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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un흔 Sep 02. 2020

강아지 대식구. 3편

다시는 반려견을 키우지 않을 거야.

 FINAL. 눈에 담겨있고 마음에 담겨있는 나의 가족, 나의 반려견 


 그들과의 이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고, 나는 그들을 보낼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렇게 갑자기, 짧은 간격으로 다섯 식구와 이별하는 시기를 맞았다.

 민우는 처음 집에 올 때부터 최소 5살은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함께 할 시간이 짧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2010년 가을, 민우는 갑자기 숨을 헐떡이며 작은 머리가 뜨끈뜨끈할 정도로 열이 나기 시작했다. 병원에 갈 채비를 하는데 이내 숨을 쉬지 않는다며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민우가 가장 먼저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이 되었을 무렵, 8살이 된 은비는 기관지 협착증이라는 소견과 함께 나이가 있어 수술은 어려우니 항상 주시해야 한다는 수의사 선생님의 주의를 들었다. 그리고 그동안 금비도 방광결석으로 한차례 수술 후 꾸준히 치료를 받고 있었다.

 1년간 아이들은 병원을 수없이 오가며 치료를 했고 은비는 슬개골 탈구까지 있어 산책도 짧은 시간으로 최소화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민우를 보낸 지 1년 뒤 2011년 겨울, 항상 야근이 잦았던 나는 웬일인지 그날 일찍 퇴근할 수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 어머니는 종일 은비가 기운이 없다며, 밥 먹기를 거부한다 했다. 저녁 8시,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은비를 안았다. 평소에는 제발 안겨달라 애원해도 곁도 잘 내주지 않던 은비는 가만히 안겨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프다고 낑낑대는 것도 없이 점점 눈동자의 반짝임이 흐릿해졌고, 숨을 헐떡이던 분홍빛 혀는 보라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렇게 15분 만에 은비는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안긴 채로 강아지 별로 떠났다.


두 번째 꼬물이 은비


 그렇게 한 달이 갓 지났을 무렵 해가 바뀌었고,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때 외갓집에서 전화가 왔다. 장군이 다리가 점점 안으로 휘어지고 보행이 어려울 정도로 이상하다고. 장군이를 아끼셨던 할머니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많이 놀라셨던 것 같다. 가깝게 사는 친척이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기로 했고, 두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또다시 연락을 받았다.

 검사를 하던 도중 장군이는 검사를 하기도 전에 강아지 별로 떠났다. 어릴 적 문제가 있던 다리를 미리 검사해보지 않았던 탓일까. 은비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은 장군이와의 이별은 바로 옆에 두고 맞이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컸다.


 세 번째 이별을 겪고 난 상처를 위로해 준 건 뽀미와 금비였다. 동시에 또다시 이 아이들과의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너무나도 괴로웠다. 더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싶었지만, 20대의 나는 어머니에게 두 마리의 강아지 동생을 맡기고 일에 몰두했다. 그나마 산책을 해주는 것, 외갓집에 함께 가는 것, 두 가지가 전부였고 여러 곳에 데리고 가지 못했다.


 병원 초입에서부터 버티기 시작하는 뽀미는 주기적인 건강검진이 쉽지 않았다. 검사라도 진행하려면 마취까지 고려해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건강하던 아이가 구토와 설사를 하기 시작했고, 한쪽 어깨가 다 긁혀가며 억지로 병원에 데리고 가서 검사를 했다. 뽀미는 자궁 축농증이었고 심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틀 뒤 토요일에 바로 수술을 잡았다. 이틀 동안 입원을 시킬까 하다 워낙 병원 스트레스가 심한 아이라 집에서 케어하는 것이 좋다 판단했고, 수의사 선생님도 의견에 동의하셨다.


"한 달 전 금비의 두 번째 방광결석 수술도 잘 끝났고, 뽀미는 워낙 건강하니 괜찮을 거야"


 두려움이 몰려왔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내 탓이었다. 뽀미도 금비도 모두 중성화를 하지 않았고, 중성화를 하지 않은 암컷 강아지에게서 흔히 발생하는 질병. 방광결석과 자궁 축농증.

 수술을 앞두고 따뜻한 방 안에서 뽀미는 눈을 감았다. 아이들을 강아지 별로 보내는 일에 익숙해질 법도 할 텐데, 항상 처음 같은 슬픔이었다. 



 이제 금비만 남았다. 그때는 몰랐다. 나는 펫로스 증후군의 고통을 점점 키우고 있었다.

 금비와 더 많이 산책하고, 더 멀리 산책했다. 조금 걷다 힘들어 보이면 들어 안아서 걷고, 집에서 걸어서 40분 거리인 한강을 많이 보여주었다. 다둥이집 질투 많은 넷째 금비는 혼자만의 산책, 혼자 받는 관심이 좋았던 걸까. 이전보다 더 애교를 부리며 계속 손길을 요구했다. 


 "그래, 더 많이 예뻐해 주고 좋은 곳을 많이 보여줄게. 추억도 많이 만들자."


외동으로 자랐으면 더 좋았겠지, 금비야


 지나간 강아지 가족과 이별한 아픔을 금비와 함께하며 잘 견뎌내고자 했다. 한동안은 야근 대신 집으로 일을 가져와서 하는 것을 선택했다. 금비는 노트북을 하는 내 손을 항상 잡아끌어 놀자고 했다. 다둥이였을 때 누리지 못했으니, 실컷 놀아주고 듬뿍 사랑을 주었다. 외동이 된 금비를 위한 예쁜 새 집과 하네스도 마련해주었다.


