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유튜브 해설: https://www.youtube.com/watch?v=IuGZb5ue7HA&t=91s
나 혼자 꿈을 꾸면 그건 한낮 꿈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새로운 현실의 출발이다.
-훈데르트 바서-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작 『이미지의 배반』은 <이미지>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대단히 철학적인 작품입니다. 이 그림의 철학성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바로 그림 속 구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는 메시지이죠. 아마도 이를 처음 접한 관객은 일말의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누가 보기에도 파이프임이 틀림없는 그림을 정작 화가는 파이프가 아니라고 설명하니 말이죠. 하지만 마그리트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림 속의 파이프는 파이프로서의 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는, ‘물감들의 질서 있는 조합’에 불과하죠. 즉 마그리트는 이미지를 실재와 혼동하는 관객들에게 <이미지의 비실재성>을 폭로한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러한 이미지의 비실재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미지를 실재한 것으로 믿으려는 관객의 충성심입니다. 이를테면 한껏 소설에 심취한 독자들은 결코 그것이 허구라는 의심을 품지 않고 독서에 열중하죠. 영국의 비평가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는 이를 <불신의 유예>라고 표현합니다. 가령 액션 영화에 흠뻑 몰입한 관객은 ‘인간이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어?’와 같은 불신을 접어두고 영화의 내적 질서로 빠져들죠. 다시 말해 관객은 허구에 대한 불신을 유예함으로써 비로소 예술 세계로 초대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불신의 유예, 혹은 <허구를 향한 믿음>이 예술 뿐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된다면 어떨까요? 인류를 최상위 포식자로 만든 힘은 <가상의 실재>에 대한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오늘의 책,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입니다.
생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계통분류학에서는 흔히 종속과목강문계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분류법에 따르면 호랑이는 동물계 척삭동물문 포유동물강 식육목 고양이과 표범속 호랑이(종)로 분류되죠. 표범속에 속하는 또다른 동물로는 호랑이 외에도 사자, 표범, 재규어 등 다양한 종이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머나먼 옛날 인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현생 인류를 가리키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용어는 호모속에 속하는 사피엔스(종)를 뜻하는 것인데, 그 외에도 에르가스터, 에렉투스, 네안데르탈렌시스 등 다양한 종의 인간이 있었다는 주장이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사피엔스를 제외한 다른 인간종은 모두 멸종했으며, 나아가 사피엔스는 지구상 가장 강력한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과연 사피엔스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을까요?
하라리는 그 첫번째 원인으로 인지혁명을 제안합니다. 하라리에 따르면 인지혁명이란 수 만 년 전 사피엔스의 사고방식이 혁신적으로 변화한 사건으로, 그 결과 사피엔스는 탁월한 <언어 능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물론 다른 동물들도 그들만의 언어로 의사소통을 수행할 수 있지만 사피엔스의 언어만큼 정교하지는 않습니다. 사피엔스는 섬세한 언어능력을 발휘하여 동료 사피엔스와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죠. 하지만 사피엔스의 언어가 가지는 특이성은 단지 정교함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하라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컨대 사피엔스의 언어는 전설이나 신화, 종교 등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들은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관념적인 대상이죠. 다시 말해 사피엔스는 언어를 통해 신화(존재하지 않는 것)를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며, 또한 언어를 통해 그것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다른 사피엔스와 협력하고 싶다면 그에게 신화를 들려주고, 그 신화를 믿게 하면 됩니다. 그리하여 공통의 신화를 믿게 된 사피엔스들은 서로 협력하여 집단을 이룰 수 있죠. 하라리에 따르면 그들의 신화는 <허구>적인 속성을 지닙니다. 다만 의미하는 허구란 <거짓말>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거짓말은 거짓임을 인지하는 상태에서 꾸며내는 말이라면, 허구란 정말 그렇다는 믿음 속에서 내뱉는 말이죠. 즉 사피엔스에게 허구란 강력한 믿음 속에서 구성되는 <가상의 실재>이자 <상상의 질서>라 할 수 있습니다.
