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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연대감 벽을 넘다

가족 간 애증의 늪 탈출기

by 장동혁
이 이야기는 피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단순히 1분에 한 바퀴씩 우리 몸을 돌며 온기를 전하는 붉은 액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인간성과 그 안에서 생겨나는 갈등. 그리고 그 속에서 끌어 올랐다 싸늘히 식고, 그러다 서서히 덥혀지기도 하는 인간 감정에 관한 이야기다.


그의 이름은 허삼관. 어느 동네를 가든 하나쯤 있는, 약간 모자란 듯 소갈머리 없는 남자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피를 팔아 얻은 돈으로 뭘 할까 하다 결혼이란 걸 한다.


이기적인 유전자


“싫어. 난 앞으로 아무 일도 안 할 거야. 이제 집에 오면 좀 쉬어야겠어. 쉬는 게 어떤 건지 아나? 바로 이런 거라구. 등나무 평상에 누워서 두 다리를 의자에 걸치고 있는 거지. 내가 왜 이러는지 알고 싶어? 바로 당신을 벌주기 위해서야. 당신이 저지른 잘못 말이야. 당신은 나를 배신하고 그 후레자식이랑 잠을 자서는 일락이까지 낳고……. 그 생각을 하니 또 열받네. 그런데도 나더러 쌀을 사오라구? 꿈 깨시지.”
-허삼관 매혈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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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허삼관은 장남 일락이가 자기 자식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도 과거 연적 하소용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안 허삼관은 일락이를 매섭게 내친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드러누워 꼼짝하지 않기로 한다.


그렇다면 9년씩이나 기른 자식을 단지 핏줄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냉정하게 밀쳐낸 아비의 행동을 어떻게 봐야 할까? 자기 세간 들어내는 데 일꾼보다 더 힘을 쓰고, 전날까지 쓸고 닦은 세간을 싣고 떠나는 수레 뒤에서 잘 가라고 손까지 흔들던 그 인간적인 사람이 말이다.


그의 행동에서 연대감의 두 얼굴이 보인다.

연대감은 자신이 속한 집단과 동질감을 느끼고, 그 집단을 위해 희생하게 만든다. 이처럼 이처럼 연대감은 "우리"라는 운명 공동체를 만들지만 동시에 "그들"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을 다르게 대한다.


허삼관 역시 하루아침에 돌변해, 자기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아이를 차갑게 대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랫동안 길러온 정보다 핏줄이 우선이 되는 것일까?


우리는 흔히 피를 나눈 사이라면 강한 유대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혈연이 아니면 강한 유대를 가질 수 없다는 것 역시 우리 피 안에 각인된 관념이 아닐까?


허삼관은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아이를 품는 것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고, 무엇보다 자기 피를 나눠가진 자식들에게 갈 것들이 그 아이에게 가는 게 마뜩지 않았을 것이다.


애증에서 피어난 공감


“내가 공장에서 누에고치 나르면서 땀 흘려 번 돈을 일락이한테 쓰는 건 나도 바라는 바지만, 피 팔아 번 돈을 그 애한테 쓰는 건 왠지 좀 그렇다구.” — 허삼관 매혈기

정부정책 실패로 고난의 시기를 보내던 그는 가족을 위해 또 한 번 피를 뽑는다. 그렇게 해서 쥐게 된 돈으로 그는 승리반점으로 향한다.


이날도 일락이는 제외다.


조상의 피 묻은 돈으로 남의 자식 걷어 먹이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피를 차갑게 식게 만든 것이다.


그래도 마음에 걸렸던지 고구마나 사 먹으라며 일락이에게 돈을 쥐여 준다. 하지만 고구마 크기가 너무 작았는지 허기가 가시지 않자 일락이는 국수 먹고 있을 가족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불이 꺼져 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서러운 밤을 보낸 일락이는, 날이 밝자마자 친부를 찾아가 국수 좀 사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국수는커녕 욕만 실컷 먹고 쫓겨난다. 결국 그 길로 국수를 사줄 사람을 찾아 동네를 헤맨다.


