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리스와 접촉한 후 세상을 정복할 아이템(무기)을 손에 넣은 유인원이 동물 정강이뼈를 하늘 높이 던진다. 그동안 당해온 설움을 단 번에 날리는 포효와 함께.
공중을 선회하던 동물 뼈가 우주선으로 바뀌고 요한 시트라우스의 왈츠를 배경으로 유유히 전진한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오프닝 장면이다.
이 때 유인원이 던진 뼈 안에는 과학기술 발전 등 인간을 세상의 지배자로 만들어줄 다양한 자원들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상대를 압박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협박의 기술도 포함되어 있었다.
1994년 일군의 학자가 콩고공화국 은고고(NGOGO)에 잠입한다. 야생 침팬지 생태를 조사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거기서 그들이 만난 침팬지 공동체는 여느 무리들과는 달랐다. 보통 40-50 마리가 모여 사는 것과 달리 무려 140여 마리가
군집을 이루고 있었다.
은고고 침팬지들은 제인구달과 장난치며 교감을 나누거나 밀림의 왕자 타잔 앞에서 익살을 부리던 치타가 아니었다. 위계질서가 철저했고 이를 어길 경우 가혹한 응징이 따랐다. 그리고 영원한 보스도 없었다. 힘을 키운 수컷이 종종 보스 자리를 넘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끔찍한 난투극이 벌어졌다. 그 장면은 룰 없는 종합격투기였다.
목적 달성을 위해 상대를 위협하고 공격하는 건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하나 그들이 가지지 못한 무기가 하나 있었다. 언어를 이용한 협박기술이다.
물론 그들도 언어를 사용하긴 했다지만 주로 놀라거나 아첨할 때, 화낼 때로 제한적이었다. 죄책감이나 수치심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과 같은 고급 스킬은 갖추지 못했다. 그 건 아마도 종교나 도덕의 부재 때문일 터다.
침팬지와 달리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인간들은 더 이상 완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리적 폭력은 이제 덜떨어진 자들이나 사용한다.
그 대신 인간은 그보다 교묘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을 고안해 냈다. '두려움'이나 '책임감', '죄책감'을 이용한 협박이다. 쉽게 알아채고 대응할 수 있는 강압과 달리 이는 안개처럼 몰려와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곤 한다. 이를 각 단어 첫 글자를 따 안개(Fog)로 부른다.
‘너는 할머니가 가엽지도 않은가 보구나 ‘ '가족보다 소중한 게 있다고 생각하니' '너는 모르겠지만 다들 너를 무정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처럼 상대의 취약점을 파고들어 불편하게 만들고 저항 의지를 꺾어 놓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상대가 원하는 걸 하고 있다.
그들은 협박이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명백히 협박이다. 이런 일은 주로 가까운 사이서 일어난다. 원치도 않은 일을 해주고 난 뒤 자괴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이런 또 당했군...'
뭔지 모르게 불편하게 만들어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초조함에 밀려 내가 원치도 않는 걸 해주지 않으려면 지체 없이 할 게 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안개의 정체를 식별하는 거다. 두려움을 조장하고 있는가 아니면 과도한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유발하는가. 그런 다음 나는 그걸 해줄 마음이 없음을 명확하게 밝힌다. 필요하다면 상대가 지금 나를 협박하고 있음도 지적해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