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눅진한 브라우니 May 23. 2024

공동정범

영화 이야기

2009년 1월 19일

용산지역 철거민들과 전국 재개발지역 철거민 연대가 모여 용산의 어느 건물 옥상에 망루를 지었다. 이곳에서 용산철거에 대항해 함께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다음날 1월 20일 오전 6시경부터 출동한 경찰들이 물대포를 쏘며 진압을 하기 시작했다.

옥상에 세운 망루 위로 경찰 컨테이너가 접근했다.

물대포를 쏘고 컨테이너에서 파이프로 망루를 뚫고 최루가스를 발사했다.

건물 3층, 4층에 있던 철거민 연대 사람들이 위로 위로 도망쳐 망루로 들어가 있었는데(대피하라고 크게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물대포와 최루가스로  눈도 못 뜨는 상황 속에서 누군가는 대항하고자 인화성 물질을 뿌리기도 했다.

쿵쿵하는 소리와 망루가 흔들리고 어느 순간 모퉁이 밑에서부터 불길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backdraft처럼 갑자기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뛰어내릴 거야!!

망루의 창으로 사람들이 탈출을 시도했다.

줄을 서서 한 사람씩 아비규환을 뚫고 나오고

건물 난간을 넘어 누구는 밑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뛰쳐나왔는지 옆에서 누가 도와줬는지 누가 누굴 밀치고 먼저 살겠다고 뛰쳐나갔는지

사실인지 오류인지 모를 기억의 혼돈과

떨어져 다친 몸과

정신적 충격이

그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철거민 쪽 5명 경찰 1명이 사망했다.

망루 화재원인을 철거민들이 던진 화염병이라고 단정 지었다.

용산철거민 1명 외 4명은 공동정범으로 기소된다.


2014년 6월

참사 5년 5개월 후

출소 후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생각들이었다.

온갖 번민들...

만약에 이랬다면 저랬다면 하는 가정들..

어느 누가 이런 결과가 벌어질 줄 알았을까.

이미 벌어진 일을 두고

치밀하지 못한 재판의 대가를 치르고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나도 아물어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이충연 씨 (서울 용산 4 구역 철거민 대책위원장)

그 참사로 함께 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농성 때 누구보다도 결의에 차 있었다.

동지들, 대피하시오!라고 크게 외쳐서 망루로 대피해서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창문을 통해 대피한 것을 자책하고 있다.

겨우 꺼낸 이야기였다. 웬만하면 자세한 얘길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선동주자였는데 아버지와 동지들을 뒤로하고 먼저 빠져나온 일이 스스로를 괴롭힌다.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과의 연대를 꺼린다.

술 먹고 어영부영 한풀이하는 것이 싫다고 했다. 그럴 시간이면 진상규명을 위한 공적싸움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재판 당시 모든 걸 부인하기도 했다.

무조건 부인하고 봤다. 용산철거민 모두가 재판에서 일단 부인하고 봤다. 그 결과로 모두가 터무니없는 징역을 살게 되었다고 공동정범으로 기소된 몇몇(전국철거민연대)은 원망의  소리를 한다.


김창수 씨(성남 단대동 철거민)

전국철거민연대 소속

전기를 만질 줄 알아서 망루에 전기선을 연결시켜 달라는 부탁으로 그날 현장에 있었다.

현장, 망루에 대피해 있었다는 이유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고 출소 후 집에 와보니 아내는 암투병 중이었다.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한편으로 자신을 이해 못 하는 아내가 야속하다고 내비치지만 누구보다도 가정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큰 대의 때문이라기보다 연대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있었는데 4년을 옥살이를 해서 억울하기도 하다. 아이가 아빠의 수의 입은 모습을 티브이에서 본 것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여하튼 아빠는 죄인은 아니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진상규명이 이제는 주어진 일인데 도대체 이 시점에서 어떤 걸 규명해야 하는가.. 진실이란 게 있긴 한가? 회의감이 들었다.


