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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Dec 10. 2023

약하니까, 악한 거야

「군주론」, 마키아벨리

 https://www.youtube.com/watch?v=sOnXDw-MDT4






19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법학자 옐리네크(Georg Jellinek)는 말합니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다.” 그의 말처럼 법은 인간이 따라야 할 윤리적 요청 가운데 최소한의 필수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법이 전혀 도덕적이지 않다면 시민들이 법을 준수할 동기란 사법기관의 강제력 뿐일지도 모르죠. 흥미롭게도 이처럼 법적 질서가 윤리적 당위성을 끌어안은 것은 꽤나 아득한 과거의 일입니다. 예컨대 고대 서양에서는 윤리적 흠결이 없는 철인에 의한 철인정치를 꿈꿨고, 동양의 유교철학은 덕을 바탕으로 한 덕치주의를 내세우며 너그럽고 어진 왕이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죠. 이처럼 오랜 시간 도덕은 정치에 내재하여 정치의 수단인 동시에 목표이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과감하게 인간의 악한 본성을 고발하며 덕치의 무용함을 주장한 사람이 있습니다. 냉혹한 현실과 인간의 비정함을 분석하며 정치와 윤리의 분리를 선언한 오늘의 책,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입니다.




1. 

프루덴차와 네체시타

: 『군주론』의 탄생


마키아벨리가 태어난 15세기 피렌체는 그야말로 정치적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시기입니다. 대내적으로는 메디치 가문의 집권과 추방, 복권이 반복되며 통치 기반이 위태로이 흔들렸고, 대외적으로는 이웃나라와의 공방전, 프랑스의 침공 등으로 몸살을 앓았죠. 마키아벨리는 이처럼 힘없는 조국의 아픈 현실을 목격하며 보다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 피렌체의 부국강병을 이뤄주기를 소망합니다. 이러한 바람으로 그는 좋은 군주란 무엇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군주론』이 탄생하게 되죠. 『군주론』을 이해하기 위해 살펴볼 첫번째 키워드는 프루덴차(prudenzia)와 네체시타(Necessita)입니다. 먼저 프루덴차란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읽어내어 최선의 선택지를 분별할 수 있는 인식 능력으로, 쉽게 말해 실천 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서 무엇이 자국에 이익이 되고 손해가 되는지를 명민하게 판단하는 능력이죠. 또한 네체시타란 도덕적 판단 대신 효용성을 기준으로 삼은 당대의 필요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통 시대정신, 혹은 역사적 필연성 등으로 번역됩니다. 핵심은 도덕적 선악이 아니라 효용성과 유용성입니다. 설령 도덕적으로 악한 행동일지라도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불가피한 역사적 필연성을 뜻하죠. 마키아벨리가 제시하는 좋은 군주란 프루덴차를 발휘하여 네체시타를 읽어내는 군주입니다. 다시 말해 탁월한 군주는 다양한 정치적 선택이 주어졌을 때 각 선택지들이 초래할 이익과 손해를 예리하게 분석하여 국가의 생존을 위해 어떠한 선택이 필연적인지를 읽어내야 하죠. 마키아벨리는 말합니다. “’어떻게 사는가’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매우 다른 일이므로 ‘실제로 행해지는 일’을 무시하고 ‘해야 할 일’을 지향하는 사람은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파멸을 배우게 됩니다.” 즉 마키아벨리는 도덕적 당위보다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중시하며, 실질적인 필요(네체시타)를 읽어낼 수 있는 실천 이성(프루덴차)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마키아벨리는 혹자들의 비난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도덕적 당위보다 현실적 이해관계를 중시하는 마키아벨리의 태도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잔혹한 행동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다가오기 때문이죠.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말합니다.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군주는 상황에 따라서 선하지 않을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즉 악은 ‘필수’가 아닌 ‘필요’이며 탁월한 군주란 악이 불가피한 상황(네체시타)을 예리하게 알아챌 수 있는 프루덴차를 지닌 군주라 할 수 있습니다.





2. 

