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가장 심원한 행복은 무엇으로 말미암을까. 재물? 명예? 권력? 그 외에도 여러 타당한 후보를 얼마든 거론할 수 있겠으나, 나의 답은 인간이다. 사람은 사람과 더불어 가장 큰 행복을 체험한다. 동의할 수 없다면 눈을 감고 당신의 삶에서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떠올려보라. 연인과 처음 입을 맞추며 벌개진 볼로 해죽이던 풋풋함, 아기의 삼을 가르던 고요하고 경건했던 숨죽임, 혹은 당신의 첫 입사 소식에 당신보다 신나서 방방 뛰던 부모님의 미소가 떠오르지 않는가. 이토록 우리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은 오직 관계 위에 자리한다. 다만 애석하게도 우리네 삶의 복잡다단함은 그다음 대목에서 기인한다. 사람은 사람과 더불어 가장 큰 절망을 체험한다. 예컨대 평생을 약속한 연인과의 이별, 둘도 없던 친구의 배신, 혹은 가족의 죽음처럼 말이다. 그렇다. 내 앞에 선 타자는 꽃과 칼을 양손에 쥔, 행복과 절망의 두 얼굴을 한 야누스다. 이제 우리는 무슨 선택을 해야 마땅할까. 기꺼이 절망을 감수하고 행복을 기대하며 타자를 끌어안을 것인가, 혹은 절망이 두렵다며 행복마저 내던지고 타자를 외면할 것인가. 이 구슬픈 역설의 관계론에 공감한다면 김호연의 소설 『불편한 편의점』이 건네는 메시지에 귀 기울여 보자. ‘불편함’을 긍정하는 그의 새로운 관계론은 역설의 관계론을 꿰뚫는 실마리를 보여줄 것이다.
소설 『불편한 편의점』의 제목은 다분히 역설적이다. ‘편의’를 제공해야 마땅할 편의점이 ‘불편’해서야 되겠는가. 하지만 역설은 소설의 제목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의 현실로 다가와 이내 삶을 메운다. 가령 우리의 관계를 톺아보자. 우리는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관계를 지지리도 만홀히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무릇 편히 느껴져야 마땅할 부모가, 자식이, 연인이, 친구가 때로는 버겁고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던가. 그렇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불편한 편의점’에 갇혀 있다. 너무도 친숙하고 허물이 없어 원하는 건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는 편안한 관계, 그와 동시에 예상치 못한 불화와 충돌로 이따금 골머리를 썩는 불편한 관계 말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정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 모두는 가까운 사람들과 균열되어 있다. 예컨대 편의점 주인 염영숙은 생전 처음 보는 노숙자를 긍휼히 여겨 편의점 야간 알바에 기용할 만큼 인덕이 두텁지만, 정작 아들 민식의 하소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오선숙은 하루가 다르게 업무를 습득하는 독고의 변화에 천천히 마음을 열지만, 정작 남편과 아들의 변화를 단념한다. 염영숙의 아들 민식은 지인이 제안한 양조 사업의 가치는 과대평가하지만, 막상 그의 어머니가 편의점을 운영하며 추구하는 이타적 가치는 낮잡아 본다. 요컨대 그들 모두는 불편한 관계에서 편안함을, 편안한 관계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역설적 관계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깨어진 주변 관계가 편의점을 중심으로 회복되기 시작하는 것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불편한 편의점이 그들의 관계를 치유하는 방식은 무엇일까.
