 들렸다.
그 둔탁한 울림과 함께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수명을 다한 가전제품 하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낯선 땅의 먼지를 닦아내며 나를 지켜주던 내 삶의 한 문장을 강제로 마침표 찍는 기분이었다.
남편의 국제 업무와 역마살이라는 운명에 이끌려 우리는 벌써 9번의 단절을 경험했다.
이사는 정든 공간과 사람으로부터 나를 강제로 분리하는 일이다.
뿌리내리지 못하는 삶이 반복될수록, 역설적으로 손에 잡히는 물건에 대한 집착은 단단해진다.
우리가 짊어진 짐의 무게는 우리가 견뎌온 고독의 깊이와 비례한다.
버리지 못한 짐: 잊고 싶지 않은 기억들의 물적 증거.
창고로 보내는 행위: 지금 당장은 감당하기 버겁지만, 결코 내 인생에서 도려낼 수 없는 시간들을 보존하는 의식.
오늘 창고로 들어간 저 두 봉투는 나의 의지박약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저축해 둔 비축분이다.
미니멀리즘이 자아를 깎아내어 본질을 찾는 과정이라면, 나의 맥시멀리즘은 흩어지는 삶의 파편들을 끌어모아 '나'라는 형체를 유지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나는 앞으로도 몇 번의 이사를 더 하게 될지 모른다. 그때마다 나의 닻은 더 무거워질 것이다.
하지만 가벼워서 정처 없이 날아가는 존재보다는, 무거운 미련을 지고서라도 땅에 굳건히 발을 붙인 채 살아가고 싶다.
나는 비우지 못한 것이 아니다. 나의 모든 시공간을 차마 유기하지 않기로 한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