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로빈 스턴
*유튜브 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Qa83iP0J2Ng
『사랑의 기술』의 저자 에리히 프롬은 미성숙한 사랑의 예시로 공서적 합일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공서적 합일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는 관계로서, 즉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지 않는 관계를 뜻하죠. 이러한 공서적 합일은 크게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능동적인 공서적 합일은 타인을 복종시킴으로써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마조히즘적 관계이며, 수동적인 공서적 합일은 타인에게 지배당함으로써 일체감을 느끼는 사디즘적 관계를 가리키죠. 그렇다면 만약 능동적인 공서적 합일을 추구하는 사람과 수동적인 공서적 합일을 추구하는 사람이 서로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도 이때 그들의 사랑은 폭력으로 전락하고, 또한 그들의 폭력은 사랑으로 포장될 것입니다. 복종시키기를 좋아하는 주인과 복종 당하기를 희망하는 노예 사이에서 폭력은 애정의 표현이자 사랑의 증거로 착각되기 때문이죠. 즉 그들 사이에서 폭력은 일상적인 일이 되며, 그들은 일상화된 폭력을 거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끔찍한 일이 실은 우리의 관계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가스라이팅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제안하며 사랑도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고발했던 오늘의 책, 로빈 스턴의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원제: The Gaslight Effect)입니다.
가스라이팅은 쉽게 말해 타인의 심리를 조작하여 타인을 지배하는 행동 과정을 뜻합니다. 이는 심리학자 로빈 스턴이 맨 처음 제안한 개념으로 영화 <가스라이트>의 제목을 본 따 이름 지었다고 하죠. 작중 남편으로 등장하는 그레고리는 그의 아내 폴라의 심리를 지속적으로 조작하려 합니다. 이를테면 그레고리는 본인이 물건을 숨겨놓고는 폴라에게 건망증이 있냐며 뒤집어 씌우는가 하면, 폴라가 집 안 가스등이 어둡다고 말하자 가스등은 어둡지 않다며 폴라를 과민한 사람으로 몰아갑니다. 결국 폴라는 자신의 판단력과 현실인지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점차 그레고리에게 의존하게 되죠. 즉 그레고리는 폴라의 심리를 조작하여 폴라의 정서를 지배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로빈 스턴은 이러한 그레고리와 폴라의 도식을 참고하여 가스라이팅이라는 개념을 명명합니다. 다시 말해 가스라이팅은 타인의 심리를 교묘하게 어지럽혀 타인을 정서적으로 조종하려 하는 행위라 할 수 있죠. 다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그레고리 혼자만의 힘으론 가스라이팅을 완성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로빈 스턴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즉 로빈 스턴에 따르면 가스라이팅은 어느 한 사람의 단독적인 소관이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의 공동작업이라는 이야기이죠. 예컨대 한 남자가 여자친구의 치마 길이를 지적하며, 짧은 치마는 헤픈 여자들이나 입는 것이라 발언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는 분명 말도 안 되는 억지이지만, 일부 여성들은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지키고자 남자친구의 의견에 동조하곤 하죠. 이처럼 자기 자신만 옳다고 생각하는 편협한 가해자와, 그의 인정과 사랑에 굶주린 피해자가 만날 때 비로소 가스라이팅은 완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오해하여 가스라이팅의 책임이 피해자에게도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가스라이팅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공동작업이라는 말뜻은 바꿔 말하면 가스라이팅을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피해자에게도 있음을 의미할 뿐이죠. 여하튼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가스라이팅은 우리 일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요?
로빈 스턴에 따르면 가스라이팅은 크게 세 단계—불신, 자기방어, 억압—의 양상으로 드러납니다.
