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의 독립선언문

by 달 산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남편 바라기'인 H.


그녀는 어느 날 찻잔을 내려놓으며 스스로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나 이제 독립해야겠어!"


​수십 년을 타인의 궤도에 맞춰 위성처럼 살아온 삶이었다.

아이들의 뒤꿈치만 바라보며 그들의 보폭에 맞춰 숨 가쁘게 달려오고, 가족들의 입맛에 맞는 식탁을 차려내느라 정작 자신이 무엇을 먹고 싶은지는 잊고 살았던 H.

그녀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중년이라는 고개를 넘으며 그녀가 써 내려간 '독립선언문'은 서글프기보다 오히려 눈부시게 당당하다.


독립선언문 (獨立宣言文)


​나는 오늘,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라는 이름 뒤에 가려졌던 본연의 이름을 되찾고, 내 삶의 진정한 주인임을 세상과 나 자신 앞에 엄숙히 선언한다.


제1조 [감정의 독립]

나는 더 이상 타인의 기분이 나의 날씨가 되게 두지 않는다. 타인의 감정에 휘둘리던 소모를 멈추고, 내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최우선 가치로 둔다.


​제2조 [신체의 주권]

가족의 입맛에 맞춘 상차림 대신, 나의 몸을 깨울 샐러드와 요가 매트를 선택한다.

다이어트는 타인의 시선에 맞춘 몸이 아니라, 내가 나를 가장 사랑할 수 있는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제3조 [사회적 자아의 재건]

멈춰있던 경력의 엔진을 다시 예열한다. 브런치(Brunch) 작가로서 나만의 사유와 성찰을 기록하고, 내가 가진 재능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나눔 활동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한다.


​제4조 [관계의 확장과 엔진의 점화]

가족 밖의 세상을 만난다. 오롯이 나의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과의 시간을 통해 멈췄던 삶의 엔진에 시동을 건다. 나를 '누구의 엄마'가 아닌 오직 나 자신으로 바라봐 주는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제2막의 동력을 얻는다.


​제5조 [건강한 공존]

나의 독립은 가정을 저버리는 가출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라는 기둥을 단단히 세워, 가족이라는 지붕을 더 건강하게 지탱하려는 일종의 '분사(分社)'이다.


​[특별 부속 조항: 나를 위한 약속]

는 목표 체중 달성 시, 10년 동안 보지 못했던 대학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에게 연락하고 고국으로 나만의 여행을 떠난다.

이는 단순히 오랜 지인과의 재회가 아니라, 가장 자유롭고 빛났던 '스무 살의 나'와 조우하는 상징적인 의식이자 스스로에게 주는 포상이다.

​홀로서기가 아닌, '함께 서기'를 위하여...


선언문을 작성후 H는 이제 더 이상 남편의 뒷모습이 아닌, 거울 속 자신의 눈동자를 먼저 바라보기 시작한다.


브런치에 기록될 그녀의 온화한 사유와 누군가에게 전해질 따뜻한 나눔은 그녀의 엔진을 쉬지 않고 돌아가게 할 것이다.


​그런데 독립의 길은 시작부터 만만치 않다. 선언문 제4조를 이행하여 삶의 엔진에 시동을 걸어보고자, 설레는 마음으로 평소 좋아하던 친구에게 안부 카톡을 보냈건만 이틀째 '안읽씹' 상태...


거울 속 당당한 눈동자는 어디 가고, 자꾸만 숫자가 사라졌는지 확인하는 소심한 자신의 모습에 H는 헛웃음을 짓는다.


친구야 잘 지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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