언어혁명을 통해 신화를 공유하게 된 사피엔스는 다른 사피엔스들과 협력하여 집단을 이루게 됩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집단의 규모는 더욱 커졌고,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살게 되자 식량이 부족해졌죠. 이때 농업혁명이 등장합니다. 농경에 눈을 뜨게 된 사피엔스는 수렵과 채집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이동생활을 접고, 한 곳에 머무르며 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기르는 정착생활을 시작하죠. 이러한 농업혁명의 특이점은 단위토지당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식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그 결과 사피엔스의 개체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식량이 증가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삶의 질이 향상됐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식량은 늘었으나, 개인의 몫은 줄었기 때문이죠. 그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계급>이라는 신화에 있습니다. 농업혁명 이후 사피엔스 집단은 그 규모가 커짐에 따라 그들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고 중재할 권력과, 또 막대한 양의 식량을 나누기 위한 구심점이 필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계급이라는 신화는 그러한 역할들을 효과적으로 수행했죠. 요컨대 계급은 엘리트 계층의 권력을 정당화해주는 이념적 수단이 되었으며, 하층민들은 자신이 태생적으로 천하다는 계급 신화를 받아들이며 터무니없이 적은 식량을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만약 계급 신화를 의심하는 하층민이 있다면 지배 세력은 군사력을 이용하길 주저하지 않았죠. 물론 폭력만을 앞세우는 신화는 오래도록 유지될 수 없습니다. 보다 강력한 신화는 <상상의 질서>를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농업혁명 이후 대규모 사회가 번성함에 따라 더욱 강력한 신화가 요구됩니다. 하라리는 그 대표적인 신화로 다음의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번째는 화폐입니다. 대규모 사회에서 사피엔스들의 이해관계는 대단히 복잡해졌고, 따라서 물물교환만으로는 거래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발생했습니다. 그 결과 사피엔스는 수없이 얽힌 이해관계를 간단히 계산하기 위해 단일한 기준을 찾게 되죠. 그것은 바로 돈입니다. 돈은 내재적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는 점에서 물물교환과 커다란 차이점을 갖습니다. 예컨대 사과 열 개와 닭 한 마리를 물물교환할 경우 이들은 모두 식량으로서의 내재적 가치를 지닙니다. 그에 반해 돈은 먹을 수도 없고 땅에 심어 키울 수도 없는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은 물물교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편리하고 보편적인 거래수단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갖고 싶어하는 것들 중에 돈으로 구매하지 못 할 것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우리와 거래하는 상대방도 돈을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과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은 많지만 돈을 싫어하는 사람을 찾기는 어렵죠. 즉 가치 없는 종잇조각을 가치 있다고 믿는 <상상의 질서> 속에서 돈은 대규모 경제 공동체를 형성하는 힘을 갖게 됩니다. 두번째는 제국입니다. 제국이란 다른 민족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탄력적으로 국경을 확대해 나가는 정치적 통합체입니다. 예부터 제국의 엘리트들은 제국을 확장하는 이유가 정복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야만성 때문이 아니라 세계의 복지를 위한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가령 기원전 3세기의 마우리아 제국은 부처의 가르침을 세계에 널리 전파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았으며, 무슬림의 칼리프들은 대예언자 마호메트의 계시를 세상에 퍼뜨려야만 한다고 믿었죠. 이러한 제국에 굴복한 피정복민들에게는 제국의 새로운 문화가 이식되었으며, 그 결과 예부터 존재했던 수많은 문화들은 하나로 통합되기 시작했습니다. 소수 지배 세력들의 이데올로기가 전 세계의 수많은 부족과 문화 다양성을 몇 개의 커다란 제국으로 뭉쳐 놓은 것입니다. 끝으로 세번째는 종교입니다. 농업혁명 이후 농사를 시작한 사피엔스들은 세상을 통제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습니다. 한해 농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적절할 때가 알맞은 양의 비가 내려야 하지만, 자연은 사피엔스의 기대를 어긋날 때가 많았죠. 따라서 사피엔스는 자연을 다스리는 능력이 스스로에게 없음을 깨닫고 초월적인 신에게 예배와 제사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이리하여 사피엔스는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며 커다란 종교 공동체를 이루는 데 성공하죠.
앞선 내용을 간추리면 사피엔스는 인지혁명을 통해 허구를 지어내는 능력을 갖게 됐고 이는 사피엔스로 하여금 대단위의 협력을 가능케 했습니다. 또한 대규모의 사피엔스들이 모이게 되자 안정적인 식량 공급이 요구되었으며 이는 농업혁명을 통해 해결되었죠. 나아가 농업혁명은 식량 생산량을 크게 늘리며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를 초래했습니다. 그 결과 사피엔스는 수많은 사피엔스들을 효과적으로 결속하기 위해 화폐와 제국, 그리고 종교라는 신화를 창조하죠. 이리하여 사피엔스는 커다란 <상상의 질서>를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라리에 따르면 이 같은 사피엔스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마지막 혁명은 바로 과학혁명입니다. 이는 약 1500년쯤 서유럽을 중심으로 발달한 근대과학의 형성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과학혁명 이후 사피엔스는 오직 과학적인 것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과학만능주의적 사고를 내재하게 됩니다. 바꿔 말하면, 오늘날 사피엔스는 세상의 모든 현상들이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보는 태도를 숭배합니다. 만약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이 불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인간의 과학적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설명되죠. 이러한 점에서 과학혁명은 <무지의 혁명>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무지의 혁명이란 인간은 아직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다만 과학을 통하여 밝혀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과학 혁명은 인류의 역사가 계속 발전할 것이라는 진보주의적 관점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죠. 예컨대 인류는 늙지 않는 법을 아직 모를 뿐이며 과학 기술을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점에서 현대 과학은 항상 <기술>과 관계 맺습니다. 기술이야말로 세상을 진보시키는 힘을 갖기 때문이죠. 다만 염려스러운 점은 여기에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까지 결탁하여 모종의 공모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권력자들은 자신의 힘을 활용하여 자원을 차지하고자 경쟁하고, 획득한 자원 중 일부는 다시 과학에 투자됩니다. 투자에 힘입은 과학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또다시 권력에 힘을 보태고 이러한 과정은 끝없이 반복되죠.
