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뜨내기가 아닌 진정한 이웃이 되려면: 청주 문화제조창에서의 생각
국립현대미술관 청주를 방문했다. 수장고를 일반인들에게 오픈하는 미술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청주관은 누구나 쉽게 국가가 소장하고 있는 예술작품을 누리게 하려고 하는 시대정신을 잘 기획해 만든 공간이다. 미술관 옆 문화제조창이라는 이름의 복합문화상업공간이 있는데 서울 힙플레이스 뺨칠만한 트렌디한 공간으로 카페, 레스토랑, 서점, 기타 가게들이 입점해 있었다. 과연 전국 방방곡곡의 감각이 상향평준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돌이켜보면 80년대 중후반 올림픽을 전후로 우리 사회에도 글로벌한 도시풍경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80-90년대 초의 오렌지 족이라는 도시적인 소비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들을 따라 힙하고 트렌디한 곳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예전엔 명동만이 그런 공간이었다면 새로운 도심에 감각적이고 힙한 공간들이 지역의 이름으로 생긴 것이다. 신촌, 이대, 홍대, 방배, 압구정, 강남역, 청담, 이태원, 한남, 연남동, 성수 등으로 늘어났고 수도권에도 분당, 일산, 판교, 용인 등으로 확산되었다.
얼마 전까지 국내여행은 주로 먹거리가 있는 지역이 여행자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커피붐과 함께 서울의 안락하고 트렌디한 감각에 자연의 풍광까지 플러스된 공간들을 여행자들이 선호한다. 제주, 강릉과 같은 곳들이 그렇게 성장했다. 여행을 떠나 그 지역의 먹거리를 먹어보고 나서도 여행자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커피샵이 따라오는 이유다. 요즘은 커피샵이 생기는 지역이 그 지역의 가장 트렌디한 곳이다. 시간과 풍경을 함께 팔기 때문에 사람들의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커피샵 옆에 베이커리 같은 것들이 따라붙으면서 거리 전체가 새로 개발되는 효과를 갖는다. 지방관광의 중심이었던 먹자골목 대신 지역의 도시전망 혹은 자연풍광과 결합된 카페촌들이 관광지의 새로운 형태로 성장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전국이 서울화되고 특정 힙한 공간들의 복사판처럼 되어가고 있다. 익선동 다다익선 같은 곳이 지방에 가서 비슷한 거리를 개발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런 현상들은 반드시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는데 일단 양적인 일들이 벌어져야 질적 변화도 쌓이기 때문이다. 놀라운 취향공동체, 지역의 문화거점 같은 것이 어느날 갑자기 생겨나진 않는다.
지역에 이런 일들을 벌이고 있는 이들은 대개 중소자본이므로 수익의 논리에 예민하다. 장사에 의한 수익을 기대할 수도 있고, 부동산에 의한 수익을 원할 수도 있다. 지자체들은 어떨까. 지자체가 주도하는 지역개발 프로젝트들은 대부분 하드웨어 중심으로 개발이 된다. 지속가능한 서비스가 되려면, 지역민들이 향유하는 소비스가 되려면 소프트웨어가 중요한데 소프트웨어에는 잘 투자하려 하지 않는다. 관에서는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관리할 사람이 없다보니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이러다 보면 결국 누군가에게 지속적인 사업권을 주는 일이 된다. 관은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어 소프트웨어에는 가급적 손을 대지 않으려고 한다. 군수님과 지자체장이 테이프를 자를때까지의 세팅으로 끝나는 경우가 다반사인 이유이다. 지자체장은 지역균등에 대한 압박이 있어 한지역에 투자를 하면 다음 사업은 다른 지역을 선택해야 한다. 하나의 사업을 선택해 집중하는 일은 지자체장들에겐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서울과 지역의 격차가 크고 모든 문화시설이 수도권에 밀집해 있다보니 지역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은 필요하고 긍정적인 일이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만들 때 우리도 서울 못지 않은 힙한 곳, 서울 뺨치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생각만으로는 지속가능한 모델을 만들기 어렵다. 힙하고 서울 뺨치는 공간들은 그 성격상 젊은 층을 타겟으로 만들어지는데 지역의 다른 구성원인 아이들, 중장년층, 노년층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공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젊은 층은 소비활동력이 높지 구매력이 높은 대상은 아니다. 젊은 층들이 정보탐색, 과시, 트렌드소비, sns를 통한 구전에 능하기에 자꾸 젊은 층에 포커스를 맞추려고 한다. 하지만 서울이나 수도권의 힙한 곳들도 트렌드 소비를 하는 데이트립여행자들에게만 의존하면 지속성을 갖기 어렵다. 한번 인테리어를 했을때 예전에는 5년은 유효했다면 요즘은 3년, 1년 안으로 낡은 인테리어가 되는 일이 빈번할 정도로 감각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초기에 사람들을 불러들이던 곳도 곧 임대료가 상승하고 경쟁이 가열되면 어려워질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지속가능한 공간이 되려면 반드시 지역민들에게 의미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특정 타겟에 의존하거나 관광객에만 기대서는 안되고 지역의 넓은 타겟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나 문화적인 상품들이 집적되어 있는 공간일수록 다양한 타겟 커버리지, 다채로운 컨텐츠 등 생활공간이 되기 위한 소프트웨어를 많이 갖고 있어야 한다.