어느 날 염영숙은 손녀 준희를 돌봐달라는 딸의 요청을 받는다. 물론 염영숙은 손녀를 눈에 넣을 만큼 사랑하지만, 한편으론 갑작스러운 부탁에 왠지 모를 씁쓸함이 밀려온다. 그녀의 일상은 가족을 위해 당연히 희생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지 않은가. 이러한 맥락에서 염영숙이 딸보다 편의점 직원들을 가족처럼 여기는 대목은 인간관계의 충분조건에 관한 실마리를 슬며시 드러내는 듯하다. 그것은 바로 ‘책임’이다. 편의점 직원들은 저마다 자신의 역할과 책임에 충실하다. 그들은 제시간에 출근하고, 상품을 진열하고, 손님의 요청에 응대한다. 요컨대 편의점은 자신의 책임을 기꺼이 감당하는 직원들을 통해 응당 편의점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모종의 역할을 부여받고, 책임을 수행하도록 요청된다. 이를테면 상대방을 신뢰할 책임, 존중할 책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긍정할 책임 등 말이다. 염영숙이 딸의 부탁을 받고 느낀 씁쓸함은 이 같은 책임을 딸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딸은 엄마 염영숙의 일상을 존중할 책임을 방기했고, 자신의 딸을 스스로 돌볼 책임에 소홀했으며, 염영숙이 편의점 운영에 내걸고 있는 상생의 가치를 긍정하지 않았다. 직원들의 태만함이 편의점의 몰락을 초래할 수 있듯, 무책임한 이들의 관계 맺음은 필연적으로 균열을 불러일으키리라. 프랑스의 지식인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그의 저서 『순진함의 유혹』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인을 강화시킨다는 것은 그를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연결시키는 것이고 그에게 빚, 즉 책임의 의미를 다시 가르쳐주는 것이다.” 관계의 회복은 자기 몫의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책임을 진다는 것은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처음 마주한 노숙자의 진정성을 기꺼이 믿어주는 것, 아들이 대기업을 그만둔 이유에 전심으로 귀 기울여 보는 것, 편의점 삼각김밥을 훔치려 한 소년의 사과를 흔쾌히 받아주는 것. 관계란 이 모든 불편함을 감당함으로써 시작된다. 관계란 불편함을 버텨내기 위한 노력 위에 성립한다. 관계란 불편한 편의점이다.
가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곽 씨에게 독고는 말한다. “손님한테 하듯 하세요.” 그렇다. 점원은 손님을 편하게 대할 수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조금 불편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불편함이, 그 거리감이 점원과 손님을 ‘나’와 ‘너’라는 서로 다른 주체로 존재하게 한다. ‘나’의 자리를 지키는 동시에 ‘너’의 자리를 존중하도록 돕는, 그 거리감 말이다. 어쩌면 우리 관계의 수많은 문제는 그 불편한 거리감을 섣불리 제거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너무도 편한 나머지, 거리감 따위는 없어야 한다는 관계 망상이 도리어 우리 관계의 거리를 영영 닿지도 못할 만큼 떨어트려 놓은 것은 아닐까. 가령 우리는 그 어떤 손님의 이야기도 함부로 묵살하지 않고, 다짜고짜 구제불능 취급하지 않으며, 대뜸 분노하지 않는다. 하지만 염영숙은 야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어린 민식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독고는 딸을 구제불능이라 여겼고, 오영숙은 게임만 하는 아들의 모습에 부아가 치밀었다. 즉 그들은 ‘나’와 ‘너’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그 거리감을 존중하지 않고, 상대의 의견이야 어떻든 내 맘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그야말로 ‘편한’ 존재로만 상대를 바라본 것이 아닐까. 요컨대 불편함 따위는 집어치우고 상대를 내가 요구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줘야 하는 ‘편의점’이라고 여긴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소중한 것은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를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불편함을 외면함으로써 도리어 가장 불편한 관계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독고는 그들에게 관계의 새바람을 일으킨다. 친숙하지만 조심스럽고, 사랑하지만 소유하려 하지 않는, 이른바 손님의 관계론 말이다. 삶의 여정에서 우연히 마주한 뜻밖의 손님처럼, 이후의 삶을 동행하기로 약속한 감사한 손님처럼, 이제 우리도 서로를 손님처럼 대해보는 것은 어떨까.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