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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권수 Jan 30. 2018

부정적인 소리에 묶여 괴로운 나

무시할 수 있는 능력에 나의 선택이 있다. 

우리의 뇌는 부정적인 정보를 민감하게 처리하도록 되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 번쯤은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말이나 평가를 잊지 못해 괴로워한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다. 무시하고 잊어버리고 싶지만 그럴수록 더 선명하게 집착하게 된다. 왜 그럴까? 일단 사람은 부정적인 정보에 더 민감하다. 맹수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원시시대부터 부정적인 정보에 민감할수록 생존의 확률이 높았다. 숲에서 보이는 알 수 없는 정보를 별 것 아니라고 무시할 경우와 맹수의 위협으로 판단하여 대비할 경우, 언제나 부정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할 경우가 생존에는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의 뇌는 부정적 정보를 보다 민감하게 처리하고 더 강하게 반응하며 기억한다. 부정적인 정보는 생존을 위한 씨앗이었다. 부정적인 정보에 더 민감하고 부정 편향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니 일단 너무 심각해지지 말자. 하지만 생존이 아니라 일상의 평온함과 번영을 위해서는 무시할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일단 거부할 수 없는 이런 반응에 대해 이해해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다.  


부정적인 말은 감정을 활성화시켜 과장되고 증폭된다. 

부정적인 말은 명확하게 판단하기 전에 감정이 먼저 활성화되어 과장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부정적인 정보는 뇌에서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라는 곳을 활성화시킨다. 이 곳이 먼저 과활성화되면 판단과 조절을 담당하는 전두엽의 기능이 떨어지거나 마비된다. 그래서 부정적인 정보는 그 실체를 판단하기도 전에 감정적으로 증폭되고 강화되기 쉬워서 통제하기 힘들어진다. 누군가 “너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것이 사실도 아니고 제고할 가치도 없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의 주관적 생각이나 감정적인 공격쯤으로 무시하기 힘들다. 이미 감정적으로 그 말에 납치되어 무시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과장된 감정적 신호는 해결에 집착한다. 자신이 약하고 공격당한다고 느껴지면 더 강하게 집착하고 씨름하다 오히려 감정적으로 그 말을 증폭시키는 악순환을 만들기 쉽다. 그러니 부정적인 말을 무시하거나 잊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부정적인 말은 나의 기대나 욕구, 존재를
부정한다고 무의식적으로 믿게 한다. 

부정적인 말이나 평가를 쉽게 잊지 못하는 것은 그 말이 자신의 기대나 욕구를 위협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나는 어떤 사람이기를 원하고 어떻게 대접받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기대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행동하며 살아간다. 기대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과 존재감이 만들어지는데 부정적인 말은 이런 나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위협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감정적인 연결이 강할 때는 무시하거나 잊어버리는 것이 더욱 힘들다. 자신이 유독 인정받고 싶은 사람이나 가까운 사람 또는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 지켜온 기대나 욕구일수록 감정적으로 연결이 강화되어 무시하기 힘들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의 근거 없는 비난이라도 나와 감정적 연결이 강한 기대, 가치, 욕구를 위협할 때는 잊기 힘들다. 또 우리가 약하다고 느껴질 때는 무시하기 힘들다. 무시하거나 잊지 못하고 몹시 괴롭다면 자신이 약하고 위협받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감정적 연결이 강화된 상태다. 자신이 믿는 입장을 변화시키지 않고는 탈출하기 힘들다. 내가 더 강하다고 믿거나 나의 기대나 욕구를 위협한다고 믿지 않으면 쉽게 잊고 무시하기 쉽다.      

일단, 감정에 판단과 선택권을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부정적인 말을 무시하거나 잊고 싶다면 우선 감정의 힘을 약화시켜야 한다. 감정적 연결을 약화시켜야 한다. 그 말을 나의 존재나 기대 또는 욕구와 연결시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 부정적인 말을 한 사람은 그저 자신의 입장에서 한 말이고 기본적으로 나와 상관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객관적인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입장과 별개로 그 말을 한 사람의 입장과 의도를 생각하는 것이다. 뭔가에 의문을 가지고 판단을 한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쉽게 활성화되는 것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 마치 내가 제삼자가 된 것처럼 부정적인 말을 한 사람을 공감하는 것이다. 적을 공감하는 것이다. 그래야 나의 선택을 그 말에 헌납하지 않게 된다. 저 사람은 어떤 의도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그 사람의 입장이 돼서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인식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신의 기대와 욕구를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상관없는 것도 감정적으로 연결시킨다. 이런 것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제대로 판단할 여지없이 부정적인 말에 묶이게 된다. “사람은 이래야 한다”, “이것이 선이다”, “이것이 바람직하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기대나 욕구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군가의 부정적인 말이나 평가와는 기본적으로 독립적이다. 이것을 굳이 연결하여 실랑이할 필요는 없다. 그 사람의 입장이나 주관적 평가일 뿐이다. 그 말이 나에게 큰 영향력이나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것도 그저 감정적으로 증폭된 걱정일 뿐이다. 그저 수많은 생각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움을 받을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에 공감하는지 모른다.


분리하지 못하면 나의 선택은 없다. 

나의 기대나 욕구와 부정적인 말을 하나로 묶어 놓은 채로 조절하려면 힘들다. 얼어붙은 가래떡을 억지로 떼어 내려면 불필요한 힘만 많이 든다. 살짝 녹여서 분리한 다음 내가 원하는 요리를 하면 더 쉽다. “자신의 기대나 욕구를 내려놓아라”라고 말하면 어렵다. 그냥 별개로 보고 내 기대와 욕구에 맞춰 그 말을 연결시켜 해석할 필요는 없다. 


틈을 만들어야 무시하거나 판단하고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 

부정적인 말이나 평가를 한 사람은 단지 그의 입장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것이 어려울 때는 생각을 멈추고 틈을 만드는 것이 좋다. 이때 머리를 쓰는 것보다 몸을 쓰는 것이 효과적이다. 일시적은 단절을 통해 반응적으로 활성화되는 부정적 감정을 막고 부정적으로 강화되는 생각을 약화시킬 수 있다. 잠시 산책이나 운동, 취미생활, 다른 일에 일단 몰두하는 것이다. 기분전환을 하고 틈을 만들고 나면 자신이 원하는 판단을 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명상에서는 어떤 판단 없이 감각, 감정, 생각을 바라볼 수 있는 주의력 훈련을 한다. 판단 없이 제삼자처럼 자신의 감각과 감정, 생각을 관찰하다 보면 분리해서 생각하게 되고 쉽게 휘둘리지 않는 힘이 생긴다. 주변과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기대와 욕구에 몰입하며 행동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준다. 부정적인 말이나 평가, 예언에 묶여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에 몰입하지 못하고 때로는 시작도 못하는 일은 비극이다.  내가 느끼는 감각, 감정, 생각이 반드시 ‘나’는 아니다. 무시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고 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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