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을 밟히며 발견한 진짜 프리미엄
시중에 '프리미엄'이 판을 친다. 범람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백화점 VIP라운지부터 프리미엄 고속버스, 하이엔드 아파트, 각종 멤버십, 여행, 호텔, 미식, 공산품, 상조 서비스까지. 자본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더 높은 수준의 안락함과 고급, 고가, 화려함을 약속한다.
여기서 말하는 프리미엄의 공식은 꽤 명확하다.
더 비싼 가격을 내면 당신이 하게 될 '경험'의 마찰과 저항, 즉 불편함과 불안함을 제거해 주고, 때로는 주변에 과시할 수 있을 만한 자격을 주겠다는 무언의 제안이다. Instagramable 한 경험도 포함된다. 그래서 돈을 써야 하는 입장에서는 '프리미엄=비싸게 청구할 테니 수긍하라'라는 일종의 경고처럼 들리기도 한다.
더 높은 가격, 더 극진한 서비스, 그리고 더 넓은 좌석과 고급스러운 쿠션까지 준비했으니 비싼 비용을 청구받더라도 토를 달지 마시라는 사전 경고 말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질문해 본다.
'내가 소비하는 것은 진정한 가치일까, 아니면 단지 편리함, 화려함, 과시욕이라는 이름의 안락한 탐닉을 사는 것일까.'
우리가 '프리미엄'이라고 믿으며 소비하는 수많은 안락함을 떠올려보자. 실제 구매했던 서비스나 상품이어도 좋고,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프리미엄'이라는 라벨을 달고 소비자를 향해 주장하는 기업의 메시지나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된다.
당신은 그 메시지에서, 혹은 연상되는 이미지에서 진짜 프리미엄 한 그 '무엇'인가가 기대가 되는가?
가짜 프리미엄의 가장 큰 특징은 '(지나친) 과잉 제거'에 있다.
그들은 고객의 불편함을 제거하고, 수고로움을 제거하며, 어떤 경우에는 고객의 '개입'자체를 제거하기도 한다. 마치 어린 아기 입으로 밥을 떠 먹여 주듯이 고객은 입만 '벌리고', '씹고', '삼키기'만 하면 되는 수준으로까지 극진히 모실 각오를 내비칠 때 소비자는 그것을 프리미엄이라고 느낀다. 어떤 경우에는 벌리고, 씹고, 삼키는 소비자의 최소한의 개입까지도 생략해 버리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면서 이를 '프리미엄'이라고 등치시키는, 나가도 너무 나간 경우도 없지 않다.
쿠션을 떠올려보자.
프리미엄 상품을 결제한 나에게 기업이 제공 한 좌석이 다른 좌석보다 더 넓고 크고, 게다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쿠션이 여러 개 놓여 있어서 물 샐틈도 없는 편안함을 배려해 줬다고 치자. 이에 그치지 않고 기업은 우리의 육체를 물리적인 자극이나 피로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켜 주겠다고 편익을 약속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물론 휴식의 관점에서는, 편리함의 관점에서는 훌륭한 편익이다. 하지만 '경험과 감각'의 관점에서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게다가 당신의 경험 상 편안해지기 위해서 몇 개의 쿠션이 필요하던가?
우리의 감각은 외부와의 마찰이나 자극을 통해 깨어난다. 거친 질감을 만질 때 촉각이 예민해지듯이 말이다. 모든 자극이나 마찰이 제거된 쿠션 위에서 인간의 감각은 예민해질 필요가 없다. 편안함이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는 생생한 감각을 감지하는 기회까지 제거당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프리미엄이라는 이름으로 넉넉하게 제공된 쿠션도 결국 내가 쓰는 것은 한두 개로 충분하지 않던가?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쓰지도 않는 쿠션에 비용을 지불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이러한 '가짜 프리미엄' 또는 '유사 프리미엄'은 비즈니스 구조적으로는 효율적일 수 있다. 고객을 수동적인 수혜자로 만들수록 브랜드는 경험의 통제권을 완벽하게 쥘 수 있기 때문이다. 규격화된 친절, 오차 없는 일정표, 돈으로 환산된 편의성은 우리에게 '대접받고 있다'는 착각을 주지만, 그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매끄럽지만 빈약한 잔상뿐이다.
불편함이 거세된 자리에는 강렬한 기억이 깃들 공간이 없다.