비르투

: 군주의 자질


앞서 살펴보았듯 탁월한 군주란 명민한 이성(프루덴차)으로 정치적 필요(네체시타)를 읽어내는 군주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군주는 단지 필요를 읽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읽어낸 ‘필요’를 과감히 실행할 수 있는 ‘기개’가 필요하죠. 이를 이해하기 위해 살펴볼 두 번째 키워드는 ‘비르투(virtu)’와 ‘포르투나(fortuna)’입니다. 먼저 비르투란 기본적으로 역량과 덕을 뜻하는 것으로 지도자의 결단력과 용기 등이 해당합니다. 앞서 살펴본 네체시타 개념과 연결시킨다면, 비르투란 상황에 따라 어떤 선택이 필요한지를 판단하여 끝까지 밀어붙이는 능력이라 할 수 있죠. 따라서 비르투는 훈련을 통해 개발할 수 있는 통제가능한 영역입니다. 반면 포르투나는 운명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저 우리에게 주어졌을 뿐 노력을 통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죠.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둘 중 비르투(역량)를 중시합니다. 그가 애타게 찾은 군주는 위태일로에 놓인 피렌체의 운명에 체념하고 좌절하는 군주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운명을 극복하는 군주였으니 말이죠. 그리하여 마키아벨리는 우연의 개입(포르투나의 특성)을 최소화하여 운명을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는 선택을 장려합니다. 가령 마키아벨리는 용병을 멀리하고 자국 군대를 양성하라고 주문합니다. 왜냐하면 용병은 충성심이 아니라 돈에 따라 움직이므로 중요한 전쟁에서 통제에 따르지 않을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시민들이 두려워하는 군주가 되어라(“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훨씬 안전합니다”)고 말합니다. 타인의 사랑을 받는 것은 상대방의 선택이므로 우연적 특성인 반면, 타인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은 노력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마키아벨리는 너그럽기보다 인색하라거나(“당신이 너그럽다는 평판을 받게끔 처신한다면 당신에게 해가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자비롭기보다 잔인하라, 심지어는 때에 따라 시민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말라고 말합니다(“현명한 군주는 그에게 불리할 때 약속을 지킬 수 없으며, 또 지켜서도 안 됩니다”). 이는 모두 우연의 개입을 최소화하여 포르투나를 극복하고자 하는 전략이죠. 즉 위대한 군주란 불확실한 상황을 통제하는 역량(비르투)을 발휘하여 변화무쌍한 정치 환경의 우연성을 통제하고 운명(포르투나)을 극복하는 군주입니다.





3. 

이미지

: 권력의 유지


마키아벨리가 제안하는 군주는 (도덕적으로) 선한 선택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필요한 선택’을 내리는 군주이며, 또 정치 환경의 우연성을 통제할 수 있는 역량 있는 군주입니다. 다만 이때 문제는 그러한 군주는 민중의 지탄을 받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국익을 위한다 할지라도 잔혹하고 두렵기만 한 군주의 비전을 일반 민중이 납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죠.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말합니다. “군주는 (좋은) 성품을 실제로 갖출 필요는 없지만, 갖춘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군주가 그런 성품을 갖추고서 늘 그렇게만 실천하는 것은 해롭지만, 그런 성품을 갖춘 것처럼 보이는 것은 유용합니다.” 즉 마키아벨리는 ‘이미지’를 강조합니다. 쉽게 말해, 민중의 미움을 사지 않도록 도덕적인 면모를 연출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키아벨리가 이 같은 ‘연출의 정치학’을 내세운 속내는 무엇보다도 권력의 유지를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봤듯 마키아벨리식 군주는 결과적으로는 국가 이익에 이바지할지라도 그 과정에서는 때때로 잔혹한 정치적 선택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일반 시민들은 그러한 선택이 국가에 가져오는 실질적인 이익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시민들은 그저 눈에 보이는 군주의 행동이 도덕적이냐 잔혹하냐 같은 단순하고 눈에 보이는 기준만으로 군주를 평가하기 마련이죠. 그런데 만약 합리적인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훌륭한 군주가 자칫 폭군으로 비쳐 축출된다면 이는 크나큰 국가적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시민의 미움을 사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도덕적 연출을 제안하게 되죠. 가령 그는 부정적인 결정은 타인에게 양도할 것을 권유하며, 시민의 재산과 부녀자를 강탈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또한 시혜 행위는 천천히, 가해 행위는 단번에 실시하여 시민의 지지를 받을 것을 조언합니다. 즉 마키아벨리는 네체시타와 비르투를 통해 ‘실제로 좋은 군주’를 고민하는 동시에 그러한 군주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편으로 ‘이미지’, 즉 ‘좋은 군주’의 정치적 연출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책의 핵심은 포르투나에 좌절하지 말고 비트루를 발휘하여 비로소 운명을 극복하는 군주가 되라는 이야기이죠. 흥미롭게도 이 같은 『군주론』의 메시지는 약 3세기가 지나 독일의 철학자 니체를 통해 다시 재현됩니다. 가령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전통 도덕을 비판하며 자기만의 도덕을 스스로 창조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도덕의 절대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마키아벨리의 네체시타 개념을 연상하게 하죠. 또한 니체는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 즉 ‘힘에의 의지’를 강조하였는데 이는 포르투나를 극복하기 위해 마키아벨리가 제시한 비르투를 떠오르게 합니다. 즉 두 사람은 주어진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결정론에 반기를 들며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능동적인 인간을 꿈꾼 것입니다. 다만 둘은 운명을 대하는 태도에서 다소 차이를 보입니다. 예컨대 마키아벨리는 운명의 여신을 때려눕히라며 운명을 ‘극복’하는 것에 방점을 두지만, 니체는 극복되지 못한 운명일지라도 그 자체로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라고 이야기하죠. 아무쪼록 운명을 극복하는 군주의 비르투와 더불어, 극복되지 못한 운명마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아모르파티를 응원하며 글을 마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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