먼저 1단계는 불신입니다. 이는 쉽게 말해 피해자가 지금껏 당연하게 믿어왔던 신념들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는 혼란의 단계를 뜻합니다. 예컨대 A라는 사람이 직장 상사로부터 ‘당신은 너무 과민한 것 같아요’라는 말을 지속적으로 듣는다고 해보겠습니다. 물론 A는 평소 자신을 과민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A가 화를 내거나 격앙된 적이 있었다면, 그건 마땅히 화낼 만한 사건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이었죠. 하지만 직장 상사의 지적이 반복될 경우 A는 내심 상사의 말이 사실일 지도 모른다며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A는 화가 나는 상황이 생겨도 과연 이때 화를 내는 것이 맞는 일인지, 혹은 자신이 그저 과민하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인지 혼란스러움을 경험하죠. 이처럼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흔들리며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가스라이팅의 1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2단계는 자기 방어입니다. 여기 해당하는 사람들은 타인의 평가에 적극적으로 부정하며 자신을 방어하려 시도하죠. 예컨대 B라는 사람이 자신의 연인에게 늘 게으르다며 구박을 듣는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때 B가 자신은 게으르지 않다고 상대를 설득하려 한다면 B는 이미 가스라이팅의 피해자입니다. 해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상대방의 신념에 동의하는 바이기 때문이죠. 즉 B가 스스로의 부지런함을 증명하려 노력한다면 게으름은 악덕이라는 연인의 신념을 B가 내면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설령 실제로 B가 게으르다 할 지라도 B의 연인은 이를 비난할 권리가 없죠. 또한 그들의 관계는 어느 한 쪽이 상대에게 지속적으로 해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비대칭적인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마지막 단계는 억압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피해자들은 이제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력을 완전히 부정하며 가해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기에 이릅니다. 즉 그들을 향한 가해자의 판단을 사실로 여기며 자신의 행동 양식을 가해자의 의견에 맞추기 위해 힘써 노력하는 단계이죠. 이 단계에서 피해자들은 자신의 판단력 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욕구와 감정마저 부정할 만큼 스스로를 억압합니다. 가해자에게 정서적으로 종속된 상태라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가스라이팅을 벗어나는 첫 번째 방법은 왜곡과 진실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사실 가스라이팅의 초기 단계만 하더라도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발언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피해자들은 상대방과 헤어지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가해자를 공감하게 되고 급기야 그들의 이야기를 사실로 믿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되는 거죠. 따라서 피해자들은 가해자로부터 비난에 시달릴 때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먼저 구별해야 하며, 만약 진실이 아니라면 절대 가해자에게 동조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두 번째 방법은 자신의 솔직한 감정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입장에 지나치게 이입하여 정작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곤 합니다. 이를테면 매일 밤 남편으로부터 가정 폭력을 당하는 아내가 도리어 남편을 동정하며 그의 입장을 변호하는 것처럼 말이죠. 마찬가지로 가스라이팅 피해자들은 가해자에게 필요 이상으로 공감하는 반면 자신의 감정이 상하는 것엔 둔감한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책임을 피해자 본인에게로 돌리며 가해자가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한 것은 피해자 본인의 탓이라고 받아들이는 식이죠. 따라서 가스라이팅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선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자신의 느낌과 감정에 주목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고로 건강한 관계는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수용과 용서, 그리고 화해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끝으로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는 마지막 방법은 가해자와의 관계를 포기할 각오가 돼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수의 가스라이팅 피해자들이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막상 가해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큰 이유는 가해자의 인정과 사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피해자들은 가스라이팅을 감내하면서까지 가해자와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죠. 하지만 이처럼 피해자가 가해자를 절대적인 존재로 여긴다면 영원히 가스라이팅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상대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순간 상대는 우리를 구속된 존재로 바라볼 테니 말이죠.
이로써 로빈 스턴의 책,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를 간단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로빈 스턴에 따르면 우리는 타인의 인정에 기대지 말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됩니다. 하지만 과연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타인의 인정 없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까요?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기의식은 오직 인정된 것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조금 어려운 말이지만 그의 논리를 천천히 따라가보겠습니다. 예컨대 A라는 사람 앞에 사과가 놓여 있습니다. 이때 A는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사과를 대상화함으로써 자신이 사과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할 수 있죠. 다시 말해 A의 의식은 사과를 대상화함으로써 발생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사과의 자리에 대상이 아닌 또 다른 의식, 가령 B라는 사람이 들어서면 어떨까요? 유감스럽게도 B는 앞서 A가 사과를 대상으로 여긴 것처럼 B 역시 A를 대상화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A는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하며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말죠. 이처럼 의식과 의식의 마주침은 상대로부터 우리가 대상화 될 위험성을 함축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레고리가 폴라를 조종할 수 있었던 것도 폴라의 보석을 뺏기 위한 목적, 즉 폴라를 하나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대상화 될 위험으로부터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헤겔은 상호인정의 원리를 제안합니다. 즉 서로가 서로를 고유한 자기의식으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설명이죠.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쪽만의 행위는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발생해야 하는 것은 오직 양쪽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헤겔의 설명에 따르면 A가 B를 대상화 할 경우 B가 A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인정이 될 수 없습니다. A에 의해 B가 대상으로 전락한다면, 이때 B는 자기 자신을 상실한 존재이며, 자기를 상실한 존재의 인정은 진정한 인정이 될 수 없기 때문이죠. 따라서 우리가 상대로부터 진정한 인정을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상대를 진정으로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상호 인정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둘 중 누군가의 인정은 거짓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이러한 맥락에서 가스라이팅의 피해자-가해자 관계는 상호인정이 이뤄지지 않는, 즉 일방적으로 인정을 주고 받는 관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가해자는 피해자를 대상화하며 피해자의 자기의식을 부정하고, 또한 피해자는 자신의 의식은 부정한 채 가해자에게만 의존하곤 하죠. 이러한 관계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둘 다 진정한 인정도, 진정한 사랑도 누릴 수 없습니다. 참된 사랑은 오직 상대의 자유로운 의식이 전제될 때만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상호인정의 원리는 곧 사랑의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사랑이란 상대를 하나의 자유로운 의식으로 기꺼이 인정하는 행위라 할 수 있죠. 아무쪼록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성숙한 자기의식에 이르기를 소망하며 글을 마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