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윰 Jul 22. 2023

"공감은 그만"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브래디 미카코

https://www.youtube.com/watch?v=Ao6Wc5Qzkr8&pp=ygUM7Zic7Jyw7LGF67Cp


“그들이 원하는 공감을 주어라. 그러면 그들은 당신을 사랑할 것이다.” 데일 카네기의 저서 『인간관계론』의 한 구절입니다. 카네기의 책은 공감을 통해 성공한 이들의 삶을 수차례 조명하며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하죠. 이러한 카네기의 명성 덕분인지 오늘날 공감의 중요성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심리학은 따뜻한 공감을 이용한 마음의 치유를 제안하고, 철학은 우리의 삶이 인정투쟁의 역사임을 이야기하며, 심지어 과학은 거율뉴런(타인의 행동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신경 네트워크로 하품의 전염 등이 그 예시다)을 근거로 인간의 선천적인 공감 능력을 예찬하죠. 그런데 이에 대해 공감의 한계를 과감히 지적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섣부른 공감이 도리어 해가 될 수 있다며 공감의 부작용을 염려하죠. 진정한 공감은 가슴이 아닌 머리로 하는 것이라 말하는 오늘의 책, 브래디 미카코의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입니다.








1. 공감의 배신


미국의 심리학자 폴 블룸(Paul Bloom)은 그의 저서 『공감의 배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공감은 지금 여기 있는 특정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다. 공감은 그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쓰게 하지만, (···) 우리가 공감하지 않거나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은 보지 못하게 한다." 아시다시피 스포트라이트란 무대의 한 부분이나 특정한 인물을 비추는 조명 기술을 가리킵니다. 즉 공감이란 우리의 온 관심을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에게만 기울이도록 제어하는 심리적 스포트라이트라는 설명이죠. 그런데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스포트라이트의 대상을 고르는 과정이 지극히 편향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가령 남자는 남자에게, 백인은 백인에게, 자본가는 자본가에게 공감하기 쉽습니다. 상대의 처지가 나와 닮을수록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기 수월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같은 공감의 편향성은 우리 사회의 편가르기 문제를 심화하고 나아가 집단간의 분열을 조장할지도 모릅니다. 즉 공감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두번째 문제점은 스포트라이트가 만들어내는 그림자입니다. 자고로 빛이 강렬할수록 그 너머의 그림자도 짙게 드리우는 법이죠. 눈 앞의 대상에 몰입하여 그에게만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소외되는 대상이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만약 그 소외된 사람들이야말로 정작 우리 사회가 합심하여 돌봐야 할 대상이라면 이는 사회적으로도 큰 낭비이자 손해일 테죠. 즉 공감은 사회적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하기에도 부적절한 전략입니다. 브래디 미카코는 이러한 폴 블룸의 논의를 이어받아 그 대안으로 ‘엠퍼시(Empathy)’를 제안합니다.










2. 엠퍼시: 인지적인 상상력


브래디 미카코는 먼저 심퍼시(Sympathy)와 엠퍼시를 구분합니다. 첫째로 심퍼시란 ‘타인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일’, 즉 ‘공감’을 뜻합니다. 이는 타인의 감정에 공명할 수 있는 인간의 정서적 본능으로, 가령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죠. 그런데 여기엔 커다란 함정이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심퍼시는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가령 영국에서는 아동을 성적으로 학대한 사건이 벌어지면 범인을 찾아 복수하겠다는 분노의 목소리가 각종 SNS를 도배합니다. 하지만 어쩌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하루 빨리 끔찍한 사건으로부터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랄지도 모릅니다. 이 경우 복수를 외치는 성난 군중들은 자신들의 분노한 마음을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투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죠. 즉 공감은 타인의 감정을 앞세운 나의 감정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자신을 모델로 타인을 이해하려 들기 때문에 세계에는 불행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폴 블룸). 반면 엠퍼시란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상상하는 힘’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나와 타인은 엄연히 다른 존재임을 인지하고, 타인의 시점에 서서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상상하고 추측하는 거죠. 따라서 심퍼시는 우리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마음의 작용인 데 반해, 엠퍼시는 일부러 노력해서 배워야 하는 인지적 능력입니다. 둘 중 저자가 강조하는 건 엠퍼시입니다. 심퍼시를 발휘하는 인간은 이해할 수 있는 감정에만 공감하고 말지만, 엠퍼시는 나와 전혀 다른 처지의 사람을 이해하도록 돕기 때문이죠.



