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론』, 데일 카네기
https://www.youtube.com/watch?v=maEvyxl5iSc관계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보지 못할까 걱정하라.”
(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인야)
『논어』, <학이>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사르트르는 그의 작품 <닫힌 방>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 오늘날 적잖은 사람들도 이 말에 공감할 것입니다. 수없이 얽힌 인간관계의 거미줄 속에서 상처 받지 않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하지만 사실 타인이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속내는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에 따르면 타인이 지옥인 이유는 단지 타인은 <내게 상처를 입히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은 <내가 나다워지는 것을 방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이를 이해하기 위해 잠시 <즉자>와 <대자>라는 개념을 경유하겠습니다. 쉽게 말해 즉자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존재양식이고, 대자란 <자기에 대해서 존재>하는 존재양식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컵은 단지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인 즉자입니다. 요컨대 컵은 스스로를 컵이 아닌 그 무엇으로 초월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며, 심지어 스스로가 컵이라는 자기 인식마저도 없습니다. 이처럼 즉자는 자기의 존재 바깥에 설 수 없는, 즉 자기 안에 갇힌 존재라고 할 수 있죠. 그에 반해 인간은 자기의 존재 바깥에 서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는 대자적 존재입니다. 이를테면 인간은 때로는 자신의 욕망이 지나치다고 판단하여 절제하기도 하고,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기도 하죠. 다시 말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꾸준히 변화시키고 새롭게 탄생시킬 수 있는, 이른바 <실존적 역동성>을 지닌 대자인 것입니다. 하지만 타자는 이러한 우리의 실존을 방해합니다. 예컨대 타인은 때때로 우리를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고집불통인 늙은이라고, 혹은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애라고 손쉽게 <낙인>을 찍어 버립니다. 또 그렇게 멋대로 판단해 버린 특성 속에 ‘나’를 가두고 ‘나’의 실존을 방해하죠. 다시 말해 ‘나’는 <대자>인데, 타인은 ‘나’를 <즉자>로 규정해버리는 것입니다. 요컨대 벗어날 수 없는 지옥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밀어 넣는 거죠.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폭력적 규정>이 난무하는 속에서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타인과 관계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성공적으로 타인과 관계 맺을 수 있을까요? 타인과의 원만한 관계 형성을 위한 다분히 현실적인 인간관계 전략을 담은 오늘의 책,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입니다.
: 인정행위
독일의 철학자 헤겔에 따르면 인간의 자의식은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서 자의식이란 <내가 나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능력>으로서, 즉 인간은 <나>를 인정해주는 <타자>가 있을 때에만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설명이죠. 헤겔은 말합니다. “인정행위 속에서 나는 개별자가 아니다. 나는 당연히 인정행위 속에서 존재하며, 더 이상 매개 없는 현존재가 아니다(『예나시대의 실재철학』).” 쉽게 말해 인정은 관계를 생성합니다. 서로를 인정하는 두 사람은 각각 자의식을 갖게 되고, 인정행위를 통해 서로 매개되기 때문이죠. 따라서 타인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를 나와의 관계로 초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데일 카네기는 이를 인간관계 전략에 응용합니다. 그는 타인의 호감을 얻는 방법으로 다음의 여섯 가지를 제안합니다. 1)상대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2)미소를 지어주고, 3)이름을 기억하고, 4)경청하고, 5)상대가 관심 갖는 분야에 대해 이야기하고, 6)상대로 하여금 인정받도록 느끼게 하라. 이상의 세목들은 결국 <인정>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수렴합니다. 타인에게 미소를 짓고 이름을 기억하는 등의 행동들은 상대가 인정받는다고 느끼도록 돕는 기술이라 할 수 있으니 말이죠. 