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연인과의 뜨거운 시작이 냉엄한 시간에 온기를 빼앗기고 싸늘하게 식어가는 순간. 이른바 권태라 불리우는 그 순간은 슬며시 찾아와 오래된 연인의 마음을 할퀸다. 바야흐로 모든 처음이 빛을 잃고, 호기심이 고개를 꺾고, 설렘은 흩어져 진부함이 되는 순간 말이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탈출할 방법은 무엇일까. 손쉬운 방법은 권태를 달래줄 새로운 설렘의 원인을 따라 뭇 남자, 뭇 여자를 쫓는 것이다. 그리하여 권태를 잠시 잊는 것, 익숙함에 진절머리가 난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것, 오랜 연인으로부터 스스로를 대피시키는 것. 이보다 권태로움에 대처하는 간편한 방식이 무엇이겠는가. 허나 애석하게도 이는 권태의 해결이 아닌 유예에 불과하다. 우리가 외면한 권태는, 지연된 권태는, 해결되지 못한 권태는 곧 시꺼먼 속내를 드러낼 것이 분명하다. 권태의 해결책이 되어 줄 것만 같던 새로 만난 연인도 시간의 재판을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니 말이다. 추상 같은 시간은 이토록 모든 설렘을 잠재우고, 뜨거운 처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법이다. 마치 설렘이 실은 권태의 첫인상에 불과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다면 다시 질문하자. 관계의 권태로움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눈 앞의 연인은 나를 비참하게 하고, 새로운 연인은 일시적인 마약에 불과하다. 당신의 선택지는 무엇인가. 권태로움에 주저앉은, 그리하여 용기를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한 오늘의 책,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이다.
39살의 여성 폴은 오늘도 씁쓸한 하루를 삼킨다. 그녀의 오랜 연인 로제가 주말 데이트 내내 열정 대신 의무감만 내비쳤던 탓이다. 함께이길 바랄수록 혼자라는 사실만 처절하게 드러나는 관계, 상대의 애정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관계, 나만 놓으면 끝날 것 같은 관계. 그것이 폴이 정의하는 그들 관계의 현주소다. 그리하여 폴은 쓸쓸한 고독감을 어찌할 줄 모른 채 울고 있다, 다만 사랑하는 마음은 어찌하지 못한 채로. 사실 로제의 마음도 내심 편치 않다. 그는 폴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편안한 애정을 기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론 짜릿한 자유를 포기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복잡한 마음을 느끼는 중이다. 어쩌면 그가 누리는 편안함은 책임의 부재이자 자유에 대한 갈구에 빚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로제는 폴을 사랑하면서도 짐짓 다른 여인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사랑하지만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그들은 지금 각자의 방식으로 흔들리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준수한 외모의 청년, 시몽이 폴 앞에 나타난다. 14살이 많은 연상의 연인 폴에게 시몽의 데이트 신청은 꽤나 당돌하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브람스의 음악을 들으러 가자는 시몽과, 그에게 흔들리면서도 다시금 로제에게 확신을 기대하는 폴, 그리고 폴과의 관계에 뻔뻔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로제. 사강의 소설은 그들 사이의 복잡한 심리묘사를 섬세하고 처연하게, 그러나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작품의 말미에서 폴은 끝내 로제를 택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는, 혹은 틀림없어 보이는 시몽을 포기하고 말이다. 이후에도 별다른 반전은 없다. 로제는 여전히 자유를 사랑하고, 무심한 태도로 폴을 실망시킨다. 그리하여 소설은 마치 처음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폴과 로제의 권태로운 모습을 그리며 끝난다. 폴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녀는 왜 자신을 늘 기다리게 만드는, 뒷모습만 우두커니 바라보게 만드는, 한결같이 실망만 안겨주는 로제를 택한 걸까. 이는 권태에 대한 권태, 요컨대 이중의 권태를 드러낸다. 생각해보라. 시몽과의 만남이라고 해봐야 언제까지 뜨겁겠는가. 하늘 아래 모든 뜨거운 출발은 시간의 운행 속에 시나브로 열기를 잃는 법이다. 폴은 시몽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커져감을 느낄 때 진작에 알아챘을 것이다. 이 또한 열기를 잃을 거라고. 요컨대 폴은 사랑이 권태 그 자체임을 받아들이는 거라고, 그래서 권태에 대해 권태로워져야만 함을 깨달은 것이다. 따라서 폴은 로제의 무심함에도 불구하고 태연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는 기꺼이 권태롭기로 작정했으므로.
