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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영 Jul 12. 2019

종이 지도의 매력

구글맵 중독자인 당신에게

가마솥 햇볕이 내리꽃히고,

땀에 절은 손으로 지도를 훑다가,

인상이 절로 팍, 찌푸려졌다

'아니 어딨냐고 대체??!!'

 


그러니까 그게 의도된 설정은 아니었다. '종이지도'를 들고다니게 된 사연 말이다. 캐나다에 몇 달 머물다가 갑자기 미국에서 처리해야할 일이 생겼다. 애초에 여행이 아닌 의무감에 해외를 방문할 때는 큰 두근거림이 없는 게 정상. 게다가 내가 머물렀던 캐나다 밴쿠버에서 미국 시애틀은 거리가 상당히 가까웠기 때문에 당일치기로 후딱 갔다올 생각이었다. '하루인데 뭘 어때' 하는 맘으로 미국달러로 환전도 안했다. 신용카드 쓰면 되니까.

그리고 이런 대충 마인드가 불고올 대참사를 나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버스에 타자마자 무언가를 깨달은 나. 이때부터 버스의 행선지는 지옥행.....

시애틀행 새벽 버스를 타고나서야 뭔가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빈 바지주머니를 자꾸 뒤적거리게 되는 마음.

"헉, 나 미국 유심 안 사가지고 왔잖아??"


나처럼 해외에서 해외를 넘어갈 때, 대부분은 현지 유심을 사거나, 휴대용 와이파이를 사간다. 왜?

현지에서 길 찾고, 연락을 하려면 데이터가 필요하니까!

현대인에게 데이터 없는 삶이란 무인도에 사는 원시인, 산소통이 없는 잠수부와 같다. 나는 갑자기 병을 뺏긴 아이처럼 심장이 콩콩 뛰기 시작했다. 놀이공원에는 미아보호소라도 있지, 머나먼 타국 USA에서 어른 한국인이 길을 잃으면 신경써줄 사람이 있을까?



버스가 시애틀에 도착하자마자 우사인볼트처럼 달려갔다. 눈앞에 보이는 지하철역으로. 대체로 지하철 개찰구 앞에 해당 지역의 지도가 비치되어있기 마련.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버텨야지.


'오늘 하루는 100년전으로 돌아갔다 치는거야, 옛날 사람들은 북극성 별빛으로도 길 찾았는데 뭘.'


아이템을 가진 자의 여유.jpg


시애틀에서 처리해야할 일은 어이없게도 1시간만에 끝났다. 내가 이걸 하려고 여기까지 왔는가, 한숨을 쉬다가 시계를 보았다. 버스 시간까지 8시간이나 남아있었다.


'어쩔 수 없다. 여기까지 온 이상 관광이나 해보자. 이 종이지도와 함께 아날로그의 매력에 푹 빠져보는 거야. 하하핫.'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이 손안의 종이에 적응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몇가지 이유를 들자면,


첫째, 종이 지도는 내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안 알려준다

내 위치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 길을 찾던지 하는데,

같은자리에서 두리번두리번 뱅뱅뱅 돌고 있으니 노숙하는 청년마저 날 안쓰럽게 봤다.


둘째, 찾으려는 건물이 지도에 없다

지도에 나와있는 건물들은 모두 랜드마크. 친구가 맛집이라고 소개해준 그 식당은 안 나와있다.

공립도서관, 쌍둥이빌딩, 전망대 모두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밥부터 좀 먹어야 되지 않을까?


셋째, 버스 정류장이 나와있지 않다

요즘은 휴대폰 로드맵이나 지도 어플로 실시간 교통편을 파악하는 시대.

일단 내가 가진 이 앙증맞은 보물지도엔 정류장 위치 정보가 아예 없었다.


넷째, 나는 길치에 방향치다

제일 근본적인 문제이자 불치병.

'200m앞에서 우회전' 라는 음성 경로 안내가 없으면 고삐풀린 망아지가 된다.



하루 동안 잠시 멀리했었던 지도&대중교통 어플들.


불행하게도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땡볕 아래서 계속 헤매는 중이었다. 땀이 주룩주룩 속옷까지 적시는 찝찝함에 불쾌지수는 더 상승. 와이파이가 제공되는 스타벅스가 곳곳에 보였지만,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고 괜한 오기를 부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밴치에서 노트북을 타닥타닥 하고 있던 잘생긴 청년에게 다가갔다.


"익스큐즈미, 아임 룩킹 포 OOO. 하우 캔 아이 겟 데얼?" (실례합니다, OOO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잇츠 마이 퍼스트 타임 히얼, 벗 아이 캔 첵크 구글맵." (나도 여기 처음이라 모르는데, 구글맵 확인해볼게.)


애써 디지털을 외면하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였기에 조금 민망했다. 훈남 청년이 날 구글맵도 이용할 줄 모르는 아시안 촌뜨기로 오해함 어쩌지? 생각되니 괜히 해명하고픈 맘도 들었다. 그 조각상 친구는 나에겐 관심 없다는 듯 스마트폰 액정 위에서 손가락으로 피겨스케이트를 탔다. 길쭉한 손가락이 이리저리 휙휙, 확대 축소 하며 시애틀 도시를 만지고 있었다. 그는 곧이어 반대편을 가리키며  '오버 데얼, 해버 굿 트립' 이라며 찡긋 웃었다. 한 여름 더위가 싹 가시는 싱그러운 미소였다.


종이 한장에 몸을 맡기면, 도로 이름과 버스 정류장을 더 꼼꼼히 보게 된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칠법 한  식당 간판이나 시계탑에서도 의미를 찾게되는 마법


길을 물어물어, 버스를 타고타고, 종이 지도에 나와있는 관광지 네 군데 이상은 어쩌다보니 다 돌았다. 방문에 성공한 곳은 종이지도 위에 뿌듯한 동그라미를 크게크게 쳤다.

유치원생 시절, 숙제한 학습지를 빨간펜 선생님 앞에 내밀고 채점을 기다린 적이 있다. 이윽고 선생님이 큼지막한 동그라미를 주렁주렁 그려주면 풍선타고 날아갈 듯 정말 신났는데. 이번 여행은 성인이 되고 내가 내 스스로에게 동그라미를 쳐준 거의 최초의 기억이 되겠지?



앞으로도 여행할 때 아날로그 지도만 쓸거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애석하게도 'No'다. 사실 너무 불편했기 때문이다. 단 하루의 여행이었지만 버스를 계속 놓쳐서 시간관리가 어려웠고, 지하철이 어디있는 지 몰라서 오랫동안 걷느라 다리가 부었다. 기껏 찾아간 가게는 셔터문이 내려가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다. 지도 어플을 사용했다면 영업시간을 사전에 확인하고 갔을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일부러라도 종이지도를 사용할 계획이다. 스마트폰 화면에서 벗어나 거리와 사람들 표정을 읽는 게 이토록 의미있는 지 정말 몰랐다. 한여름 나뭇잎들이 이렇게나 진한 초록색인지, 포크레인 옆에서 땀에 절은 작업복의 아저씨가 동료들과 아이스커피를 마실 때 어떤 표정인지를 말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 병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돌석상도 이번 기회가 아니면 그냥 지나쳤겠지.



우리는 평생을 지구별 여행자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기간이 생각보다 짧다.
최대한 많이 길을 헤매야,
최대한 많은 땅을 밟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게 곧 우리의 인생 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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