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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그라운드 Sep 17. 2020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던 질문하는 예술가"

영화감독 이길보라님 인터뷰

Hey Listen은 성수동 체인지메이커 커뮤니티를 만들어 가는 헤이그라운드팀의 인터뷰 콘텐츠입니다. Hey Listen 인터뷰는 팟캐스트와 그를 요약한 텍스트로 발행됩니다. 생생한 목소리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누르시면 풀버전 청취가 가능합니다.


이번 주 헤이리슨에서는 책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의 작가 이길보라님을 만났습니다. 이길보라님은 다큐멘터리 영화 <로드스쿨러> <반짝이는 박수 소리>, <기억의 전쟁>을 만드신 영화감독이기도 한데요. 이번 책에는 네덜란드에서 영화를 공부하며 경험한 이야기들이 아주 솔직하게 담겨 있습니다. 농인 부모님을 둔 청인이라는 정체성을 긍정하며 이야기꾼으로 계속 성장 중인 그의 이야기, 많이 듣고 읽어주세요! (책도 많이 읽어 주시고요. 정말 좋습니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던 질문하는 예술가

영화감독 이길보라

*이길보라님의 프로필이 궁금하다면? 문제적 프로필 듣기

사진 어도러블 플레이스

청취자와 구독자 분들께 인사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이 이야기꾼의 선천적 자질이라고 굳게 믿고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이길보라입니다. 


농인 부모님을 둔 청인이라는 말로 소개를 자주 시작하시는 것 같아요.

제 경우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출발점이 엄마 아빠였어요. 모어로 수어를 먼저 배웠고, 나중에 어린이집에서 음성 언어를 배웠어요. 사람들이 부모님에 대한 질문을 정말 많이 했고 그 사이에서 말을 전하고 설명하다 보니 그게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청인의 세계와 농인의 세계를 오가는 사람으로서 하는 이야기를 제가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그러면서 이야기꾼으로서의 삶도 시작된 거군요.

네, 청문화와 농문화 각각의 세계에 속한 분들이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워한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알았어요. 제가 중간에서 이야기를 잘해서 서로 알게 되는 부분들이 생길 때가 좋았죠. 계속 이야기하다 보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농인을, 저를,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일을 해 오고 있어요. 

사진 이길보라님 제공

이야기를 하는 다양한 매체들이 있습니다. 그중 다큐멘터리 영화와 글을 택하셨어요.

어려서부터 글쓰기와 다큐멘터리를 좋아했고 자연스럽게 그 두 장르를 시작했습니다. 아주 어려서 고래나 상어가 나오는 해양 다큐멘터리나 자연 다큐멘터리를 좋아했어요. 돌아보면, 이 단칸방을 나서면 세상에는 저런 세계도 있다는 것을 엄마 아빠 대신 다큐멘터리가 알려줬던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엄마 아빠가 농인이라는 점이 저로 하여금 낯선 세계에 대해 더 관심을 갖게 하기도 했어요. 청사회 사람들이 낯설어하고 어려워하는 농사회가 제게는 너무나 친숙하고 아름다운 세계였으니까요. 모어의 세계이면서 엄마 아빠의 세계. 두 세계를 오가는 것이 저는 어렵지 않았고, 해양 세계든 자연 속 사막이든 크게 낯설지는 않았어요. 아마 세상은 저마다의 다양한 세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느끼며 자랐던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중간에서 이 말을 내가 부모님께 통역을 해야 하나 하는 고민하던 기억들이 있어요. 사람들이 동정과 연민의 말을 하거나 욕을 하고 안 좋은 말을 할 때요. 굳이 엄마 아빠에게 안 좋은 이야기를 듣게 할 필요도 없고, 듣게 해서 싸움이 나도 좋을 게 없으니 안 할 때가 많죠. 그런데 저는 다 들었잖아요. 사람이 이야기를 들으면, 몸 어딘가에 가서 남는다고 저는 생각해요. 손으로 그걸 통역하지 않는 대신 그 미움과 분노를 제 몸속 어딘가에서 받아내야 하는 거죠. 어릴 땐 그게 참 어려웠어요. 그 말들을 제 몸 어딘가에 받아내고, 아무렇지 않은 척 엄마 아빠를 쳐다봐야 했던 순간들. 엄마 아빠도 다 아셨을 거예요. 아무리 듣지 못해도 그 사람의 표정, 그 상황이 다 말해주거든요. 그들도 그냥 모른 척 넘어가는 거죠.