교토와 오사카 사이의 교외도시인 히라가타의 츠타야는 지하철 역과 붙어 있고 다양한 연령대가 이용하는 곳이다. 지하에는 슈퍼도 있고 가벼운 식사를 할 수도 사갈 수도 있는 그로서리 마켓이 발달해 있고 서점 1층에는 사람이 가장 쉽게 시간을 보내거나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관광, 요리와 관련된 책들이 주로 큐레이션 되어 있다. 누구나 매일매일 시간을 보내도 되는 컨텐츠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지하 1층에서 바로 만든 초밥을 저렴한 가격에 바로 먹을 수도 있고 포장해 놓은 수제카레를 집에 가져갈 수도 있다. 온통 책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멍때릴 수 있고 가벼운 가격에 캐주얼 레스토랑을 즐길 수도 있다. 그래서 그곳은 어린이들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중장년층, 패밀리 등이 모두 이용할 수 있는 거대 커뮤니티 센터 같은 느낌을 준다. 하이퀄리티의 마을 회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나 할까. 츠타야 T-SITE는 히라가타시 주민들의 삶의 질을 한단계 높여줬다.
힙한 곳에 엄청난 규모의 레스토랑과 커피숍이 들어서 있다. 터무니없이 크고 터무니 없이 화려하다. 계약이나 운영의 편의성으로 만든 이벤트 공간이지 생활공간이라고 보긴 힘들다. 지역의 주민들이 이용하는 생활공간이라면 일용의 상품들이 있어야 한다. 인테리어 소품인 조화를 판매하고 완벽하게 디저트용 빵만을 판매하는 곳들이 생활공간이 되기는 어렵다.
일상적이고 지역에 밀착된 가게들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좀더 세밀하게 기획될 필요가 있다. 누군가의 생활공간이자 반복적으로 찾아가는 공간이 되려면 의미가 있어야 하고 찾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일회성 방문(VISIT)이 아니라 얼마나 자주(FREQUENCY)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가(RETENTION TIME)이 생활공간에서 들여다봐야 하는 지표이다. 데이트립 여행자들에게 의존하는 공간들은 방문과 객단가에만 관심을 쏟는다. 그에 따라 메뉴를 정하고 가격을 정한다. 요즘은 대부분의 공간이 그렇게 만들어져 인증을 위한 방문과 구매만 하면 더이상 관계가 지속되지 않는 일회성의 공간이 되고 있다.
흔하게 만들어지고 있는 감각적 공간이 때로 특정 타겟의 방문을 저해하는 장벽이 될 수도 있다. 공간도 사람의 정체성과 관련 있는 것이라 자기한테 걸맞는 공간, 자기의 생활, 감각, 취향 등에 맞고 친숙해야 그 공간에 오래 머물 수 있는 법이다. 새로운 곳, 트렌디한 곳, 낯선 곳은 감각적인 자극을 받는 곳이니 편안하지 않다. 화장품회사의 유통매장을 기획할 때의 일이다. 근린상권, 생활반경 안의 공간을 설계하는 일인데 백화점이나 면세점처럼 고급스럽게 보이길 원했다. 너무 럭셔리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근린상권을 설계하면 근린상권의 사람들은 그 공간을 편안해 하지 않는다. 회전 속도가 빠르고 오가는 사람이 많은 중심 상권의 가게와 자주 드나들고 머무르는 시간이 중요한 근린가게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이건 세련되었다 세련되지 않았다의 문제가 아니다. 한때 편의점들이 프리미엄을 외칠 때가 있었다. 카페 같은 인테리어 등의 불필요한 인테리어 요소들을 사용하고 효율이 떨어지는 진열도 해보았으나 다 참혹한 실패로 끝났다. 편의점은 완벽하게 '편하게'가 중요한 가게의 형태이다. 길을 건너, 더 프리미엄한 가게를 찾아가는 업태가 아니다. 공간의 성격에 따라 강조해야 하는 포인트가 다른 법이다.