지석준 씨(서울 순화동 철거민)

전국철거민연대 소속

용산화재 때 난간에 매달려 추락했다.

망루 안에서 빠져나올 때 옆에서 도와준 순화동철거민 동지였던 윤용현 씨 이성수 씨에 대한 미안함에 괴로워한다.

건강이 안 좋아지니 추진력도 자신감도 떨어졌다.

다시 그날이 오면 그 자리에 갈 수 있을까?

난간에 매달려 있던 몇 초 동안 가족의 얼굴이 빠른 필름처럼 돌아갔다.

떨어지면서도 불에 타 죽느니 떨어져 죽어야 시신을 그나마 알아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죽을 줄 알았는데 살았다. 부상덕에 징역형은 면했다.

살아난 이유가 뭘까.. 억울하게 희생된 윤용현 이성수를 알려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경찰에 대한 불신, 타인을 경계하게 되었다. 사람이 두렵다고 했다.

천주님께 기도하면 가슴이 파스 바른 듯 시원해진다고 했다.


김주환 씨(서울 신계동 철거민)

전국철거민연대 소속

망루를 짓는 일에 동원되었는데 지으면서 창을 내는데 너무 작아서 좀 크게 늘렸는데 그곳으로 탈출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했다.

징역 5년을 선고받음.

출소 후 악몽 망상 분노조절장애에 시달린다.

혼자 살며 식물을 키운다. 말이 없는 식물을 보며 치유받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술을 자주 마셨는데 어느 날은 사람들과 시비가 붙어 경찰서에 연행되기도 했다.

망루 안으로 최루가스가 살포되었을 때 세록스(인화성 물질)를 뿌린 것이 후회된다고 했다. 용산과 연대는 다르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천주석 씨(서울 상도4동 철거민)

전국철거민연대 소속

2008년 상도동 철거가 확정된 뒤에도 남아서 살고 있었다. 정 나누며 소박하게 살고 싶었던 만큼 강제철거에 반감이 컸다.

용산참사 당시 망루에서 빠져나가려고 줄 서 있는데 어느  누구가 순서도 없이 살겠다고 제일 먼저 나갔다고 했다.

그 이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상황이 급박해져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했다.

사람에 대해 실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컸다.

그만큼 사람에 대한 정도 큰 사람인 것 같았다.

출소 후 아무와도 연락하지 않았고 일도 못하고 그냥 많이 돌아다녔다.

혼자선 트라우마 극복이 힘들었다. 이 괴로움을 아는 이들은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이들뿐이었다.

뒤늦게 연락을 했다. 만나서 얘기 나누며 공감하고 일도 하고 싶었다. 연대 쪽 사람들은 만났는데 용산 쪽 사람들은 만나지지 않았다. 이충연이 막고 있다는 얘길 들었다. 감정이 안 좋아졌고 불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용산참사는 용산싸움이 아니고 연대싸움이라고 강조했다.


영화는 용산참사에 초점을 맞췄다기보다

이 대형참사 안에 있던 이들의 심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데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보면서 이러한 모습들이 저들만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떤 큰 일을 겪었을 때 혹은 사회생활 학교생활.. 아님 가족 안에서의 불협화음, 생각의 차이, 상처를 감추려고 벽을 치는... 그런 일들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니까.

자책감에 빠져서 벽을 만들고 웅크리고 있는 것,

생사의 갈림길에서 나도 모르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누구에겐 실망스럽고 상처가 되고,

이해보다 판단하는 것, 가족 동료에 대한 미안함,

시간이 가면 가라앉다가도 휘저으면 일어나는 트라우마..

누가 이해해 줄 수 있을런가.

가장 이해할 수 있는 이가 또 가장 미울 수도 있는 현실을..


그들의 억울함이 풀릴 수 있도록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응어리는 풀어나갔으면 좋겠다. 영화가 2018년에 나온 거니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궁금하다.

덕분에 그들의 심정을, 용산참사의 실체를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아가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