그렇다면 과연 카네기는 왜 이토록 인정에 주목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인간관계의 본질이 <소통>에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고로 인간관계란 <나>와 <너>의 마주침을 통해 발생합니다. 이때 <나>와 <너>는 각각 자기 세계의 중심에 선 자로서, 즉 인간관계는 필연적으로 두 세계의 충돌을 수반하죠. 따라서 만약 두 사람 모두 자기 세계의 중심을 양보하지 않는다면 두 세계는 포개질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때 <소통>이 요청됩니다. 본래 소통의 한자어 뜻은 ‘트이다’를 의미하는 ‘소(疏)’와, ‘통하다’를 뜻하는 ‘통(通)’으로 구성됩니다. 즉 소통이란 자신의 합리와 고집을 비워(疏)냄으로써 상대와 통(通)하고자 하는 노력이죠. 바꿔 말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비워내는 만큼 그만큼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타인을 인정하는 행위는 나를 비우고 타인을 초대하는 인간관계의 기본이자 호감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로고스/파토스/에토스
앞서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인간관계란 자기 세계의 고집을 비워내고 타인의 세계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건강한 인간관계란 늘 타인에게 끌려 다니는 것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의 의견과 가치관을 상대에게 관철시켜야 할 필요도 있죠. 물론 그 방법론이 적절치 못할 때 타인과의 갈등은 불가피하고, 심할 경우 관계의 단절을 초래할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을 설득함에 있어 다분히 전략적일 필요가 있죠.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의 기술로 다음의 세 가지를 제안합니다. 첫째로 로고스(Logos)란 객관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상대를 설득시키는 것으로, 즉 논리와 이성을 특징으로 삼습니다. 둘째로 파토스(Pathos)란 상대의 감정이나 욕구에 호소하여 상대를 설득하는 것으로, 감성과 욕망을 특징으로 합니다. 끝으로 에토스(Ethos)란 화자의 인품과 신뢰감을 통해 상대를 설득하는 것으로, 성품, 윤리 등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상을 간추리면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 우리는 탁월한 인품을 갖추고, 이성과 논리를 바탕으로, 상대의 감정에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설명이죠. 카네기가 제안하는 설득의 기술도 이를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첫째, 날카로운 논쟁과 대립을 피하라. 이는 상대의 감정을 헤치지 않으려는 파토스 전략입니다. 둘째, 상대의 잘못을 끄집어내지 마라. 이 역시 논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상대의 감정을 존중하는 파토스 전략에 해당하죠. 셋째, 본인의 잘못을 빨리 인정하라. 이는 화자의 신뢰감 형성에 기여하므로 에토스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넷째, 우호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라. 이 역시 상대의 감정을 고려한 것이므로 파토스 전략에 해당합니다. 다섯째, 상대가 선뜻 “네”라고 대답할 수 있도록 이야기하라. 이는 나의 주장에 상대가 수긍할 수밖에 없는 논리를 구성하는 것이므로 로고스 전략에 해당합니다. 여섯째, 나보다 상대가 더 많이 말하게 하라. 일곱째, 상대가 스스로 생각해냈다고 느끼게 하라. 이 둘은 모두 상대방의 우월감 내지는 자기효용감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므로 파토스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여덟째, 상대의 처지에서 사물을 보려고 진심으로 노력하라. 이는 상대방의 입장을 진심으로 헤아리는 도덕적 인품을 추구하므로 에토스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아홉째, 상대의 생각과 욕구에 공감하라. 열째, 상대의 고상한 동기에 호소하라. 열 한 번째, 나의 생각을 극적으로 표현하라. 끝으로 열 두 번째, 도전의욕을 불러일으켜라. 이들은 모두 상대의 감정과 욕망에 호소하는 파토스 전략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카네기의 설득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득론을 구체화한 버전이라 할 수 있죠. 다만 둘 사이의 큰 차이점은 카네기가 주로 파토스 전략을 활용한 감성적 설득법에 집중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토스를 최우선적으로 강조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요컨대 카네기는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도출할 수 있는 효율적인 인간관계론을 고민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관계를 만들기 전에 먼저 좋은 사람이 되기를 당부했던 거죠.