이러한 공모 속에서 과학의 핵심가치는 진리성이 아니라 유용성입니다. 기술 과학만이 더 강한 권력에 이바지할 수 있고, 따라서 권력은 유용한 기술에만 투자하기 때문이죠. 하라리는 이처럼 유용성으로만 추동되는 현대 과학의 미래가 천국일수도, 혹은 지옥일수도 있다고 전망합니다. 참고로 하라리에 따르면 현대 과학이 연구하는 유용한 기술의 목록에는 늙음을 모르는 불사의 인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역사는 신화를 지어내는 것이 고작이었던 사피엔스가 마침내 스스로 신이 되기까지의 여정이었다고 정리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리하여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간단히 정리해보았습니다. 하라리에 따르면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는 허구가 실재를 장악한 <상상적 질서>일지도 모릅니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화폐나, 법치주의가 추구하는 정의, 혹은 과학주의의 토대가 되는 수학적 객관성이라는 관념도 실은 허구적 신화에 불과할지 모르죠.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인간은 실재가 아닌 이미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이는 마치 깨어나지 않는 꿈과 같습니다. 영원히 밝혀지지 않는 허구는 결국 진리와 다름없으니 말이죠. 책의 말미에서 하라리는 다가올 시대의 초인은 생명을 창조하고 개량할 수 있으며 심지어 업그레이딩이 가능한, 즉 현생 인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상상했습니다. 심지어 2100년이 되면 현생 인류는 사라지고 기계와 결합된 불멸의 사이보그형 인간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전망하죠. 그런데 이에 앞서 19세기 철학자 니체가 상상했던 초인은 하라리가 상상한 초인의 모습과는 크게 다릅니다. 니체에 따르면 초인이란 사회의 담론에 종속되지 않는, 그 자신만의 도덕률을 창조할 수 있는 자로 설명됩니다. 예컨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수많은 신화를 이식 당합니다. 가령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는 물질의 신화, 승자가 모든 걸 가져도 좋다는 승자독식의 신화, 혹은 우리 모두를 성장시켜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는 자기계발의 신화 등을 말이죠. 니체적 초인이란 이러한 신화들을 기꺼이 의심하는 존재입니다. 그동안 불신을 유예하며 살아온 삶의 관성을 버리고 사회가 강요하는 신화들을 과감하게 불신하는 거죠. 요컨대 불신의 유예가 아니라, 신뢰의 유예를 제안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시대가 만들어낸 신화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기만의 신화를 써내려가는 자유로운 사피엔스를 응원하며 글을 마칩니다.
사피엔스의 언어가 가지는 특이성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전달하는 능력>에서 찾은 유발 하라리의 관점은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의 말을 떠오르게 합니다. 소쉬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가령 '바라만 봐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설레는 뜨거운 마음'을 기의(시그니피에)라 가정하자면, 기표는 이를 표시하는 언어 기호, 즉 ‘사랑’이라는 두 글자입니다. 이 둘의 관계가 자의적이라는 소쉬르의 말은 쉽게 말해 우리의 뜨거운 마음이 반드시 ‘사랑’이라고 불릴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이죠(어떤 드라마에서는 '사랑' 대신 '무지개'라는 말로 바꾸자고 제안하는 장면도 있더군요). 하지만 어찌됐든 우리는 ‘사랑해’라는 상대방의 말에서 감동을 느끼곤 합니다. 이는 ‘사랑’이라는 두 글자가 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기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불신을 유예할 때 가능한 거죠. 만약 우리가 모든 단어들에 대해 그것의 진의를 따지고 들자면 정상적인 의사소통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즉 우리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에 대한 불신을 유예함으로써, 바꿔 말하면 언어의 허구성을 일정 부분 인정함으로써 의사소통에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라리에 따르면 인간의 언어 능력은 크게 두 가지 경쟁력을 갖습니다. 첫째는 본문에서도 소개했듯 많은 사람, 혹은 낯선 사람과의 협력을 가능케 하는 것이며, 둘째는 사회적 행태의 급속한 혁신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사피엔스를 제외한 다른 동물들의 행태는 변화하기 위해 수없이 긴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동물의 행태는 개체의 의지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유전 정보에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동물의 행태는 유전 정보가 바뀌지 않는 한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신화를 따르기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급속한 전환이 가능합니다. 독재가 무너진 자리에 민주주의 이념이 보편화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죠. 하라리는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1789년 프랑스인들은 왕권의 신성함이라는 신화를 믿다가 거의 하룻밤 새 국민의 주권이라는 신화로 돌아섰다.”