그러면 진짜 프리미엄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인류가 오랜 기간 동안 높은 가치로 추구해 온 '진짜'들의 본질을 한번 생각해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지극히 철학적인 화제이기 때문에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그저 글쓴이의 주장이라고 이해해 주면 고맙겠다.) 우리가 막연히 연상하는 것과는 달리 프리미엄은 안락함이 아닌 불편함에 더 가깝다.
최정상급 클래식 공연을 떠올려보자. 당신은 인생에 한 번 직접 관람할 수 있을까 말까 한 클래식 공연장을 찾았다. 평소에 잘 입지 않던 복장을 갖추고, 공연 중에는 마음대로 나다닐 수도 없다. 당신은 수십만, 혹은 백만 원을 호가하는 티켓값을 지불하고도 양수걸이 안락의자가 아닌 불편할 수도 있는 연주회장의 관객석에 앉아서 두 시간 동안 미동조차 하지 못하는 육체적 제약을 감내해야 한다. 마음껏 헛기침을 할 수도 없고 앞뒤좌우의 다른 관람객에게 방해가 될까 다리를 편히 꼬고 앉지도, 습관처럼 휴대전화를 확인할 수도 없다. 이런 제약사항이 많은 공연장은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지휘자나 연주자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기 위한 긴장감이 연주회장을 감돈다.
미슐랭 셰프의 레스토랑의 미식 경험을 떠올려보자. 이번에는 당신이 큰맘 먹고 미슐랭 스타 셰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을 찾았다. 당신은 그곳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겠다고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은 애초에 허기를 달래는 식당이 아니라 미각을 느끼는 곳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테니까.
셰프가 설계한 복잡하고 섬세한 맛의 층위를 읽어내기 위해 당신은 당신의 미각과 후각을 잔뜩 민감하게 유지하는 긴장감을 놓을 수 없다. 또 때로는 셰프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지적 추론 능력까지 총동원해야 한다.
이번에는 세계적 순수 예술 거장의 작품 전시회를 갔다. 당신은 대부분의 작품 앞에서 '이건 뭐지?' 하게 될 것이 뻔하다. 대부분의 작품은 관람객에게 직관적인 이해를 허락하지 않는다. 관람객은 수수께끼를 풀 듯 작품 앞에서 온갖 사유와 추리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편견과 싸워야 하고, 선입견과 씨름해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편견을 자각하고 반성하게 되는 우울한 기분도 동반된다.
이렇듯 프리미엄이라는 것에는 의외로 불편함, 깨어있는 감각과 인식이 요구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자, 당신이 위의 가상의 경험들에서 대단한 만족감을 얻었다면, 또는 정반대로 불만족스러웠다면 그것이 위에 열거한 깨어있는 감각과 인식을 요구하는 불편한 환경 때문이었을까?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유였을 확률이 훨씬 더 크지 않을까? 명성에 비해서 연주가 엉망이었다거나 옆 좌석의 관객의 비매너 때문이었거나. 셰프의 음식이 내 취향이 아니었거나 하는 식의 이유 말이다.
우리가 이런 불편(감각과 인식을 깨우기 위해 들이는 노력을 포함해서)을 감수하는 이유는 뭘까?
'불편한 몰입'을 통과한 사람만이 오케스트라의 미세한 떨림과 지휘자의 호흡을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고, 식탁 위의 식사가 끼니를 넘는 예술적 경험으로 남길 수 있고, 작품 앞에서 나만의 해석에 도달하면서 본인 스스로의 인식이 확장되는 환희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 아닐까. 그 결과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비교적 속이 꽉 찬 질 높은 경험을 했다는 행복감. 어떤 측면에서는 지불한 가격대비 높은 만족도, 가성비 넘치는 경험을 하게 됐다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 아닐까.
끌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은 예술사에서 가장 집요하고 아름다운 집착의 결과라고 불리워진다. 30년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소재로 250점이 넘는 작품들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명확해졌다. (프리미엄 한) 그들은 고객을 수동적인 소비자로 가만 놔두지 않고, 능동적인 참여자로 격상시킨다. 그래서 편리함의 반대편이 불편함이 아니라, 감각과 인식을 더 많이 요구하는 상태로 고객을 초대해서 수준 높은 행복감과 만족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편리한 좌석과 쿠션, 화려함, 올 인클루시브(All inclusive) 따위의 요소들은 진짜 프리미엄의 필수가 아니라 옵션으로 전락해 버리게 된다. 그래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의 경험을 하나 소개할까 한다.
이 경험은 프리미엄 한 것일까 아닐까?
