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휴리릭 Oct 17. 2023

38화 - 다른 누군가와 눈맞춤 된 적이 있었다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유준아! 우리 이제 나가서 저녁 먹을래? 나 이제 배고프다.”          

 주스로 급한 불은 껐지만 내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난 지 오래다. 문득 내가 눈맞춤 세계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시계를 봤다. 어느샌가 시계는 멀쩡하게 작동되고 있었다.     

     

 “응. 좋아! 뭐 먹지?”               

 라영이와의 눈맞춤 시간은 조금 허무하게 끝났다. 물어보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다. 그래도 라영이가 내게 분명 호감 이상의 감정이 있다는 건 확인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응? 눈싸움하다가 갑자기 저녁 메뉴를 물어봐? 나한테 맛있는 거 빨리 사주고 싶어서 그래?"       


 아, 맞다. 눈맞춤 세계에서 나눴던 대화는 라영이는 전혀 기억을 못 할 텐데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해 버렸다.       


 "너무 배고파서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와 버렸네. 어디 갈까? 내가 맛있는 걸로 사줄게!"         


 라영이와는 분식집에 갔다. 허름해 보이는 곳이었지만, 떡볶이 맛이 일품이었다. 내가 계산하겠다는 걸 라영이는 극구 말렸다. 꽃 사러 다니느라 고생도 했고 엄마 꽃가게까지 왔으니 당연히 자기가 계산하는 것이 맞다고 했다. 영만이나 정혁이었으면 가차 없이 내기 결과에 승복해야 했을 텐데 라영이는 클래스가 달라도 확실히 다르다.               


 “이제 집으로 갈 거지? 집까지 바래다줄까?”

 “아니야.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집으로 가. 난 꽃집 정리 좀 하고 들어가야지. 내일 아침에 정리하기에는 너무 정리할 게 많은 것 같아서.”

 “알겠어. 그럼 내일 봐!”            


 저녁만 먹고 헤어지기에는 아쉬웠지만 오늘은 라영이를 더 붙잡지 않기로 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유난히 환하게 뜬 달빛은 내 앞길을 환하게 비춰줬다.         

  

 오늘 난 라영이에게 꽃을 주는 데 겨우 성공했고, 내 마음을 어느 정도 보여줬다.   

             

 라영이와의 눈맞춤 시간 동안 생각보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하지만 라영이의 마음을 확인했다. 저 많은 장미꽃들 중에 내 꽃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 같은 날 나와 흔쾌히 저녁을 먹고 심지어 저녁까지 사준 걸 보면 내 꽃에 대한 라영이의 대답은 확실하게 들은 거나 다름없다.          


 아, 그리고 장모님... 은 아니지만 여하튼 라영이 어머님께 인사도 제대로 드렸다.

              

 하지만 이 날 내가 라영이에게 내 마음을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라는 걸 이때는 몰랐다.               


 ***        

                   

 그러고 보니 나라와 한 번 눈맞춤 된 적이 있었다. 나라와 이야기를 하다가 잠깐 딴생각하느라 내가 눈을 안 깜빡이고 있었나 보다. 교실 한복판에서 갑자기 세상이 멈췄었다.    

      

“그래서 내일은 거기 가려고. 어? 이게 뭐야? 왜 이래 이거?”

세상이 멈춰버린 걸 알게 된 나라는 눈과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규아야! 야! 말 좀 해봐! 완전 다 멈춰버렸네. 이게 뭔 일이래! 어머! 깜짝이야! 장유준! 넌 또 뭐야? 왜 너만 움직여?”

“그게 설명하자면 조금 긴데 일단 조금 진정해. 이거 무섭거나 그렇게 놀랄 거 아니야. 나는 이게 어떤 상황인지 잘 알고 있거든. 아주 잘.”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잘 알고 있다고?”

“응. 그러니까 진정하고. 일단 내 질문에 대답해 봐. 네 폰번호 뒤에 네 자리가 뭐였지?”

“나? 1304. 왜?”          


그런 거였군. 04라니... 나라는 4초면 되는 거였다니.      

    

“나라야! 진정하고 잘 들어봐. 어떤 상황인지 설명해 줄게. 일단 지금 너랑 나만 움직이고 다른 세상은 다 멈췄어. 사실 내가 좀 신비한 능력이 있거든. 네가 맘에 들어서 한 번 능력 발휘해 봤지. 너랑 둘이서만 이야기하려고.”

“내가 맘에 든다고?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제대로 설명해 봐!”

“알았어, 알았어. 너한테 이런 농담 같은 게 먹힐 리가 없지.”       

   

방금 나라의 눈빛에서 잠시 살기를 느낀 나는 서둘러 눈맞춤 세계를 설명했다.


