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엘의 이야기 1

웃음을 잃은 엘

by 고요한관종

사람의 심리와 육체는 밀접한 관계로 엮여있다.

걱정과 근심은 엘의 웃음을 앗아갔다.

말끝마다 신경질 적이거나

한마디 한마디를 아끼게 되거나.

엘은 후자를 선택했다.

속은 짜증과 신경질 투성이지만

혀를 제어하지 않으면 짜증과 신경질이 삼켜버린다는 것을 엘은 안다.


엘은 생각을 다듬기 위해 쌓여있는 설거지를 시작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다 보니 설거지를 하면서도 쉽사리 짜증이 가라앉지 않아 보인다.

엘은 큰 숨을 몰아 쉬며 잠시 두 눈을 질끈 감다가 다시 수세미를 집어 들었다.

엘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 불만이라는 빨간딱지가 붙여진다. 그동안 애써 애정하던 것들이 한순간 지겹게 느껴졌다. 하나같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고, 다 싫어졌다.


엘은 점점 의욕이 사라져 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안간힘을 쓰며 지켜온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것 같아서 서글퍼졌다.

‘뭘 해야 지긋지긋한 이 기분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엘은 속으로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쉬는 것조차도 마음대로 편히 쉴 수 없는 이 공간이 감옥처럼 느껴졌다. 발버둥을 치려해도 여전히 제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냥 여기에 갇혀야 한다는 걸 깨닫자 마음이 주저앉았다. 일탈도, 탈출도, 솟아날 구멍도 없는 아득한 어둠은 엘이 있어야 할 자리였다.



몸이 고장 나버렸다.

새벽에는 잠을 설쳤고 얼굴 곳곳에 뾰루지가 났다.

엘은 음식을 먹어도 자주 배탈이 났다. 뒷목은 며칠째 담에 걸린 듯 뻐근했고, 몸까지 으실거리고 쑤시는 기분이었다.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엘의 작은 친구가 건네준 체온계는 37.8을 찍었다. 미열이 시작되었다.

서둘러 전기장판을 켜고 오한으로 떨리는 몸을 뉘었다.

‘지금은 아픈 것도 짐인데..’엘은 조용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픈 몸이 잠잠해지길 바라며 조용히 그러나 다급하게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렸다.

이마저도 편하지가 않자 서러움이 몰려왔다. 엘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흐르는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 종일 웃었던 순간이 얼마큼 이었을까.

아니 정말 가식적인 웃음 말고..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 번지는 미소로 주체 못 한적이 있었는지 엘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오늘 하루 중에는 안타깝게도 그런 순간이 없었다.

엘은 웃고 싶었다.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기분 좋은 웃음말이다.


순수한 웃음.

그 순간의 감동과 즐거움이 뇌에서 가슴으로 퍼져

온몸으로 기억하는 순간은 아주 짧고 강렬하게 남아있다. 왠지 모르게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콜라를 넘길 때 목구멍에 전해지는 따가운 타격감에 개운함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엘에게 그런 순간이 불과 이틀 전에 있었다. 꺼내 보려 하지만 그마저도 오늘은 꽁꽁 숨어버려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엘은 괴로운 현실과 제이와 함께한 시간 사이의 괴리를 견디기 힘들었다. 엘은 침묵을 선택했고 스스로 벽을 치고 있었다.

엘은 제이를 깊이 아끼고 사랑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짐을 함께 지고 가야 한다는 부담을 제이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엘은 그를 알고 있었다. 책임감 강한 그가 사랑하는 엘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해 줄 수 없음으로 애태울 것이라는 것을..

엘은 더더욱 말을 아끼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편하고자 풀어놓은 말들이 그의 마음에 돌덩이를 얹는 행동이라는 걸 깨달았다. 엘의 인생과 제이의 인생은 겹쳐질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엘은 제이가 좋아하는 토니 베넷의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를 조용히 들으며 자신의 마음과 대면했다.

급격히 꺾어 떨어지는 불안정한 삶은 어디가 끝일까? 얼마나 지탱할 수 있을까?

이런 자신 곁에 제이를 두는 것이 미안했다.


엘을 괴롭히는 밤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