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인간으로 살아가기』, 최광진
*유튜브 해설: https://www.youtube.com/watch?v=LkLSgp7G6TA&t=1s
“아름다움은 쓸모있는 것보다 더 쓸모있다.”
The beautiful is as useful as the useful. (···) More so, perhaps.
(『레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
고전 미학의 출발을 알린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인간의 본성(혹은 관심)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하고자 하는 <이론적 관심>과,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를 파악하는 <윤리적 관심>, 그리고 아름다운 것에 끌리는 <미적인 관심>으로 구성되죠. 우리는 이를 간추려 <진선미>라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은 진, 선, 미라는 각각의 기능을 통해 참과 거짓, 선과 악, 그리고 미와 추를 판단할 수 있는 거죠.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사회적 차원으로 점차 발달하면 과학(진)과 종교(선), 예술(미)라는 문화를 꽃피우게 됩니다.
다만 여기서 유감스러운 점은 오늘날 현대 사회가 오직 과학의 가치에만 치우쳐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적 태도만이 숭배되고, 윤리나 아름다움에 대한 고민은 소수의 철학자들 몫으로만 남게 되었죠. 과연 이러한 진선미의 불균형은 현대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요? 미학적 인간상을 통해 새로운 행복의 가능성을 제안하는 오늘의 책, 최광진의 『미학적 인간으로 살아가기』입니다.
서양 철학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플라톤은 인간의 <이성>을 무척이나 강조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불완전한 욕망에 물든 존재이며, 따라서 이성을 통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되죠.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영혼의 성숙을 위해서는 이성이라는 마부가 의지와 욕망이라는 말을 이끌어야 한다.”즉 인간의 영혼은 이성과 의지(기개), 욕망으로 구분되며, 바람직한 인간은 이성을 통해 의지와 욕망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이성은 진에 대응하며, 의지는 선, 그리고 욕망은 미와 짝을 이룹니다. 즉 플라톤은 진선미를 <상생의 관계>가 아닌 <우열의 관계>로 규정함으로써 오늘날 이성중심주의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죠.
시간이 흘러 근대에 이르게 되자 이성중심주의는 마침내 과학이라는 문화로 꽃을 피웁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과학은 존재했지만, 1500년 이후 서유럽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근대과학이 발달했고 그에 따라 사람들은 <과학적 사고>를 보다 깊이 내면화하게 되었죠. 그 결과 오늘날 현대인들의 의사소통은 늘 과학적 사고 위에서 수행됩니다. 만약 누군가 창밖에 쏟아지는 폭우를 바라보며 “하늘이 노하신 게 틀림없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가 농담을 하고 있거나, 혹은 광인이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비과학적 사고>는 현대인의 주류 의사소통 방식으로 채택되기 어렵다는 이야기이죠. 반면 과학을 향한 현대인의 기대는 실로 엄청납니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지구 밖에 또다른 거점 행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심지어 불사의 인간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 희망합니다. 즉 현대 사회는 과학만이 세상을 진보하게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점차 과학만능주의에 젖어 들고 있죠. 그렇다면 과연 이 같은 과학만능주의는 현대인의 행복을 절대적으로 보장해줄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한국의 미학자 최광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즉 그에 따르면 현대인의 불행의 원인은 <과학에 의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만 의지하는 데> 있습니다. 요컨대 진만을 중시하고 선과 미는 경시하는 잘못된 균형 관계가 문제라는 설명이죠. 그렇다면 과연 과학을 향한 맹신과 현대인의 불행은 대체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 인간은 과학만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자고로 인간은 보편적인 동시에 고유한 존재입니다. 예컨대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기도 하고, 무엇을 할 때 행복하냐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기도 하죠. 다시 말해 인간은 <객관적 보편성>과 더불어 <주관적 특수성>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 둘의 균형을 통해 삶의 안정과 행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가령 남들이 모두 따르는 보편적인 삶을 모방함으로써 모종의 안정감을 느끼기도 하고, 반대로 남들과는 다른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커다란 행복감을 경험하기도 하죠. 따라서 만족스러운 삶이란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에서 자기만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에만 치우친 인간은 이 둘(보편성/특수성)의 균형을 쉽게 잃어버릴 지 모릅니다. 과학은 절대적으로 불변하는 <객관적 법칙>을 다루는 학문이며, 따라서 개인의 <주관적 가치>가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인간은 과학적 이성을 발휘함으로써 객관적 보편성의 욕구를 충족할 수는 있으나 이때 주관적 특수성의 욕구는 결핍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특수성을 되살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최광진은 <형식>을 대하는 태도를 기준으로 인간을 네 종류로 구분합니다. 첫 번째는 <과학적 인간>입니다. 이는 ‘형식을 만드는 사람’을 뜻하며, 즉 무질서와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보편적 질서와 형식을 발견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과학적 법칙을 비롯하여 사회의 법과 제도, 종교적 교리, 이데올로기 등을 정리하며 학문의 발전을 이끕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의 질서를 확립하고, 물질 문명을 건설함에 있어 꼭 필요한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정치적 인간>입니다. 이들은 ‘형식을 이용하는 사람’으로서, 즉 과학적 인간이 발견한 형식을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순수한 이론과 형식을 앞세워 전쟁의 명분으로 삼거나 혹은 독재 권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노예적 인간>입니다. 이들은 ‘형식을 추종하는 사람’으로서, 즉 세상의 규칙과 관습에 아무런 비판 없이 순응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말 그대로 주인에게 복종하는 노예와 같이 형식의 권위에 복종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네 번째는 <미학적 인간>입니다. 이는 ‘형식을 자유롭게 하는 사람’으로서, 즉 창조성을 발휘하여 기존의 관습과 형식을 유연하게 풀어주는 존재입니다. 또한 이들은 남들이 만든 규범과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지 않고 자기만의 고유성을 깨닫는 삶을 살아가죠. 이처럼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삶>을 체험하게 됩니다. 국어학자 조현용에 따르면 <아름답다>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자기답다>라는 말에 가깝다고 설명됩니다.