“내가 어떤 사람의 폰번호 뒤 2자리 수만큼 그 사람과 눈을 맞추면 시간이 멈춰. 나랑 그 사람만 제외하고 모든 것이 멈추는 거지. 네 폰 마지막 뒷자리가 04잖아. 좀 전에 너랑 나랑 이야기할 때 우리가 4초 동안 눈을 맞춘 거지. 한 번도 안 깜빡이고. 그래서 이 눈맞춤 세계라는 곳에 들어온 거야.”

“헐... 이거 대박 신기하네. 진짜 꿈만 같다. 근데... 왜 하필 나랑?”

“내가 일부러 하려고 한 거 아냐. 네가 마음에 들어서 한 거 아니니까 일단 화내지는 말고. 나 원래 눈 엄청 건조해서 눈 오래 못 뜨고 있거든. 근데 너는 4초면 되니까 내가 잠깐 눈을 한 번도 안 깜빡일 때 우리도 모르게 눈맞춤이 돼버린 겉 같아.”

“그래? 어쨌거나 지금은 우리 둘만 세상에 존재하는 거네. 나름 로맨틱한데?”     

     

살기가 사라진 나라의 눈빛에 갑자기 이상한 온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한 번 안아줄까?”

나라를 이성으로 느껴본 적은 없지만 워낙 친하고 편하기에 무리수를 둬봤다.   


“이 미친놈이! 돌았나?!”

확실히 무리수였다. 나라가 저렇게 격노한 건 처음 본다.       

   

“장난이야. 장난! 사실 눈맞춤 시간이 끝나면 너는 지금 이 시간을 전혀 기억 못 해. 내가 널 안아도 너는 기억을 못 한다는 거지.”

“이거 완전 범죄자네! 신고해야겠어!”

“세상이 멈췄다니까. 신고 같은 거 할 수도 없고 어차피 너는 지금을 기억하지 못한다니까. 근데 걱정 마. 너한테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진심!”          


사실 말은 이렇게 했어도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건 아니다. 어차피 상대가 아무런 기억을 못 할 테니까 스킨십 같은 거 장난으로도 해볼까 했다.      

          

 근데 너무 불안했다. 아직 눈맞춤 법칙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내가 알고 있는 건 지금까지 경험을 통해 유추한 추리일 뿐 100% 확실한 건 아니니까.         

 

게다가 혹시나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상대가 눈맞춤 시간을 기억해 버린다면 매우 매우 곤란하니까. 지금까지 내가 진짜 원할 때 눈맞춤 시간을 만들었는데 괜히 허튼짓 했다가 눈맞춤 능력이 사라질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미래도, 라영이도, 엄마도... 눈맞춤 세계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이 아직 많은데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내 능력이 하루아침에 없어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최대한 안전하게 눈맞춤 시간을 쓰자는 것이 내 원칙이다.          


“근데 이러면 언제 원래대로 돌아가는데? 돌아가긴 해?”

“응. 걱정하지 마. 아마 5분 후면 돌아갈 거야. 물론 시계도 멈춰서 정확히 5분인지는 몰라. 그냥 내 경험상 대충 5분 인 것 같다는 거지.”

“너는 어쨌거나 이 시간이 처음은 아니라는 거잖아. 너 진짜 엉뚱한 짓 한 번도 안 한 거 맞아? 지난번 아영이 사건 범인 너 아니야? 시간 멈춰놓고 아영이 바이올린에다가 껌 덕지덕지 발라놓고?”      

    

와! 이런 추리를 하다니... 살짝 소름이 돋을 뻔했다.    


“에이, 내가 그 정도 막장은 아니다. 그리고 솔직히 이런 얼굴에 그런 범죄는 좀 안 어울리지 않나?”

“하긴. 장유준이 착하긴 하지. 얼굴도 순하게 잘생긴 편이고. 근데 원래대로 안 돌아가면 어쩌지? 아니다. 생각해 보면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어. 돈도 엄청 많이 챙길 수 있고 연예인도 쉽게 만날 수 있겠네!”  


와! 이런 생각을 하다니... 제대로 소름이 돋을 뻔했다.     

     

다음에는 은행에서 눈맞춤을 한 번 해볼까 하는 못된 생각까지 떠올랐으니까.    


“네 덕분에 신기한 경험을 해서 짜릿하긴 하다.”

눈맞춤 세계에서도 나라의 성격은 그대로다.          


“어차피 왔으니 즐겨봐. 나한테 은밀하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도 되고.”

“푸하하하. 내가 언제 은밀하게 말하는 거 봤어? 그리고 네가 잘생기긴 했어도 나 너한테 관심 없는 거 알지? 난 정혁이 뿐이다. 근데... 교실에 정혁이가 없네?!”

“정혁이 화장실 갔을 걸?”

“아쉽네! 새로운 세상에서라도 정혁이 한 번 제대로 보고 싶었는데 정혁이는 왜 이렇게도 가까워지기가 힘들다니.”          


나라는 그래도 아쉬운지 계속 교실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근데 너 혹시 스킨십 해본 적 있어?”

“스킨십? 어떤 거? 키스?”

매거진의 이전글 37화 - 536,112,000초 중에 44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