부모님께 당당함, 뻔뻔함을 물려받았다는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수어로 ‘뻔뻔하다'는 얼굴 앞에서 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 얼굴에 철판 깔았다는 동작으로 표현하는데요. 엄마가 얼굴이 두꺼워요. (웃음) 어려서부터 ‘그래 나 안 들려 그게 뭐? 그게 부끄러워?’라는 말을 자주 하셨어요. 사춘기 때 제가 엄마를 조금 부끄러워했던 때가 있었는데, 그러면 엄마는 ‘그럼 너 나가. 넌 내 딸 아니야'라고 당연하게 말했어요. 저는 당연히 굽히고 들어갔죠. 갈 데도 없고. (웃음) 그러면서 엄마가 스스로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내가 감히 어떻게? 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럼 나는 엄마의 뻔뻔함을 물려받아 뻔뻔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겠다 하는 생각을 했죠.


그런 상황에서 미안해하는 부모님들도 많을 것 같은데요. 지금 돌이켜보면 당당하게 반응하신 쪽이 더 좋았다고 느끼세요?

너무 당연히 엄마가 미안해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잘못한 게 없으니까 미안해할 것도 없죠. 농인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잖아요. 엄마가 아니라 세상이 잘못하고 있는 거죠. 모두에게 평등한 환경을 만들지 못한 잘못은 사회에 있는 거잖아요. 자신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엄마 아빠의 태도로 인해 저도 저의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로서의 정체성을 긍정할 수 있었어요. 아마 엄마 아빠도 그런 태도를 갖지 않았다면 살아내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특히 우리 가족을 벗어나면 이상하게 보고 불쌍하게 바라보는 한국 사회에서는요.


사진 알라딘

이번에 쓰신 책이 네덜란드 유학 경험을 풀어낸 에세이입니다. 우선 3쇄 축하드리고요. (웃음) 네덜란드 사회는 좀 어떻던가요?

당연히 두 사회 중 어디가 더 좋다 나쁘다를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름'에 대해 열려 있는 정도로만 보면 한국은 아직 많이 닫혀 있다고 느껴요. 네덜란드의 경우 지리적인 위치와 환경으로 인해 예전부터 다양한 문화가 섞여 들고 발전할 수밖에 없었죠. 그렇다 보니 제가 겪은 농문화나 코다로서의 정체성이 장애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수많은 문화 중 하나로 설명돼요. 그걸 네덜란드에서 체감했어요. 한국에서는 제가 아무리 목에 힘주고 농문화가 독자적인 하나의 문화라고 이야기해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몸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느낌이 있거든요. 결국 그냥 장애 아닌가, 안 들리고 말 못 하는 사람들 아닌가 하는 거죠. 농인들이 언어를 갖고 있다거나 문화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해요. 장애가 결국 다름의 종류 중 하나인데 한국사회는 아직 그 다름을 받아들일 준비는 좀 덜 되어 있다고 느껴요. 그저 어떤 손상이나 결핍으로만 읽힌다고 할까요.


한국은 보편성에 대한 집착이 유독 심한 나라인 것 같기도 해요.

보편적이라는 것은 사회에 따라 국가에 따라 시대에 따라 언제든 변하죠. <마서즈 비니어드 섬 사람들은 수화로 말한다>라는 책이 있어요. 마서즈 비니어드라는 섬에 우연히 유전적으로 청각장애인의 비율이 높은 사회가 형성됐었다고 해요. 옆집 딸도, 방앗간 집 아들도, 철공소 사장님도 수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수어를 배우게 되고, 그들을 장애인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책에 그 섬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섬의 청각장애인인 분'이라고 하면 아무도 기억을 못 합니다. ‘철공소 집 아들'이라고 하면 다들 기억해요. ‘그 친구랑 대화할 때 우리는 수어를 사용했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믿는 보편성이라는 것은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우리는 언제든 소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해요.


워낙 ‘다름’에 대해 열려 있는 네덜란드 사회다 보니, 처음 감독님의 이야기를 발표하던 때에도 생소한 경험을 하셨다고요.