3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젊은 시절 유럽으로 출장을 간 적이 있었다. 마지막 목적지가 이탈리아 로마였고 그곳에서 예정했던 업무를 모두 마치고 귀국까지 하루 정도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나는 하루 종일 로마의 이곳저곳을 그야말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보기로 했다. 지역에 대한 배경지식도 없었고 명소를 돌아보자면 선택의 고통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는데 앞선 출장일정으로 인해 그 정도까지 쓸 에너지가 이미 고갈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배회하다가 길가에 세워진 아주 작은 A보드(유럽 식당 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A자 형태로 세워두는 작은 칠판 모양의 광고판)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손으로 쓴 영어와 이탈리아어가 뒤섞인 광고였는데 얼핏 'Vivaldi'라는 단어가 눈에 띈 것이다. 비발디라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바로크 음악가 중 한 명인데...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딱히 무엇을 할지 마음을 정하지는 못한 상태라서 이것이 음악회 연주에 관한 광고라면 들을 용의가 있었던 것이었다.
'Antonio Vivaldi, Four Seasons, Concert' 그리고 날짜가 바로 오늘, 시간도 20분 후였다.
'이거다!!'
목적도 목적지도 없이 떠돌아다니던 내가 로마라는 곳에서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적절한 경험이라고 직감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장소가 쓰여있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이런 연주를 할 공연장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닌 너무나 소박한 동네였다. 광고가 적혀있던 A보드는 식당 바로 앞에나 세워 놓을 만한 크기와 수준의 광고판이었기 때문에 어디 거창한 곳에서 연주회가 열리는 것을 굳이 여기에 두고 홍보할 일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장소를 어떻게 찾아내야 할지가 더 막막했던 것이다.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혼란에 빠져 있던 그때, 내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택시 안에서 드레스와 턱시도로 잔뜩 멋을 부린 한 쌍의 젊은 남녀가 내렸다. 외국 영화에서나 보던 클래식 공연 관객 같은 차림새였다. 순간, 나는 저 사람들이 그 연주회 관람을 위해 차려입은 관객이라고 직관적으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 사람들을 따라가면 연주회장에 갈 수 있겠군!'
그 사람들의 동선을 주의 깊게 살펴보려고 했던 그때, 허탈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고개를 왼쪽으로 180도만 돌리면 2m 앞에 보였을 아담한 석조 건물의 출입구로 쏙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여기라고?!'
수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3~4층 높이의 오래된 건물들(1층은 기념품점이나 작은 상점들이고 위층은 거주용으로 보이는, 요즘으로 해석하자면 주상복합건물)이 나란히 서 있는 건물들 사이에 역시 오래되어 보이는 예배당(개신교회인지 성당이었는지는 살펴보지 않았다. 중요한 정보도 아니었고.)이 있었고, 그곳에서 비발디의 사계 연주를 한다는 광고글을 A보드에 적어서 바로 문 앞에 세워 둔 것이었는데 나는 그곳이 연주회장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경험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우리가 소위 말하는 클래식 음악들의 기원이 종교음악이기도 하고, 그 음악이 주로 연주되었을 옛 성당이 현대의 연주홀 못지않은 음향환경을 갖추고 있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마저도 노트르담이나 웨스트민스터, 슈테판 성당 같은 랜드마크를 떠올렸지 이런 동네의 개척교회스러운 크기의 예배당에서 연주회를 열 줄이야. (생각해 보면 안 될 것도 없는 일인데 그 선입견을 극복하고 눈앞에 보이는 것을 직시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 줄이야.)
몇 발짝 옮겨 한 쌍의 남녀 커플이 들어간 예배당의 출입문 안을 들여다봤다. 방문객을 맞이하는 작고 아담한 공간이 있었는데(그곳이 예배당이라는 것을 여러 가지 잡다한 예배 관련 홍보물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그때 비로소 알았다.) 그곳에 소박한 테이블을 놓고 연주회를 안내하는 현지인 두 명이 앉아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마침 이곳이 그 공연장이 맞다고 하더라도 내 행색이 예의 없는 외국인 관광객이었기 때문에 입장이 거절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 위해 반바지에 쪼리 차림이었으니까.
"여기가 비발디, 사계 공연장이야?"
"응, 맞아." 안내 데스크에 있던 분이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곧 공연이 시작되는 것 같던데, 나도 들어가서 연주를 들을 수 있을까? 복장이 이렇지만.."
"응. 상관없어. 몇 명이야?"
우려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유쾌하기까지 한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나 혼자야."
"어디에 앉고 싶어? 일반석과 VIP석이 있어."