: 자기결정성
에드워드 데시와 리차드 라이언은 <자기결정성>이라는 동기 이론을 주장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인간은 자발적인 선택과 결정으로 행동을 실행할 때 보다 강력한 내적 동기를 가질 수 있다는 이론이죠. 이때 충족되야 할 내적 속성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자율성>입니다. 이는 자기를 둘러싼 환경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서, 즉 스스로가 자기 행동의 주인이길 바라는 주체적 욕구라 할 수 있죠. 둘째는 <유능성>입니다. 이는 자신의 능력을 맘껏 발휘하고 싶은 욕구로서, 자신의 지식이나 기술이 성장하는 데서 커다란 만족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셋째는 <관계성>입니다. 이는 타인과 의미있는 관계를 만들고 싶은 욕구로서, 사회적 상호작용을 형성하는 데서 느끼는 자긍심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스스로가 주체적이고, 능력 있고, 또 원만한 대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느낄 때 자기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만족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죠. 카네기가 제안하는 타인을 변화시키는 방법 역시 자기결정성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타인을 변화시키고자 할 때 우리가 유의할 점은 내가 상대를 변화시키려 한다는 인상을 주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상대로 하여금 그가 스스로 결정한 것처럼 생각하도록 착각시키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설명이죠. 카네기가 제시하는 구체적 기술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칭찬과 감사의 말로 시작하라. 이처럼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는 의미 있는 관계를 추구하는 상대의 관계성을 만족시킵니다. 둘째, 상대의 실수를 간접적으로 지적하라. 셋째, 상대를 비판하기 전에 내 잘못을 먼저 말하라. 이처럼 상대의 능력에 대해 조심스럽게 조언하는 태도는 상대의 유능성을 보호하는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넷째, 직접적으로 명령하지 말고 질문을 통해 제시하라. 이는 자기 행동의 주인이길 바라는 타인의 자율성을 만족시켜줄 것입니다. 다섯째, 상대의 체면을 세워줘라. 여섯째, 아주 조금의 진전이라도 진심으로 칭찬하라. 일곱째, 상대가 지키고 싶어하는 좋은 평판을 제시하라. 여덟째, 고치기 쉬운 잘못이라고 말하라. 이는 모두 상대의 유능성을 강화하는 전략에 해당합니다. 아홉째, 내가 상대에게 바라는 것을 상대가 주고 싶어하도록 만들어라. 이는 상대의 주체성을 강화함으로써 상대의 자율성을 만족시키죠. 정리하면, 이 모든 기술들의 핵심은 상대가 자발적으로 변화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요컨대 스스로가 변화의 주체라는 상대의 믿음을 훼손하지 않고 상대에게 변화의 의지를 불어넣을 수 있어야 하는 거죠.
이리하여 『인간관계론』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보았습니다. 오늘날 현대인에게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은 필연적입니다. 인간은 황야를 살아가는 단독자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죠.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말합니다. “타자가 가능세계라면 나는 과거의 한 세계이다.” 어쩌면 그의 말 대로 <나>는 멈춰 있는 한 세계이자, 온갖 반복과 습관의 총체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이때 <타자>는 내게로 다가와 나의 세계에 균열과 파문을 일으키며, 새로운 경험과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익숙하지 않은 가치와 철학을 고민하게 합니다. 요컨대 우리는 타자와의 소통 속에서 새롭게 <배치>되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이것을 <아장스망>이라고 합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옷을 떠올려보겠습니다. 똑 같은 옷이더라도 입는 사람에 따라 옷은 각기 다른 주름을 갖게 됩니다. 입은 사람의 골격과, 근육의 모양, 체형에 따라 옷의 주름도 다르게 배치(아장스망)되는 거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주름이자 아장스망입니다. 비록 때로는 깊게 패인 주름이 상처로 느껴져 인간관계를 단절하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주름 없이 매끄럽고 단조로운 삶은 반복과 습관으로 점철된 멈춰 선 세계일지도 모릅니다. 아무쪼록 우리의 관계에 켜켜이 쌓인 주름만큼 풍성하고 입체적인 삶을 응원하며 오늘의 글을 마칩니다.
카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