동네 사람들까지 나서는데도 눈 하나 꿈쩍 않던 허삼관.

그러다 부인까지 울며불며 일락이를 찾아 나서자, 하는 수 없이 그도 일락이를 찾으러 나선다.


한참 뒤, 울다 지쳐 벽에 기대앉은 일락이를 발견한다.

“자. 업혀라.”

허기져 가벼워진 아이를 등에 업고서 허삼관은 끝도 없이 욕을 퍼붓는다.


“자. 업혀라. 이 쪼그만 자식, 개 같은 자식, 밥통 같은 자식……. 오늘 완전히 날 미쳐 죽게 만들어 놓고…… 가고 싶으면 가. 이 자식아 사람들이 보면. 내가 널 업신여기고, 만날 욕하고, 두들겨 패고 그런 줄 알 거 아냐... 내세에는 죽어도 네 아비 노릇은 안 할란다... 너 꼭 기다려라. 내세에는 내가 널 죽을 때까지 고생시킬 테니...”
-허삼관 매혈기-중


승리반점의 환한 불빛이 보이자 일락이가 허삼관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 우리 지금 국수 먹으러 가는 거예요?”


허삼관은 문득 욕을 멈추고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그런데 신기하다.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욕이 차가운 서릿발이 아니라, 밤새 소리 없이 내려 소복이 쌓인 함박눈처럼 따뜻하다.


그날 밤 허삼관이 쏟아낸 욕은 기구한 팔자에 대한 원망과, 어린것에게 못할 짓 했다는 자괴감의 배설물이었다. 이 과정에서 응어리진 화가 녹아내린다. 무엇보다, 하루아침에 가족에서 떨어져 나와 겪게 된 아들의 설움에 공감하게 된 것이다.


공감, 연대감의 벽을 넘다


얼마 후, 허삼관은 진정으로 일락이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인다.

사경을 헤매는 원수 하소용을 살리기 위해 허삼관은 일락이를 그의 집 굴뚝에 앉히기로 한 것이다. 그의 첫사랑 허옥란의 청이었다.


아버지의 명이라 거부도 못하고, 죽으러 가는 놈 마냥 엉거주춤 기어 올라가는 아이의 뒷모습. 굴뚝에 올라타 서러운 마음에 목을 쥐어짜며 소리치는 아이의 얼굴.


그 모습을 본 허삼관의 피가 다시 뜨거워졌다.

그러자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공표한다.


“누가 뭐래도 일락이는 오늘부터 내 아들이다.”

“이에 딴지 거는 사람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애증이 공감을 딛고, 연대감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애증의 늪에서 빠져나가려면


애증이란 사랑과 미움이 복잡하게 얽힌 감정이다. 그게 가족처럼 깊게 밀착한 관계에서는 생기면 고통은 배가 된다. 속이 뒤집혀 한바탕 쏟아 붙고 나면 속이 시원하다. 하지만 살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이 찾아온다. 차라리 밉기만 하면 좋겠다. 제발 사라져 줬으면 하다가도, 결코 그럴 수 없어 절망한다.




우리 관계가 애증의 골짜기로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로에게 과도하게 기대려는 욕심을 줄이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설사 상대가 떠나가버릴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개별적인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


만약 이미 애증이라는 늪에 들어섰다면, 누군가는 그 늪에서 한 발을 뺀 뒤 상대를 끌어줘야 한다. 그래야 둘 다 산다. 그건 한 뼘이라도 더 성숙한 사람의 몫이다.


그 과정은 온갖 감정의 격류와 맞서는 일이고, 상대의 이면과 배경까지 이해해야 하는 험난한 길이다. 그 과정에서 입을 상처도 감수해야 하고, 인생의 상당 부분을 떼어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공하면 애증의 늪에서 연민으로 그리고 동반성장이라는 길로 들어설 수 있다.


그것이, 애증에서 연대로 넘어가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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