테이블 위에 놓인 가격 안내를 힐끗 봤다. 말도 안 되는 싼 값이었다. VIP석 가격이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클래식 공연 티켓비의 절반도 되지 않아 보였다.
"VIP석으로 부탁해."
"인터미션에 음료도 신청할래?"
"음료가 어떤 것들이 있는데?"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
나는 화이트와인을 신청하고 즉석에서 발급받은 VIP석 티켓을 손에 쥐고 연주장으로 들어갔다. 연주장이라고 해봐야 안내 데스크 바로 옆에 있는 출입문으로 들어가는 게 전부였다. 예상은 했지만 놀랍게도 그곳은 콘서트홀이 아닌 그냥 교회의 예배당이었고 바닥과 천장, 용도 모를 가구며 장식들이 수백 년은 되어 보였다.
날 놀라게 한 것은 오히려 청중석이었다. 관람석이라는 게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여러 명이 함께 앉는 교회 나무벤치였다.
'오, 유럽도 우리나라 교회 의자와 똑같은 벤치를 쓸 줄이야.'
그리고 VIP석이라는 게 맨 앞줄 자리였다. 하하.
강대상(설교자가 설교를 하도록 만든 높은 단) 앞, 즉 맨 앞줄 목사님(또는 신부님) 침 튀는 자리.
관객들의 복장도 제각각이었고 무대나 음향 시설도 따로 없었다.
곧이어 연주자들이 입장을 했는데 무대나 음향기기도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도대체 그들이 어디에서 연주를 할지도 꽤 궁금했는데 연주자들이 강대상과 VIP석 사이의 그 공간에 자리 잡고 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와 가까운 연주자는 내 무릎으로부터 약 1.5m 떨어진 곳에 서있다!
'오, VIP석 맞네!'
연주자들은 고풍스러운 바로크 시대의 복장을 입고 있었다. 원전 연주였나 보다.
비발디의 사계 연주가 시작됐다.
실내악이 그렇듯 지휘자가 없이 콘서트마스터로 보이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전체 연주를 리드했다. 그러다 사고가 발생했다. 연주에 집중한 나머지 콘서트마스터가 조금씩 조금씩 내 쪽으로 오는가 싶더니 급기야 연주 중에 내 발을 밟아버렸다. 콘서트마스터는 당황해하며(그렇다고 연주를 멈출 수는 없었다.) 연주를 하는 채로 나를 바라봤다. 당황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연주자에게 발을 밟히다니!!
당황한 우리는 서로 '미안해, 몰랐어!', '아니야, 괜찮아!'의 눈빛을 순식간에 교환했다. 콘서트마스터는 그 의미를 분명히 하듯 살짝 웃어 보였고 나도 미소로 답했다. 그리고는 '그렇다면 답례로 엄청난 연주를 들려주지.'라고 작정이라도 한 듯 다시 연주에 몰입했고 완벽하게 실내악단의 연주를 이끌었다. 어떤 것에 몰입한 사람들을 보는 것은, 그 보는 것만으로도 벅찬 감동을 주는 경우가 있다.
모든 것이 엄청난 경험이었다.
나에게는 클래식 연주의 수준과 완성도를 분별할 안목이 없다. 겨우 유명한 클래식 곡이나 작곡가에 대한 상식선의 지식을 클래식을 힘들어하는 보통사람들 보다 몇 개 더 아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때가 비발디의 사계 중 유명한 서너 곡 정도밖에 들어 본 적이 없었던 내가 전 곡을 감상하는 첫자리이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이 모든 것은 엄청난 경험이었다. 연주자들의 표정, 격정적인 연주, 온몸으로 전해지던 현악기들의 울림. 조그만 동네의 이름 없는 예배당 천장이 덩달아 높아 보이고 장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창조주가 만든 사계절을 불세출의 천재 작곡가 비발디가 음악으로 만들고, 지금 이 순간 천사들이 연주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찬양하듯 연주하는 모습으로 느껴졌다.
연주장을 나서니 이미 밤이었다. 연주자들의 생생한 연주를 들으면서 나도 얼마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긴장했던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런 연주회를 경험하고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연주회장에서 숙소까지 어떻게 갔는지, 가는 동안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 흥분감에 도저히 그냥 숙소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날 숙소에서 쉬기로 결정하고 외출하지 않았던 동료를 굳이 숙소 앞의 펍으로 불러내서 맥주와 와인을 시켜 놓고 오늘의 경험에 대해서 흥분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도대체 무엇에 흥분했을까. 분류를 해보자면 세 가지로 구분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의외성이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 예컨대 연주회, 친절한 사람들, 무대가 없는 연주회장, 착한 가격, 반바지 차림의 관광객으로서 얻은 과분한 기회들에서 받은 만족감과 즐거움.