지역의 새로운 공간과 시도들이 지척에 생겨도 지역주민들에게 낯설고 이질적인 것이 되기 쉽다. 지역주민들의 생활로 편입되지 않는 공간은 오가는 관광객에 의존하는 공간이 되고 그러다 보면 공간이 망가진다. 회전율이 중요하기에 공간에 머물려면 1인 1메뉴여야 하고 주문을 한 후에나 주차할 수 있다는 등의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일들이 흔하게 벌어지고 이러다보면 결국 외지인들조차도 더이상 찾지 않게 된다.
지역마다 전통시장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했었다. 1층은 먹자골목으로, 남는 공간은 젊은 작가나 젊은이들에게 공간을 대여해주고 사업을 지원해 주는 일들을 했는데 결국은 소프트웨어가 충분치 않아 그것이 그것같다는 인상을 주는 곳이 많다. 어딜 가나 비슷하다 라는 인상을 주면 한번은 가도 여러 번 가지는 않는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보면 백종원이 늘 하는 얘기가 있다. 이 주변엔 기업이 있는지, 대학생이 많은지, 가족단위 고객들이 많은지. 당신이 하고 있는 음식과 비슷한 음식점은 뭐가 있나, 어떤 특징이 있나. 이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에게 포커싱을 맞춰 메뉴를 준비할 것인지를 선택하고 메뉴를 줄여라. 메뉴를 줄여서 회전율을 높이면 신선한 재료로 음식을 바로 할 수 있다. 옆집과 다른 메뉴를 준비하라. 경쟁하지 않고 상생할 수 있다. 이런 얘기들은 결국 지역거점의 특징을 알아야 한다는 얘기이다.
지금은 풍경뿐이지만 지자체별로 문화거점들이 생겨날 수 있다. 지역거점을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고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이들을 위한 생활공간, 네트워크와 커뮤니티 공간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런 시도들이야말로 지역과 수도권의 격차를 줄이는 일이고 역으로 수도권 사람들이 지역에서 누릴 수 있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지역에서 성장해 서울로, 수도권으로 전국으로 퍼질 수 있는 시대가 지금이다. 관광객들을 위한 장사를 해서는 성장을 하게 되어도 크게 의미가 없지만 지역거점이 지역에서 성공하게 되면 그 모델은 어딜 가도 성공하는 모델이 될 확률이 높다.(앞서 들었던 히라가타의 츠타야모델은 어디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모델이다.)
트렌드 소비가 이뤄지는 공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힙하고 트렌디함의 내구성이 떨어지고 공간의 확장성도 떨어진다. 중국에서 차브랜드인 헤이티는 중심상권에서도 근린상권에서도 성공한 모델이다. 생활과 붙어 있고 지역민들과 밀착해 있으려면 지역에서 선택받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런 곳들에 대한 반응은 '가격은 사악하지만 한번쯤은 갈만해요'라는 인증소비가 아니다. 쉑쉑버거도 처음엔 지역사람들의 커뮤니티센터 역할을 하겠다며 주변을 압도하는 건물이 아닌 주변경관과 맞춰 건물을 짓곤 했다. 경쟁이 치열한 곳에는 비슷한 업종이 밀집해 있다. 업종이 달라도 이거나 저거나 다 비슷하다. 좋은 입지, 더 화려한 인테리어, 더 큰 규모를 위해 더 많은 투자를 해야만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완벽한 승자독식의 논리이다. 지역에서 지속가능하려면 건강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 주변 상점에도 지역민에게도 좋은 이웃, 걸어서 올 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