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모임에서 만났던 학인에게 집 초대를 받았다. 비건주의자인 그는 비건 간식을 준비해오라고 했다. 채식주의자를 위한 간식. 그에게 물어보니 동물이 들어간 음식은 모조리 안 먹는단다. ‘비건은 육류를 안 먹는 거 아니야?’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나는 육류를 뺀 나머지 음식을 생각해보았다. 퍼뜩 빵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와 가까운 지인에게서 그가 밀가루가 든 음식도 꺼린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속이 더부룩해서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럼 동물을 배제하고, 밀가루를 제외하니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전체에서 절반으로, 또 절반의 절반으로 좁혀지는 기분이 들었다.
2주 전부터 약속이 잡혔는데 비건 간식은 무엇인지 어렵게 느껴졌다. 뭐든 복잡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평소 과일과 채소를 즐겨 먹지만 모든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어야 영양상으로 신체가 건강하다고 믿는, 허기질 때 고기를 먹지 않으면 매가리가 없고, 하루라도 밥을 안 먹으면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우울해지는, 먹는 즐거움이 크고, 가족의 끼니를 책임지는 사람인지라 먹는다는 것은 꽤 중요한 일이었다.
과일을 사 가면 비교적 쉬운 결정이겠지만 난 그를 위해 특별한 간식을 준비하고 싶었다. 그가 원하는 산뜻하고 영양가 있는, 맛있는 걸 나누고 싶었다. 먹방의 세계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잠시라도 비건주의자와 배부른 간식을 먹고 싶었다. 고양이와 살면서 혼밥을 주로 하는 그에게 근사한 간식으로 함께하고 싶었다.
나의 고민은 우리가 만나기로 한 그 전날까지 이어졌다. 처음에는 아보카도를 으깨서 만든 과카몰리를 생각해냈다. 하지만 후숙을 잘못했는지 아까운 아보카도가 썩어버렸다. 생각해보니 과카몰리와 찍어 먹을 나초도 밀가루여서 안 되는구나. 다음으로는 그릭요거트에 그래놀라를 넣어 먹을까 생각했다. 요거트도 젖소에서 나온 우유 성분이라 식물성 요거트가 필요했는데 품절돼서 패스. 오트밀 주스는 밍밍해서 내가 그냥 패스, 내가 아이들과 즐겨 먹는 파인애플 또띠아 피자는 치즈가 올라가서 땡. 샌드위치는 마요네즈와 밀가루 때문에 땡땡.
나는 며칠 눈이 빠지게 온라인으로 식품을 검색해보았지만 비건 인증받은 음식을 고른다는 게 낯설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마트를 갔다. 비건을 위한, 밀가루를 제외한 간식으로 무엇을 고를 수 있을까. 과자와 빵, 김밥(햄이 있음), 떡볶이, 순대, 어묵, 라면, 연어회 패스, 패스. 흔하디 흔한 음식들이 안 된다니. 도대체 무얼 먹고사는 거야. 그동안 그가 바라보았던 세상은 어떤 거였을까. 마트의 빼곡하게 진열된 물품들 사이에서 비건을 위한 먹거리는 선택의 폭이 좁았고, 까다롭게 고를 수 있는 재료는 내 눈에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결국 빈손으로 마트를 나왔다.
육류식품은 내가 자각하던 것보다 훨씬 깊숙하게 우리의 식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비건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생각할 거리가 많아져서 불편했다. 그래, 나답게 준비하자는 심정으로 집에 밀가루 대신 쓰던 쌀 부침가루에 부추, 양파, 당근, 애호박, 청양고추를 썰어 넣고 부침개 반죽을 했다. 여기에 부침개의 백미인 오징어를 넣을 수 없었다. 건새우를 갈아서 넣으면 감칠맛이 나서 엄청 고소한데 이것도 빼야 했다. 빼면 뺐지 더할 것은 없었다.
약속된 날 우리는 만났다. 나는 쑥개떡과 부침개를 가져갔다. 그는 애플수박, 자몽, 토마토, 포도, 참외 등 과일을 한 상 차려놨다. 우리는 맛나고 배부르게 먹었다. 그리고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왜 비건이 되었는지, 힘들지는 않았는지. 그는 가족처럼 키운 개가 죽자 모든 동물이 자신이 키우던 개처럼 보였다고 했다. 자신의 살을 맞대고 살던 개의 온기, 감촉, 살아있음을 너무나 사랑했던 만큼, 숨 쉬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생명으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비건주의자로 산다는 게 가끔 힘들 때도 있지만 오히려 지구력이 생기고, 피부가 좋아지고, 소화도 잘된다며, 내가 추구하는 모습대로 사는 게 만족스럽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아는 만큼 실천하며 살고 있었다. 유기견 봉사를 다니다 유기견 보호소에서만 10년 살았던, 언제 죽을지 모르는 늙은 개를 입양해서 같이 살았다. 어느 날 집 앞에서 울고 있던 고양이를 데려다 키웠다. 그에겐 동물은 같이 살아가야 할 대상이었다. 고양이의 얼굴만 봐도 마음을 알아채고 대화를 나누는 그에게 동물은 가족 이상의 의미였다. 그가 독립한 이후로 6년 넘게 길고양이들의 끼니를 하루에 두 번씩 아침 10시와 오후 6시마다 동네를 순회하며 깨끗한 물과 사료를 채워주었다. 캣맘인 그를 따라 동네를 도는데 길고양이들이 그를 알아보고 슬금슬금 다가와 사료를 먹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그것이 힐링이라고 했다.
비건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편한 게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경지의 수준이라는 걸 깨달았다. 성장기를 보내는 아이들과 살면서 비건을 하기란 쉽지 않다. 아이들 핑계를 대지 않고서라도 이따금 환장하게 떠오르는 식욕을 누를 재간이 없다. 갑자기 길고양이들을 돌보는 캣맘이 될 자신도 없다. 하지만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비건 간식을 위해 식재료 하나하나를 고민하던 순간은 채식주의자의 마음이었다.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어떤 건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지나치게 더하기보다 굳이 넣을 필요가 없는 가짓수를 덜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사랑하고 지켜야 할 대상에 대한 자신의 선택과 결정이 단호할 만큼 대가도 크다는 걸 배웠다. 동네에서 길고양이를 만나면 따스한 눈길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모든 이들의 식성이 다르고, 경험도 다르고, 신체의 정도, 신념도 다를 것이다. 그중 즐겁고 묵묵하게 비건을 지향하는 분들도 계실 거다. 오히려 먹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 나니 단순하게 먹거리를 선택할 것이다. 내가 비건에 대해 호들갑을 떨며 며칠을 보냈지만 그 사람이 되어본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음식을 먹는 그 순간을 기쁘게 함께하고 싶었던 마음은 변함이 없다. 내게 익숙하던 것을 잠시 내려놓고 그 사람의 마음이 되어보는 것. 한 사람의 마음을 담아보는 것. 또 다른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