한국에서 제 이야기를 발표할 강연이나 특강이 많았어요. 처음에 사진을 한 장 띄워요. 그리고는 거기 나오는 사람들이 저의 엄마 아빠고,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들에게 태어나 모어로 수어를 배우고 수어로 옹알이를 했다고 하면 다들 깜짝 놀라요. 사진으로 보면 다른 게 없어 보이니까 더 많이 놀라죠. 어떤 지점에서 사람들이 놀라는지를 잘 알고 있었어요. 저만의 기승전결이 짜여 있었던 거죠. 그런데 유럽 친구들 앞에서 발표를 하니 전혀 반응이 없는 거예요. 거긴 국경을 넘나들며 학교를 다닌 친구들도 많고 부모의 국적이 다른 경우도 워낙 많죠. 2개 국어 3개 국어를 하는 친구들도 많고요. 그런 친구들이 앉아서 제 발표를 보며 그래서 뭐 어떻다는 거지 하는 표정으로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이야기꾼으로서의 저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정말 많이 됐어요. 제가 하는 이야기는 결국 누군가에게 생소할 수 있는 지점을 파고드는 것이 핵심인데, 별로 생소하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나는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어요.

사진 이길보라님 제공

막막했을 것 같아요.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좌절의 시간을 많이 겪었어요. 네덜란드 사회에서 나는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해 나가야 할까 파악하는데 시간을 많이 썼고요. 그걸 파악하고 나서도 어떤 방법론이 통할까 시도해 보는데도 시간을 많이 들였습니다. 네덜란드 영화학교가 이론과 실기가 함께 있는 과정이라 도움이 많이 됐어요. 영화를 완성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저의 질문, 연구 주제가 더 우선이 되는 과정입니다. 명확한 질문이 있다면, 그걸 잘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요. 학교 학장님께 커리큘럼을 들으면서 그게 결국 제가 해 왔던 작업 과정과도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항상 작업을 시작할 땐 어떤 질문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저한텐 작업 과정이었고요. 그런데 학교에서 공부하기 전엔 그런 관점으로 생각하진 못했어요. 


네덜란드에서 공부하면서 무엇을 가장 크게 배웠나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2년 내내 끊임없이 배웠어요. 졸업 후에 어느새 결과 중심적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는 다시 과정 중심 사고로 돌아오고 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어요. (웃음) 과정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말 그런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일해 보는 경험은 다른 차원의 일이에요. 네덜란드에서의 경험을 통해, 제가 전에 작업한 <로드스쿨러>, <반짝이는 박수 소리>, <기억의 전쟁> 모두 끝나고 완결된 것이 아니라 언제든 제 작업에 응용될 수 있고 그게 새로운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관점을 갖게 됐어요. 큰 자산이죠. 결국 저는 계속해서 어떤 질문들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나가는 연구자예요. 글과 영화, 말하기를 통해 어떻게 하면 답에 도달할 수 있을까를 찾아 나가는 사람이죠. 그렇게 보면 모든 작업들이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가져요. 외부에서 볼 때 실패처럼 보이는 작업들도 저에게는 의미 있는 성취이고 작업이죠. 제가 해 보고 싶은 걸 시도해 봤으니까요. 이 모든 것들이 답에 다가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보면 무의미한 시도나 실험은 없어요. 이런 태도를 갖게 된 것이 제게는 가장 큰 배움이었습니다.


<기억의 전쟁> 작업을 함께 했던 분들과 공동으로 책 작업도 하고 계시다고요.

프로듀서, 촬영감독 등 각 작업을 함께 했던 동료들과 함께 책을 내려고 해요. 각자의 시선으로 <기억의 전쟁> 작업 과정을 돌아보는 글을 모으고 있어요. 이를 통해 또 많이 성장하고 있다고 느껴요. 영화가 성공했나 못했나, 관객이 많이 들었나 아닌가 하는 관점이 아니라 이 영화가 주는 미덕은 무엇이고 또 이 영화의 제작과정이 주는 미덕은 무엇인가 하는 관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돌아보고 있어요. 기획 과정과 촬영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고 마주했는지, 편집 과정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영화를 마무리하고 릴리스하며 관객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무엇을 느끼고 나누었는지, 이 모든 것들을 짚어보고 서로 나누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는 자본 논리로 접근하는 경우가 아무래도 많죠. 이게 한 시간에 얼마다, 이렇게 하면 돈 버리는 거다, 책은 많이 팔려고 쓰는 거다, 명예를 가져다 줄 거다 등등. 그런데 세상에는 베스트셀러나 흥행 영화가 아니어도 가치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해요. 제 생각에 예술은 결국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는, 혹은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합니다. 낯설게 보기, 다르게 보기를 가능하게 하는 거죠. 자본주의의 굴레를 아주 잠시라도 멈춰 보거나 뒤집어 보게 하고,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이렇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등 많은 것들을 질문하게 해요. 물론 예술가들이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려면 적당한 현실감각이 필요하죠. 그리고 당연히 사회에서도 이들의 작업을 노동으로 정당히 인정해 주는 것이 필요하고요. 예술가니까 무료로 이야기해라, 글 써라, 노래해라 라고 해서는 안 되죠. 다만 그 예술가들이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것은 질문하는 것, 메시지를 던지는 것, 혹은 아름다움을 좇는 것이라는 점을 계속 생각할 필요는 있는 것 같아요.