하라리는 농업혁명을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고 평가합니다. 요컨대 농업혁명은 사피엔스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다는 설명입니다. 하라리에 따르면 1)농업혁명은 사피엔스가 그간 진화해 온 신체적 특질을 역행하는 노동을 요구합니다.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시절 사피엔스는 직립 보행과 달리기에 유리한 방향으로 유전적 진화를 거쳤지만, 농업은 사피엔스로 하여금 잡초를 뽑기 위해 온 종일 허리를 숙이도록 했고 이로써 사피엔스는 디스크나 관절의 고통을 호소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2)또한 농업혁명은 그동안 사피엔스가 수렵·채집 시절 누렸던 다양한 먹거리로부터 벗어나 오직 몇 안 되는 곡물류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영양상의 불균형을 초래합니다. 3)뿐만 아니라 농사는 가뭄이나 재해 등에 매우 취약했으며, 만약 이로 인해 한해 농사를 망치기라도 하면 사피엔스는 집단아사를 면하기 힘들었습니다. 4)그리고 결정적으로 농업혁명은 비록 식량의 풍요를 이뤄내긴 했으나 이로 인해 사피엔스의 수는 폭증했고, 따라서 개별 사피엔스가 누리는 식량의 양은 줄었습니다. 그렇다면 사피엔스는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 농사에 굳이 손을 댔을까요? 이에 대해 유발 하라리는 모종의 문화적인 코드가 선행했을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레 추측합니다. 예컨대 괴베클리 테페와 같은 대규모의 종교적 상징물을 건축하고자 사람들이 한 곳에 머무르게 됐고, 이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게 되자 안정적인 식량 공급원을 만들기 위해 농사를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죠. 이러한 설명이 맞다면 사피엔스는 육체의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신체적 본능보다 종교적 목적에 부합하고자 하는 관념적 의지를 실현하는 고차원적인 존재로 설명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라리에 따르면 사피엔스는 농업혁명 이후 훨씬 더 자기중심적인 존재로 변모합니다. 요컨대 사피엔스는 농사를 짓기 위해 정착 생활을 해야 했고, 따라서 이동생활을 했을 때보다 훨씬 더 좁은 생활 반경 안에 머무릅니다. 이로써 '내 집', '내 농작물', '내 곡식' 등의 개념이 생기기 시작했고, 사피엔스들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그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배제하기 시작합니다. 단적인 예로 오늘날 지구에는 사피엔스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대형 포유류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혹자들은 이를 기후의 영향으로 설명할지도 모르지만 과거 사피엔스의 행적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사피엔스의 발이 닿는 대륙마다 머지 않아 대형 포유류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반면 사피엔스의 생존에 필요한 가축들은 수 억, 수십 억 마리를 가축화하고 있죠. 하라리는 말합니다. "‘내 집’에 대한 집착과 이웃으로부터의 분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자기중심적이 된 존재의 심리적 특징이 되었다.”
우리가 상점에서 돈을 주고 원하는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이유는 거래 상대방이 돈의 가치를 인정해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러한 상대방의 인정, 즉 돈의 가치를 향한 상호 간의 '믿음'이 돈에게 위력을 부여합니다. 예컨대 중세 그리스에 사는 사람들이 '금'의 빛깔에 매혹되어 밤이고 낮이고 금광을 캐러 다닌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반면 인도에 사는 사람들은 '금'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 경우 금은 그리스에서는 높은 가격으로, 인도에서는 저렴한 가격으로 거래될 것입니다. 따라서 영리한 인도 상인들은 인도에서 금을 구매하고 그리스에 가서 판매를 하겠죠. 즉 인도 사람들은 금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지만 거래 상대방이 금의 가치를 인정하므로 거래는 성사됩니다. 이러한 과정이 지속되면 머지않아 인도에 사는 사람들도 금의 가치를 인정하게 됩니다. 하라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들이 항상 돈을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 역시 항상 돈을 원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곧 당신이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모든 것과 돈을 교환할 수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