간편한 예로 민트초코를 떠올려 볼까요? 혹자는 치약맛이 난다며 난색을 표하는가 하면, 반대편에선 깔끔한 청량감을 찬양하곤 합니다. 만약 심퍼시만 발휘한다면 언제까지고 양쪽은 서로를 공감하는 데 실패할 것입니다. 하지만 엠퍼시를 발휘하는 사람은 타인의 고유한 취향이 가지는 의미를 타인의 입장에서 상상하려 노력할 테죠. 이처럼 고작 음식 취향만 달라도 심퍼시는 그 한계를 드러냅니다. 하물며 정치적 견해나, 인생관, 혹은 종교 등의 경우는 심퍼시로는 결코 메울 수 없는 커다란 틈이 존재하죠. 따라서 저자는 나와 전혀 다른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건 ‘감정적인 공감(심퍼시)’이 아니라 ‘인지적인 상상력(엠퍼시)’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엠퍼시를 기르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3. 엠퍼시 훈련


브래디 미카코는 엠퍼시를 기르는 첫번째 방법으로 감정적 리터러시(Literacy)를 제안합니다. 이는 말 그대로 감정을 언어화하는 훈련을 의미합니다. 가령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아이가 장난감을 집어 들어 벽으로 세게 던지면 이때 부모는 아이에게 “너 지금 화가 잔뜩 났구나”라고 말을 건네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는 아이의 감정에 알맞은 언어를 찾아 아이가 스스로의 감정을 언어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죠. 이를 통해 아이는 타인의 표정이나 행동을 관찰하며 타인의 감정을 언어로 추측하고 이해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 방법은 입체적인 관찰입니다. 브래디 미카코는 밀합니다. “타인을 표피로만 판단하지 않고 여러 층위의 집합체로 바라보는 것이 엠퍼시의 시작이다.” 예컨대 누군가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목격했을 때 우리는 ‘그가 특정 지방 출신이라 그래’ 라는 식의 섣부른 판단은 지양해야 합니다. 한 인간의 정체성은 출신 뿐 아니라 수없이 다양한 층위에서 복잡하게 얽혀 이루어진 집합체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상대방이 속한 수많은 맥락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신중한 시선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브래디 미카코의 책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를 간단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책의 제목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다’를 뜻하는 영어 숙어(put yourself in someone’s shoes)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죠. 미카코는 말합니다. “신발이란 한 사람의 인생이며 생활이자 환경이고, 이로 인해 만들어진 독특한 개성과 마음과 사고방식이다.” 즉 나의 신발을 벗어 타인의 신발을 신는 행위는 익숙한 나의 사고방식을 벗어나 상대방의 마음과 신념, 나아가 그의 삶을 상상하고 들여다보는 엠퍼시라 할 수 있습니다. 설령 타인의 신발이 지저분하거나 불편할지라도 타인의 존재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런데 한편으로 지나친 엠퍼시는 커다란 부작용을 초래할지도 모릅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말합니다. “객관적인 인간이란 하나의 거울이다. 이 거울은 인식되기를 바라며 복종에 익숙하다. 그리고 인식이 주는 기쁨, 즉 ‘거울이 비춘 것’으로 인한 기쁨 말고는 기쁨을 모른다.” 니체가 말하는 객관적인 인간이란 자신의 주관을 접어두고 타인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탁월한 인간을 가리킵니다. 가령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견해와 신념을 내려놓고 객관적인(혹은 중립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어야 하죠. 즉 객관적인 인간은 그저 타인을 비추는 하나의 거울로 전락하여 자기 자신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미카코는 그 대안으로 아나키적 엠퍼시를 제안합니다. 쉽게 말해 아나키란 각종 지배를 거부하며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관을 구축하는 태도입니다. 확고한 자기 세계를 구축한 개인은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고 존중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상실하지 않을 수 있죠. 즉 자기 신발을 제대로 신을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의 신발도 신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공감을 넘어선 상상력으로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회를 소망하며 오늘의 글을 마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