질문을 던지는 일에서 한계를 느끼거나 회의감이 든 적은 없으세요? 

다큐멘터리 <로드스쿨러> 작업을 하고 <길은 학교다> 책을 썼을 때 인터뷰나 활동을 통해 학교를 그만두는 학생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실제로 그런 학생들이 상당수 있었고 회의감이 들진 않았어요. 물론 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그만둔다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궁극적으로 사회에 던지고 싶었던 것은 우리가 정말 배움이란 것을 잘해나가고 있느냐는 물음이었죠.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좌절을 경험하긴 했어요. 내가 아무리 열심히 영화를 만들고 책을 써도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구나 깨달았을 때죠. 지금 생각하면 참 오만한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한 개인이 당연히 바꿀 수 없는 건데. 그땐 그럴 수 있다고 믿었나 봐요. (웃음) 요즘은, 자그마한 변화의 순간들을 마주하는 것에 크게 감사하게 돼요. 제게 일본 국적의 파트너가 있는데, 그의 어머니가 도쿄에 우리를 만나러 온 적이 있어요. ‘같다'라는 말이 일본 수어와 한국 수어 표현이 똑같다며 손으로 해 보이셨어요. 아시아권에서 결혼은 가족과 가족 간의 일이라는 인식이 강하고, 아들이 연애하는 사람의 부모님이 장애인이라는 것을 불편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죠.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수어를 하며 제 눈을 볼 때,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식의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사람과 내가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함께 밟아나갈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본 거죠. 이런 순간들을 만들어 나가는데서부터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지금은 그런 하나하나의 순간들이 모두 소중해요. 

<반짝이는 박수 소리> 일본 시사 때는 한국 수어/음성 언어, 일본 수어/음성 언어 총 네 가지 언어로 관객들과 만났어요. 많은 분들이 영화도 좋았지만, 그 경험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너무 아름다웠다는 평을 해 주었고요. 곧 이랑 작가님과 알라디너 TV에서 온라인 북토크를 할 예정인데 수어 통역하는 분들을 두 분 모셔서 총 네 명이 한 화면에 나올 예정이에요. 앞으로 더 다양한 시도를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돼요. 저의 작업들이 그저 텍스트로 읽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무언가 조금 바뀐 현실, 다양한 실험들로 돌아올 때가 저는 너무 뿌듯하고 감사해요. 그게 창작을 계속해 가는 에너지가 되고요.


그렇다면 요즘 가장 많이 생각하는 질문은 뭔지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네요.

이건 글로 잘 써보려고 구상 중인 이야기인데 특별히 공개해볼게요. (웃음) 꽤 아슬아슬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국경을 열 때 어떤 영역부터 여는 것이 맞을까 하는 거예요.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저는 한국에서 영화를 개봉하고 파트너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려고 했어요. 그 이후에는 한국, 일본, 네덜란드를 오가며 지내려고 했고요. 그런데 모든 것이 어긋났고, 파트너와는 6개월째 생이별 중입니다. 어렵게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어요. 최근에 한국, 일본, 베트남이 국경을 열었는데 비즈니스 비자를 가장 먼저 열었습니다. 경제활동을 이어나가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죠. 그런데 한 편 의문도 들었어요. 왜 비즈니스가 당연히 가장 먼저였어야 하지? 닫았던 국경을 연다면 돈이 아니라 사랑을 먼저 열어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실제로 덴마크에서 다른 국적의 파트너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국경을 열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 경우 자주 오가는 만큼 현실적인 상황들을 고려해 2주 자가격리도 면제해 주고요. 물론 코로나 관련 검사를 철저히 한다는 전제로요. 역병으로 국경이 닫혔다가 열린다면, 그건 비즈니스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만나게 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나의 딸, 아들, 남편, 아내, 혹은 그렇게 분류되지 않는 파트너들. 물론 누군가는 철없는 소리 한다고 할 수도 있죠. 비즈니스에 문제가 생겨 국가가 무너지면 어떡하냐고 하면서요. 요즘 국제 커플들이 많이 있는 온라인 카페를 자주 보게 되는데요. 그들이 하는 선택 두 가지는 결혼 아니면 이별인 경우가 많아요. 이전엔 비자가 없어도 자유롭게 왕래하며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보수적인 선택을 강요받는 거죠.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 결혼을 하거나, 헤어지거나. 덴마크처럼 국가가 나서서 다른 옵션을 제공하는 것도 비현실적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인간에 대한 가능성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좌절의 순간도 끝없이 마주하게 됩니다. 예술가로서 인류의 가능성에 무게를 더 두나요, 절망감에 무게를 더 두나요? 아니면 중립적인가요?

