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출발
오슬로행 비행기티켓이 저렴하다는 이유와 2주간 힘든 회의를 마친 남편이 휴가가 많이 남았다는 말을 듣고 갑작스럽게 결심한 노르웨이 여행.
아이들은 모두 개학이라 부부만의 여행이 되었다. 노르웨이 검색하면 명소로 등장하는 송네피오르라는 곳의 멋진 절경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기에 밤늦게 도착한 오슬로 시내에서는 다음날 오전에만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 이후엔 오슬로 중앙역에서 기차로 5시간 가서 뮈르달역을 경유하고 그곳에서 또 1시간을 산악기차를 타고 플롬이라는 작은 마을까지 가면 된다. 왕복 4시간짜리 송네피오르 관광 페리를 예매해 두고 급히 만든 버킷리스트에 밑줄을 그었다.
계획적이지도 않은 내가 몇 주 전 교통편을 미리 예매를 해두는 일은 고역이었다. 왜냐하면 유럽의 기차들이 제시간에 오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연달아 다음 편을 예약해야 플롬으로 무사히 갈 수 있기 때문에 불편한 마음을 누르고 최대한 기차 시간 맞춰 뒷 여정도 예약을 했는데 다행히 되돌아가는 오슬로 중앙역을 향하는 기차를 탄 지금까지 큰 시간 변동은 없어서 뜻대로 차근차근 진행됐다.
오슬로에서 뮈르달
첫날 오슬로 시내는 생각보다 볼 게 많았고 오전 3시간은 너무 짧았다. 칼 요한 거리를 걷고 부둣가에서 사진을 찍다 보니 벌써 12시 뮈르달 행 기차 시간이 다가왔다. 아쉽게도 중앙역 바로 옆 오페라 하우스 지붕에 올라가 오슬로 피오르와 도심전경등을 감상을 할 10분이 모자라 중턱에서 사진만 찍고 급히 기차를 탔다. 그래도 송네피오르를 생각하니 오슬로 시내 관광의 아쉬움은 잊혔다.
뮈르달 기차역과 플롬 열차
뮈르달 행 기차에서 남편과 기대와 설렘으로 작은 전경 하나하나에 감탄하며 5시간을 달려왔다. 뮈르달 기차역은 고지대여서 10월 초인데도 한겨울 추위가 느껴졌다. 백팩 안에 준비해 온 방한용품들을 주렁주렁 걸치고 드디어 플롬행 산악 열차를 탔다.
1시간 동안 시속 20km로 달리는 이 열차는 150년 전에 인부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쓰여 있었다. 짙은 초록의 기차는 붉은 톤의 클래식한 내부에 세월의 흔적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오른쪽에 앉아야 한다는 챗지피티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말대로 왼편에 앉았다
멋들어진 비현실적 절경을 느끼고 싶어 유튜브 영상조차 아껴 똑바로 보지 못하고 흘려보지 않았던가...
15분쯤 지났을까, 안내에는 이 여정의 뷰포인트라며 몇 분 간 포토타임을 주었다.
우리는 협곡 사이 멈춰준 기차에서 내렸다. 가파른 바위산에 거대한 폭포와 그 물안개가 만들어낸 무지개 옆에서 매혹적인 춤을 추며 목동들을 유혹한다는 요정 훌드라도 운이 좋으면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폭포수의 줄기는 여름이 지나고 누렇게 마른 나뭇잎과 함께 메말라 간신히 폭포라는 명분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플롬한정 제철인 "여름과 겨울"이 아닌 가을에 여행을 온 것이었다. 살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플롬 숙소
빈대와 벼룩에 물려 팔이 퉁퉁 부은 사진이 리뷰에 있던 플롬의 숙소를 남편이 예약했다. 아무리 찾아도 근처 몇 안 되는 숙소에 예약가능한 곳이 거의
없었기에 지인이 준 진드기 퇴치제까지 챙겨 왔다. 그저 벌레만 물리지 않기를 바랐는데, 도착한 숙소는 스위스의 그린델발트나 오스트리아 고사 우제만큼은 아니었지만 기차를 타고 오며 보았던 절경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작은 오두막집에 내가 좋아하는 격자창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굽어진 길과 노란 가로등, 그리고 살찐 양 떼들이 아침저녁 쉬지 않고 먹는 초록 초록 풀밭이었다.
더 좋은 점은 대대적인 방역작업으로 이제는 벌레 따위 전혀 없었다는 것. 내가 생각하는 꿈의 숙소였다. 남편과 현지 맥주 Hansa 필즈너와 Ringnes도 맛보고 잔잔한 행복감도 덤으로 맛본 배부른 저녁을 보냈다.
송네피오르 페리
이제 이번 여행의 백미, 송네피오르 페리를 타는 날. 날씨는 흐렸지만 기분만은 최상!
페리를 타고 2층 야외석에 좋은 자리도 잡고 출바알~
멋지긴 했다. 정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왕복 4시간 동안 별 감흥이 없었다.
흐리고 비가 내려서 그렇다 쳐도
긍정의 아이콘 내 남편은 주로 좋은 말만 하는데 일부구간엔 충주호에 배 타고 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이야기했다. 헉... 사실 나도 그런 것 같았다.
갈 때 두 시간, 올 때 두 시간. 그리고 비행기 타러 6시간 기다리는 것까지 합치면 8시간인데… 풍경을 보다 졸다 유튜브보다 슬슬 본전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긴긴 송네피오르 여정을 마치고 남편과 나는 점차 서로 말을 잃어갔다. 말은 안 해도 긴 여정과 새벽 비행 스케줄로 공항 노숙까지 해야 하는 터라 피곤함에 예민함까지 겹쳐서 각자 그림자처럼 옆에 있지만 서로의 세계에 몰두하고 있었다. 애들이 절대 싸우지 말고 잘 다녀오라고 했는데 그걸 지키기 위해 서로 애쓰는 중이었다.
돌아오는 야간 기차 내 카페칸에서 냉동 피자를 오븐에 데운 거 하나씩을 사 먹고 옆자리에 남편은 금세 잠이 들었다.
여행하는 동안에도 서로의 얼굴 보다 각자의 핸드폰에 시선을 맞추는 게 편한 갱년기 부부의 서툰 여행이었지만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이미 나는 안다. 함께 보낸 이 시간이 미래의 나를 행복한 미소 짓게 할 것을 잘 안다...
아쉬운 밤이지만 나는 지금 빨리 집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