둘째, 맥락이 주는 희소성이었다. 기술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음향을 구현하는 콘서트홀이 아닌 로마의 오래된 예배당은 수백 년의 시간을 '보존'하고 있었던 연주회장이었다. 기술이나 스토리로 복제할 수 없는 '역사적 맥락'은 그 자체로 대체 불가능한 프리미엄 요소가 되었던 것 같다.
셋째, 초밀착 교감이 주는 정성적 감정의 극치를 맛본 경험이었다. 무대도 없는 연주회장에서 연주자들의 표정이나 눈빛과 연주를 눈과 귀와 온몸으로 감상하고 급기야 내 발이 연주자에게 밟히기까지 했던 초밀착, 콘서트마스터와 서로 눈빛과 표정을 주고받았던 교감 경험.
내가 구입한 티켓 가격이나 연주의 환경은 냉정히 말해서 프리미엄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궁극적인 프리미엄을 맛봤다.
왜일까.
내 경험은 비싼 가격을 치른 '럭셔리'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내가 기존에 경험했던 그 어떤 가치들과도 비교 불가일 만큼 밀도가 높았던 경험이었다.
현대의 일반적인 '프리미엄 가치' 산출 공식이 "가치 = (정성적+정량적 만족감) ÷ 가격"이라고 가정한다면 내가 경험한 '프리미엄'은 "가치 = (정성적+정량적+본질적 만족감) ÷ 잡음"의 공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본질적 의미(희소성, 맥락, 서사, 교감 등을 통한 특별한 경험)가 압도적이었고, 잡음(마케팅, 과대포장, 상술, 가격 등 부수적인 포장)이 최소화된 경험이었기 때문에 내가 경험한 가치의 값이 궁극적으로 높게 느껴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주객이 전도된 것 같다.
우리가 소비하는 '프리미엄'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만한 대목이다.
결국 진정한 프리미엄이란 우리를 각성시키고, 감각을 환기시켜 준다.
마치 몽롱한 일상에서 정신이 번쩍 들게 할 기분 좋은 일을 경험했을 때처럼 말이다.
우리는 더 비싼 가격표가 우리를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환상을 품고 산다. 하지만 비싼 가격이 우리 경험의 깊이와 특별함을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단지 영혼 없는 편리함을 구매한 영수증에 불과하니까.
진정한 '프리미엄'의 경험으로 무엇을 얼마나 얻을지는 내가 얼마나 깨어있는 상태로 얼마나 개입(몰입)했느냐가 결정하는 것 같다. 나는 로마에서 수없이 많은 의외의 상황으로 자연스럽게 각성됐고, 연주에 완전히 몰입했다. 그래서 나무의자의 불편함, 옆사람과의 간격 같은 것들은 내 기억을 더 프리미엄 하게 더해주면 더해주었지, 불편함으로 기억되었다던가 발을 밟힌 불운함으로 기억되는 오점이 아니었다.
비약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관점에서 시중에 유통되는 프리미엄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은 한 번쯤 재정의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프리미엄은 타인과 나를 구별 짓는 '비싼 소유물'이나 재력의 과시를 위한 '화려함'이 아니다. 그 이상의 것이다.
프리미엄은 단순히 고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프리미엄이라는 단어의 격을 깎아내리지 말자.
프리미엄은 우리 스스로가 누리는 능동적이고 선명한 감각의 즐거움이요, 서사(Narrative)가 주인공이 되는 가치라고 생각한다. 능동적이고 선명한 감각을 통한 한 차원 높은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고, 비싸질 수도 있고, 에너지 소모가 많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제거하는 것만이 프리미엄을 추구하는 길이 아니라는 말을 꼭 한번 하고 싶었다. 전적으로 개인 취향이요, 가치관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무엇이 옳고 그른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우리, 너무 편리하고 편한 것만 찾지 말자. 프리미엄 하지도 않을뿐더러 일상이 무뎌지는 지름길이다.
가전제품의 기술 혁신을 통한 획기적인 가사노동자의 불편 제거 정도가 아닌 이상에야, 불편이 과잉 제거 된 제품이나 서비스를 소비하는 당신, 쓰는 돈 대비 그리 고급져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싫음 어쩔 수 없고. 개취 존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