반반인 것 같아요. 그 밸런스를 잘 찾는 것이 너무 중요한 일이고요. 인간 사회가 너무 힘들고, 인류는 절대 진보하지 않고 나아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절망할 때는 극지방 다큐멘터리나 사진, 관련된 책을 읽어요. 어떻게든 도피해 보는 거죠. 그러다 또 어쨌든 제가 발 붙이고 사는 세계는 인간 세계니까, 여기서 아름다운 순간들을 마주할 때면 역시 인류는 나아지고 있어 하며 희망을 갖기도 합니다. 그 사이를 잘 오가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밸런스를 서로가 존중하고 지켜주는 것 역시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어디 가, 일 해야지' ‘휴가를 두 달이나 써' 질문하기 전에 잘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그는 죽지 않기 위해 휴가를 가고 퇴사를 하는 것일 수 있잖아요. 무용해 보이는 시간들을 많이 가지면 좋겠어요. 그 시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할 수 있는지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고요. 그런 시간들을 지나면서 사람은 영감을 얻기도 하고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기도 하잖아요. 그 시간들을 서로에게 계속 장려할 수 있는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실험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청년 기본 소득이나 코로나 때의 기본 소득 모두 정부가 했던 실험들이죠. 저는 우려와 달리 청년들이, 사람들이 돈을 써야 할 곳에 잘 썼다고 생각해요. 2020년의 우리에게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양한 실험을 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예술도 마찬가지고요. 예술가도 더 많아지고,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예술을 직접 경험해 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자본주의 사회를 잠시나마 멈춰 보기도 하고 지구가 죽어가는 시간도 조금 늦출 수 있지 않을까요. 더 나은 삶의 방식을 고민할 수 있을 거예요.

사진 이길보라님 제공

사회에 예술과 관련된 활동들이 많아지는 것은 사회에 어떤 도움이 될까요?

돈이 인생의 최고 가치가 아님을 알게 되는 순간들이나 계기들이 사회에 더 많아져야 된다고 봐요. 아름다움을 좇는 것, 무용한 것, 재미있어서 하는 것들이 가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예술을 하면서 알게 된다고 생각해요. 예술이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살 수 있구나, 아름다움이란 이런 거였지 재발견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볼 수 있게 한다고 믿어요. 영화나 소설을 보면서 감정이입을 하잖아요.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 보는 경험, 저는 그 경험이 정말 중요하다고 봐요. 나는 절대 네가 될 수 없지만, 네가 되어 보려는 노력을 해 나간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거죠. 영화라는, 소설이라는, 팟캐스트라는, 혹은 또 다른 매체를 통해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네, 나는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볼까 하는 경험들. 그런 경험들을 해 나가는 것이 함께 살아가는 조금 더 나은 방법이 아닐까 해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우선 준비 중인 책들이 있어요. 아까 말씀드린 <기억의 전쟁> 아카이빙 북을 내년 출간 목표로 작업하고 있고요. 지금까지 신문에 썼던 칼럼들을 모아 칼럼집 출간을 준비하고 있어요. 책 <반짝이는 박수 소리> 일본판 출간도 준비 중이에요. 이를 통해 만나게 될 일본 사회는 어떨지 창작자로서 궁금하고 기대가 돼요. 

감독으로 돌아와서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말미에 나오는 신작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의 몸>도 준비 중이에요. 10월부터 리서치 작업을 시작해서 천천히 준비하고 작업하려고 합니다. 2022년에 관객들을 만나는 것이 목표예요. 당분간은 독립서점 중심으로 여러 온라인 북토크 계획도 많이 잡혀 있습니다. 무용한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지만, 태생적으로 열심히 살고 있네요. (웃음)


이길보라님을 응원하고 싶다면?

책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를 구매한다.

이길보라님의 지난 영화들을 감상한다.

<로드스쿨러>   <반짝이는 박수 소리>   <기억의 전쟁>



Interview 헤이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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