 혼자만 쓰는 새 집이 너무 소중해서였을까. 금비는 폭신한 새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걱정되는 마음에 어머니는 푹 끓여낸 황탯국에 사료를 불리고, 소고기를 삶았다. 단 한 번도 으르렁 소리를 내지 않았던 금비가 먹기를 거부했다. 출근해야 하는 조급한 아침에 이 녀석은 속상한 내 마음도 모르고, 먹지 않겠다며 손을 물어 상처를 냈다. 정말 먹고 싶지 않구나.


"엄마, 회사 갈 테니 병원 문 열면 바로 데리고 가주세요!"


 따뜻한 봄날,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그치지 않는 울음소리와 어렵게 이어가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나는 3년 동안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강아지 동생들을 강아지 별로 보냈다.




뽀미  1999. 04. 10 - 2013. 01. 17

■ 은비  2002. 06. 23 - 2011. 12. 08

■ 민우  2003. 04. 02 - 2010. 09. 04

■ 금비  2004. 04. 10 - 2013. 04. 26

■ 장군  2005. 02. 25 - 2012. 01. 19








  epilogue. 다시는 반려견을 키우지 않을 거야. 


 어쩌다 보니 다둥이 가족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그 끝에 있는 이별에 대한 준비는 충분히 하지 못했다. 요즘은 그 상처를 "펫로스 증후군"이라 해서 충분히 위로해야 하는 상처로 여기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강아지 죽은 일로 유별나게 구는 사람으로 여기기 십상이었다. 

 혼자 회사 화장실 구석에서 울고, 눈이 시뻘게져서 업무도 손에 안 들어왔던 것 같다.


 방울이가 오기 전까지도 강아지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버릇처럼 몸에 길들여진 것들이 많았다. 식탁에서 뭐라도 떨어지면 황급하게 집어 올리거나 닦는 것, 탁탁 탁탁 발톱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던 환청, 침대에 누우면 바로 밑에 있는 것 같은 착각 등등.

 강아지를 키우지 않는 5년 동안 내내 이 버릇은 나아지지 않았다. 익숙함에서 오는 허탈함이었고, 비어있는 자리에 대한 공허함이었다. 이전에는 꺼내보지 못했던 몇 장 안 되는 사진들을 이 글을 쓰며 꺼내보았다.


 여전히 마음이 쓰라리고 아프다. 더 잘해주지 못한 것만 같아 아쉽다.

 지금 방울이가 누리고 있는 것들 중 그때의 반려견들에게 필요한 작은 것 하나라도 해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의 아이들이 그나마 인식이 나아진 지금 시대에 살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과 함께여서 진심으로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다행히 사진에서 다둥이들의 모습이 밝아 보여서, 나와 함께했던 시간이 행복했겠지 내심 기대해본다.


 반려견을 입양할 때에는 단순히 시작만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전의 아이들과는 달리 방울이를 데리고 오기까지 정말 많은 고민을 했고, 다시 가족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다둥이를 데리고 올 때에는 책임감에 대해 지금보다는 잘 알지 못했던 미성년자였지만 방울이는 달랐다.


언니, 오빠들에 비하면 넌 지금 호화롭게 살고 있어!


  입양과 동시에 이별도 함께 생각하여야 하고, 강아지마다 각각의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내가 책임질 수 있는 한계와 범위를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만약 우리 가족이 모란시장에서 뽀미를 데리고 올 때에,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 다 데리고 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다섯 마리의 다둥이 이 외에 단순한 동정심만으로 더 많은 아이들을 입양했다면?

 그것은 당연히 한계를 넘어선 것이고 애니멀 호더에 불과했을 것이다.

 

 반려견을 가족으로 맞이하는 과정 또한  중요하다.


 얼마 전, 유기견 보호 센터에서 입양한 지인의 반려견의 사연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 주인이  "전문 브리더"라는 분양 업자에게 팔아넘겼고, 그 전문 브리더라는 파렴치한은 근친 교배를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건강이 좋지 않아 지자 필요성이 없어졌는지 추운 겨울에 2시간이나 떨어진 낯선 산에 유기했다.

 유기되어 산속을 헤매던 작은 상처 받은 생명에게 지인은 따뜻한 보금자리와 가족의 사랑을 선물하였고, 그로 인해 반려견으로부터 더 큰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다. 


 우리나라에 "전문 브리더"라는 사람이 있긴 할까?

 강아지 공장이 난무하고 펫 샵이 보편화되어있을 뿐 아니라 반려견을 상품화하는 것이 일반화되어있는 우리나라에서 그저 포장만 좋게 한 것일 뿐 일반 펫 샵과 다른 것은 1도 없다. 무조건 유기견만 데리고 오세요!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펫 샵, 전문 브리더(?)라 칭하는 곳에서 사고 팔 고의 개념으로 입양하는 것을 지양하자는 것이다.

 


건강한 반려 동물과 가족이 되어 오랜 시간 추억을 나누며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다른 이유라면,

  당신은 입양할 자격이 없다.

펫로스 증후군을 겪지도 않을 것이고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 언젠가 마주할 방울이와의 이별도 상상할 수 없이 힘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이 아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행복한 강아지로 만들어주려 한다.








 ▶ 강아지 대식구,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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