즉 아름답다는 것은 곧 자기답다는 것이며, 또 자기다운 삶이란 스스로의 <특수성>을 발견해 나가는 삶이라 할 수 있죠. 요컨대 헤르만 헤세의 격언—"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을 빌리자면, 온전히 자기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비로소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이 같은 미학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요?
: 미학적 삶을 어떻게 실천할까?
미학적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창조성>에 있습니다. 이들은 기존의 규범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만의 개성으로 창조적인 삶을 개척하죠. 저자에 따르면 창조의 기본 공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창조란 추구해야 하는 본질이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하고, 그로부터 관습을 덜어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위대한 예술가들은 예술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먼저 정립하고, 이에 걸림돌이 되는 관습에 저항함으로써 자기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죠. 이처럼 우리는 본질에 대한 사유 능력과, 관습에 대한 문제의식을 통해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미학적 인간은 이러한 창조성을 발휘하여 자기다운 삶, 즉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되죠. 이를 이해함에 있어 장기하의 음악이 좋은 예시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 매체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장기하에게 음악의 본질은 <말> 자체에 있습니다("말에 이미 있는 음악성을 그대로 음악에 옮기는 그런 것에 관심이 있어서 해오고 있습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 인터뷰 중). 따라서 그는 우리의 말 속에 담긴 운율과 서사를 고스란히 음악으로 재현하고 싶어 하죠. 이러한 견지에서 그의 작품들을 연대기순으로 들어보면 과거에서 현대로 올수록 관습과 형식을 덜어내고 있음이 선명하게 들리실 겁니다. 특히나 가장 최근에 발표된 그의 앨범 <공중부양>은 중력(관습)으로부터 해방된 그의 자유로운 미학 정신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죠. 이처럼 우리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창조성을 발휘함으로써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기다운 삶, 즉 미학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미학적 인간으로 살아가기』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봤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미학적 인간이란 관습과 형식으로부터 벗어나 자기다운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습에 얽매이지 않기 위한 보다 실천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저자는 그 방법론으로 <판단중지>를 제안합니다. 이는 희랍어 <에포케Epoche>에 해당하는 것으로, 즉 대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라는 태도를 견지해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특정한 관습이나 형식을 통해 대상을 이해하고 나면 대상의 본질을 전부 이해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죠. 예컨대 오늘날 일부의 사람들은 상대방의 MBTI를 알고 나면 상대방의 성격을 완전히 파악했다는 환상에 빠지곤 합니다. 물론 MBTI라는 <관습>은 타인의 성격을 이해함에 있어 매우 유용한 도구일 수 있지만 그 자체로 타인의 <본질>이 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관습에 대한 맹신을 잠시 내려놓고 <아무 것도 모른다>라는 태도로 대상의 본질을 바라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요컨대 <판단 없는 호기심>으로 대상을 바라볼 때만 대상을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있으며, 또 상대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죠. 레바논의 작가 칼릴 지브란은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삶의 유일한 목적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일종의 기다림이다.” 요컨대 아름다움은 우리 삶의 여가를 위한 찰나의 취미 생활이 아니라 삶의 목적 그 자체라는 설명입니다. 따라서 만약 일상 속에서 아름다운 순간을 발견하게 되거든 훗날의 감상으로 미루지 말고,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분석할 가치가 없다는 과학적인 이유로, 이용가치가 없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돈이 되지 않는다는 노예적인 이유로 아름다움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움은 삶의 수단이 아닌 목적이니 말이죠. 아무쪼록 기다림의 시간마저 아름다움의 일부가 되길 응원하며 포스팅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