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를 읽는 방식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에는 현실에서 조금씩 밀려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무언가를 잃고, 마음속에 크고 작은 구멍을 안은 채 낯선 세계로 발을 들인다. 이상하고 모호한 그 세계에서, 결국 마주하게 되는 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나는 그의 오랜 독자다. 스무 살 무렵, 처음 하루키의 문장을 만났을 때의 충격을 지금도 기억한다. 간결하면서도 흡인력 있는 문장,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기묘한 세계. 그 속에서 나의 외로움과 불안을 읽어낸 듯한 문장들을 발견하며, 하루키는 오랫동안 내 청춘의 은밀한 동반자였다.
최근 몇 년간 하루키의 소설을 다시 읽으며 패턴을 발견했다. 그의 인물들은 대부분 어떤 '상실'을 겪고, 그로 인해 삶의 틈이 벌어지면서 낯선 세계로 들어간다. 그 세계는 현실이라기보다는 내면에 가깝다. 도서관, 숲, 벽 너머의 도시, 이중 구조로 된 세계 그 '여행'은 낯설지만 왠지 모르게 그리운 공간들이다. 마치, 내 안 어딘가에서 조수간만을 반복하던 해안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심리학자 카를 융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무의식이 존재하며, 거기서 진짜 나(self)를 발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했다. 하루키의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주인공들의 여정이 융이 말한 그 길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하루키의 소설은 심리학적 분석의 대상이라기보다 감각적으로 겪어내는 하나의 경험에 가깝다. 우리는 그저 그 낯선 여행을 따라가며, 이상하게 익숙한 감정들과 마주할 뿐이다. 융의 이론은 하루키를 읽는 하나의 틀이 될 순 있어도, 그의 작품이 품은 모호한 열림을 다 말해주진 않는다.
하루키는 세계를 명확히 규정하기보다는 ‘모호함’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독자에게 해석의 자유를 열어주는 작가다. 그의 결말은 늘 열려있다. 독자 개개인이 살아온 방식, 쌓아온 신념이나 관념에 따라 같은 이야기라도 다르게 읽힌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상실과 여행을 거쳐 자기 자신을 마주하지만, 그것이 전부 회복이나 치유라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해변의 카프카>에서 소년은 자신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만, 그것이 회복되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는 자아에 닿지 못하고 정체성이 허무하게 흐릿해진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의 주인공은 죽음을 선택하고 조용히 체념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발견은 했지만, 어딘가로 도달하는 것이 아닌 여정 자체에 머무는 감각이고 자기를 해체하는 시도이다. 포스트모던 문학에서 자기 해체는 고정된 본질의 자아를 의심하고 그 자아의 허구성과 다면적, 다층적인 모습을 드러내려는 서사 전략이다. 그렇다면 하루키가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이 플롯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 인간은 자신을 발견하고 성찰해도, 완전하지 않다는 것. 불완전한 자신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삶은 이래야 한다고 단정 짓지 않고, 그저 열려있다는 시선. 하루키의 소설은 그런 태도로 독자를 바라본다.
사람은 누구나 다 부서진 조각들을 이어 붙이며 살아간다. 삶이란 조각난 파편들의 이음새를 필사적으로 잇고, 그 틈을 지탱해 내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내부에 온통 균열이 생긴 나지만, 그 틈 사이로 희망이나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삶이 진짜 나의 삶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자기 해체로 인해 더 자유로워질 수도 있고.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대단한 결론이나 영웅적인 변화를 겪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어딘가 부족하고, 어딘가 비어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상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품은 채 앞으로 나아가려는 태도다. 그것이 우리가 그들에게 끌리는 이유 아닐까. 우리 역시 크고 작은 상실을 품은 채,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낯선 숲 어딘가를 지나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