아다시피 브람스는 초기 낭만주의를 이끌었던 슈만의 제자다. 브람스가 슈만의 아내 클라라--브람스보다 14살 연상이다--를 흠모했던 사실은 잘 알려진 바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면 브람스를 좋아하냐는 시몽의 질문은 실제 브람스의 삶과 공명하여 노골적인 듯 암시적인 메시지로 해석된다. 말하자면 시몽은 폴에게 자신을 좋아하냐고 묻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더욱 흥미로운 점은 사강이 이 작품의 제목--<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을 고집했다는 점이다. 제목을 통해 그녀는 독자에게 질문(?)이 아닌 권유(...)를 하고 있다. 브람스를 좋아하라고, 권태가 아닌 설렘을 택하라고, 중년의 폴처럼 권태에 지지 말라고 말이다. 사랑을 믿느냐는 질문에 사강은 이렇게 답했다. "농담하세요? 제가 믿는 건 열정이에요. 그 이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사랑은 이 년 이상 안 갑니다. 좋아요, 삼 년이라고 해두죠." 사강은 사랑의 권태로움을 인정하는 대신 열정을 예찬했다. 비록 세간의 비난--말하자면 14살이나 어린 청년을 만난다는 비아냥--을 받을 지라도 말이다. 다만 사강의 대답은 작중 폴의 선택을 무색하게 만든다. 왜 사강은 폴이 끝내 권태를 택하도록 방치했던 걸까. 시몽을 택하지 않은 폴이 다시금 권태에 직면하게 됨을 꼬집으며 폴을 반면교사로 삼고 싶었던 것일까. 혹은 열정마저 발휘하기 힘든 삶의 권태를 처연하게 그려내고 싶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두어도 충분할 것이다. 매순간 용기를 불어 넣으며 삶의 모든 권태와 맞서는 열정을 택할 것인지, 혹은 권태로움이라는 약간의 부작용을 감수한 채 익숙함에 편안히 기대어 살아갈 것인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니 말이다.
스피노자는 소심함을 가리켜 이렇게 설명했다. "소심함은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큰 악을 더 작은 악으로 피하려는 욕망이다." 즉 스피노자에게 소심함이란 최악을 피해 차악으로 달아나는 열없는 마음이다. 하지만 만약 악에 대한 가치판단이 잘못 이루어진 것이라면 어떨까. 요컨대 더 작은 악이라 여긴 것이 실은 더 큰 악이라면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심함이 가져다주는 큰 해악이 꽃피운다. 소심함은 악을 과장하여, 실은 그저 대면할 용기가 없던 것을 합리화한다. 폴의 경우 큰 두려움은 세간의 비아냥, 그로 인한 자기 평판의 훼손, 혹은 그 모든 걸 감수한 새로운 관계가 다시금 권태로 몰락할 지도 모르는 미래였다. 그리하여 폴은 자신을 외롭게 만들지만 평판이 보장된 관계로 돌아간다. 이는 정말 큰 악에서 작은 악으로 피한 것일까. 열정을 발휘할 용기가 없던 폴의 소심함은 끝내 권태로 장식된다. 자, 이제 그녀를 향한 시몽의 의미심장한 대사를 들어보라.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그녀에게 고독은 우연한 결과가 아니다. 고독은 그녀의 선택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아, 물론 여기서 고독을 고작 사랑이나 관계 따위로 한정하여 해석하진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