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엘의 이야기 2

홀로 서는 엘

by 고요한관종


‘오늘은 날씨가 흐리네 ‘


엘은 남색 일자 스커트를 입었다. 살구색 에나멜 플렛만 신기에는 발이 추워 보여 검은색 얇은 양말을 신고 플랫에 발을 꾸겨넣었다.

신발장 앞에서 몇 켤레 안 되는 구두를 번갈아 신어보며 자신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떠올려보았다. 무기력한 기분은 조금은 걷힌 듯했다. 스커트에 양말을 신은 플랫슈즈 차림은 엘의 추구미이지만 용기가 필요했다. 살구색 플랫이 동동 떠 보이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모 어때 검정 스타킹에 실버 플랫 신는 사람도 많더만 모..’

멀찌감치 떨어진 자신의 발등을 요리조리 보고, 버스정류장 가는 길 불 꺼진 상점 문 유리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 이왕 나왔는데 어쩔 수 없지, 다리만 이뻐 보이면 되지 ‘ 엘은 혼잣말로 괜찮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버스 43번이 5분 뒤에 도착을 알렸다.

‘어디를 가야 하나..’

엘은 오늘 제이를 만나고 싶었지만 제이의 의중이 어떤지 몰라 메세지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그녀는 어젯밤 속상한 일로 뜨거운 눈물과 한숨으로 제이에게 메세지를 남겼었다. 마침 연락이 닿은 제이는 엘을 위로해 주었지만 그마저도 오랜 시간 머무를 수 없는 그들의 상황으로 짧게 끝내야 했다.

제이와의 시간은 늘 그렇게 찰나의 행복과 긴 여운의 일상을 견디며 살아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같이 점심 먹을래요?”

제이가 먼저 만나자는 말을 해주길 기다렸지만 엘은 고민 끝에 메세지를 보냈다. 제이는 이미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지인들과 이동 중이라는 답을 보내왔다.

“좋은 시간 보내요”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메세지를 태연한척 보냈다. 서운함 때문에 순간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오늘 새벽 같이 속상했던 일이 있고 나면 제이는 늘 엘을 안아주러 왔었다. 하지만 오늘 제이는 엘에게 적극적으로 만남을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속상했지만 이유가 있겠거니 하며 더 이상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에게 기대는 마음을 차단하고 싶어 메신저 앱을 서둘러 삭제했다.


그녀는 제이에 대한 기대감이 크면 나 자신을 지킬 수 없다는 결심으로 무작정 집을 나왔다.

일단은 역으로 가서 지하철을 타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움직이기로 작정한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엘은 조용히 책을 읽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만한 곳을 떠올렸다.

가보지 않은 곳과 이미 가봤던 곳 중 어디를 가볼까 고민을 시작하자 마자 이미 가봤던 카페로 결정을 했다. 이유는 따뜻한 오뎅이 떠올라서였다. 종로 3가 동순라길의 카페. 엘이 평상시 좋아하는 오뎅을 파는 분식집을 지나야 그 카페로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번 제이와 그 분식집에서 쌀떡볶이를 먹으며 역시 떡볶이는 밀떡이라는 진리를 깨달았던 기억. 분위기 좋았던 피자집과 오래된 지붕 위의 고양이들, 햇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서순라길의 인적 드문 골목길도 연달아 떠올랐다.

제이에게 의존하지 않고 무력감에 고립되지 않기 위해 무작정 떠나는 혼자만의 시간인데 왜 떠오르는 건 제이뿐인 걸까..

그녀는 어제 무심코 핸드폰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확 식게되는 글을 보게 되었다. 엘의 감정을 돌보는 사람으로 제이를 자신 곁에 두는것은 이기적인 행동이라 생각했기때문에 제이에게 만나자고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았다.. 엘은 지금 이 순간 제이가 가장 필요했음에도 제이가 느낄 수 있는 부정적인 생각까지 걱정하고 있었다.

엘은 지금까지 자신이 고통받는 와중에도 상대가 느낄 감정들까지 챙겨 왔다. 내어주고 맞춰주는 것은 엘에게 언제나 익숙한 행동이었다. 그건 분명 그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이었고 그녀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곤두박질치는 기분을 견디는 날이 매일 이어지는 요즘이라면 그녀를 살게 하는 원동력은 오히려 쥐약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혼자 오길 잘했네’

그녀의 기분이 좀 나아진 건 따뜻한 오뎅 세 개를 먹고 난 후였다. 평상시 자신에게 쓰는 돈만큼은 열 번 정도 고심하고 소비하는 그녀이기에 3천 원의 소비는 배도 부르고 추운 몸도 데웠기에 가성비로 흡족했다. 혼자 오는 게 싫었음에도 어쩔 수 없이 혼자 보내는 이 시간을 괜찮다고 여긴 것은 오뎅 세 개의 힘보다 복잡한 그녀의 단순한 이면이기도 했다.



한 달 만에 다시 찾은 종묘의 분위기는 환하게 피어있는 벚꽃나무가 알려주었다. 엘은 발걸음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사소한 것들을 사진으로 남기는 습관이 있었다. 앨범에는 갖가지 사진들이 쌓여있었지만 자주 들여다보진 않았다. 잊히는 것이 두려워, 그 순간을 기억 속에 담으려는 행위만으로 충분해 보였다.

길모퉁이와 담벼락 사이에서 피어있는 민들레와 들풀들을 보며 치열한 그들의 봄이 엘 자신과 닮은 것 같아 애처로웠다. 누군가에게 봄날은 설레는 축제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살아내야 하는 생존이라는 걸.

엘은 슬픈 눈으로 그들을 담고 있었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엘은 감탄하며 여기는 아마 최애 카페로 등극될 것 같다고 혼자 구시렁거렸다.함께 호들갑을 떨며 알아차려주는 제이가 없다는 것이 약간 아쉬울 뿐이었다.

사라강, 앤서니라자로의 목소리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느닷없이 카페주인장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돌발적으로 발랄한 그녀의 생각들이 그녀가 무력감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제이 없이 시간이 이렇게 잘 갈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은 제이가 옆자리를 채워주고, 손가락을 매만져 줄 수 없음도 제법 잘 받아들이는 듯했다.


불편함을 지우기 위해 엘 스스로가 조절하고, 움직이고 더 내어주었던 자기 회피의 시간을 이제는 비워둔 채로 마주해야 했다.

외로움과 고독함은 모두 혼자라는 점에서 닮아 있다. 그러나 외로움이 타인에 의해 비워진 자리에서 밀려오는 수동적인 감정이라면, 고독함은 스스로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능동적인 선택이다.

잊히는 것이 두려워, 그 순간을 기억 속에 담으려 애쓰던 엘의 시간들 또한 결국 외로움의 연장선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붙잡기 위해, 사라질 것을 붙들기 위해 애쓰던 마음.

하지만 고독은 다르다. 사라짐을 붙잡으려 하기보다, 그저 흘러가게 두고 남은 것들과 마주하는 일. 누군가의 부재를 견디는 것이 아니라, 엘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래서 엘은 외로움에 머무르기보다 고독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비어 있음에 흔들리기보다, 그 비어 있음 속에 스스로를 채워 넣을 수 있도록.

오늘은 숱한 외로움을 뒤로한 채, 마침내 고독의 시간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간 날이었다.

: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